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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목왕[忠穆王]

짧았던 삶, 좌절된 개혁

1337년(충숙왕 복위5) ~ 1348년(충목왕 4)

충목왕 대표 이미지

경기 개성 고려 충목왕 명릉군 1릉

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제29대 고려 국왕이었던 충목왕(忠穆王)은 고려에 대한 원(元)의 내정간섭이 절정에 다다른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즉위 이전 충렬왕(忠烈王)부터 충혜왕(忠惠王)에 이르는 고려 국왕들은 원의 정세 변화와 더불어 심각한 부침을 겪었다. 원에서 누가 권력을 장악하였는가에 따라 국왕의 폐위나 복위가 결정되는 상황이 고려왕실에서는 수십 년 동안 반복되어왔다. 심지어 충숙왕(忠肅王)과 충혜왕 시기에는 심왕(瀋王) 왕고(王暠)를 지지하는 세력이 그를 고려 국왕으로 옹립하고자 획책하였으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려를 원의 지방행정기구로 만들자는 입성론(立省論)까지 제기하여 고려를 위기에 빠뜨렸다. 이처럼 내우외환이 거듭되는 가운데 충목왕은 8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고려의 국정을 바로잡아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떠안게 되었다.

2 어린 국왕의 갑작스러운 즉위

충목왕의 고려식 이름은 왕흔(王昕)이며, 몽고식 이름은 바스마도르지(八思麻朶兒只)이다. 충숙왕 복위 6년인 1337년에 충혜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덕녕공주(德寧公主)는 원 진서무정왕(鎭西武靖王) 초팔(焦八)의 딸이자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의 고손녀로서 충혜왕과 정략결혼을 하여 그와 장녕공주(長寧公主)를 낳았다.

원 황실 출신의 공주를 어머니로 둔 그가 차후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것임은 비교적 자명하였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는 세자로 책봉되어 충분한 제왕 교육을 받은 뒤 충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전례대로 원 황실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부마의 자격도 획득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즉위하는 과정에서는 전술한 단계 가운데 어떠한 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의 즉위는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건이었다.

충목왕의 아버지 충혜왕은 방탕한 행위로 인해 한 차례 폐위된 바 있음에도 복위 후 음란한 행동을 지속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만 힘쓰다 또다시 원의 신임을 잃었다. 충혜왕은 충숙왕의 유명(遺命)으로 고려 국왕의 자리는 이어받았지만 아직 원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의붓어머니 경화공주(慶華公主)를 강간하는 등 각종 악행을 저질러 심왕 일당에게 심왕을 추대할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를 제공하였다. 또한 원 순제(順帝)의 제2황후였던 기황후의 일족을 강간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궁 은천옹주(銀川翁主)의 아버지 임신(林信)이 기황후의 오빠 기륜(奇輪)을 구타하였을 때 임신을 두둔하는 등 노골적으로 기씨 일족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 나아가 궁궐에 맷돌과 디딜방아를 다수 배치하고 수공업을 주관함으로써 상업·무역을 통한 식리 추구에 적극 앞장섰다. 이러한 충혜왕의 악행은 기씨 일족에 의해 원 황실에 알려져 원 내부에서 그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결국 1343년(충혜왕 후4) 11월, 사신 고용보(高龍普)에 의하여 충혜왕이 원으로 압송됨에 따라 고려는 무주공산의 상태로 접어든다.

이듬해 정월에 충혜왕은 황제의 명을 받아 중국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을 가던 도중 사망하였다. 자연히 원 황실에서는 차기 고려 국왕으로 누구를 추대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충혜왕의 아들이자 원 황실의 자손으로 충목왕이 있었지만, 그는 나이가 적다는 결정적 단점을 갖고 있었다. 또한 원 황실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원 황실의 부마가 된 심왕 왕고보다도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고용보의 품에 안겨 황제를 알현한 충목왕은 아버지와 어머니 중 누구를 배우겠느냐는 황제의 질문에 어머니를 배우겠다는 대답을 하여 왕위 계승을 허락받았다. 비록 8살의 어린아이에 불과하였지만, 아버지의 비극이 어디에서 연유하였는지를 명확히 인지하고 자구책을 강구하였을 만큼 그는 총명하였다.

3 개혁정치의 추구와 좌절

즉위 직후 충목왕은 어머니 덕녕공주와 더불어 충혜왕이 남긴 유산을 청산하는 데 힘썼다. 물론 8세의 그가 주도적으로 정치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당시 조정의 중신들과 협력하며 개혁을 추진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는 교서를 내려 국내의 신료들로 하여금 국정을 바로잡고 백성을 구휼할 수 있는 방안을 제출하도록 한 뒤, 한범(韓范)·장송(張松)·정천기(鄭天起)와 같은 선대의 폐행들을 축출하여 기존 정치와의 단절을 꾀하였다. 당시 그가 추구하였던 개혁정치의 요체는 이제현(李齊賢)의 글에 집약적으로 담겨 있다. 이제현은 장문의 글을 통하여 보흥고(寶興庫)·덕녕고(德寧庫)와 같은 충혜왕의 사적 이익에 봉사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기구들의 청산, 정방(政房)의 폐지, 녹과전(祿科田)의 정상화 등 정치적·경제적 차원의 대대적 개혁안을 제시하였는데, 충목왕은 그의 의견을 십분 반영하여 이후의 개혁정치를 전개하였다.

순차적으로 충목왕은 보흥고·덕녕고·응방(鷹坊) 등 백성 수탈의 중심축이었던 기관들을 폐지하고 그곳에서 차지하였던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또한 정방을 혁파하여 인사를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에 분담시켰으며, 부당하게 권세가들에게 빼앗긴 녹과전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로부터 여러 대에 걸친 측근정치로 무너져 내렸던 고려의 국정이 비로소 활력을 띠고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랜 시간 산적된 폐해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1345년(충목왕 원년) 12월, 우정승(右政丞)으로서 충목왕 즉위 후의 정국을 주도해오던 왕후(王煦)가 파면됨에 따라 의욕적으로 추진되던 개혁정치는 주춤하기 시작한다. 당시 왕후는 정방과 과전을 폐지하는 일에 앞장섰다가 권세가들의 미움을 받아 파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렇듯 뿌리 깊게 부패한 고려를 쇄신하기란 녹록치 않았다.

4 정치도감 활동과 실패

제자리걸음만을 반복하던 개혁정치는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설치를 계기로 획기적 국면에 접어들었다. 정치도감은 충목왕 3년인 1347년 원 황제의 명령에 따라 설치되었던 개혁기관으로서 왕후·김영돈(金永旽)·안축(安軸)의 주도 하에 운영되었으며 원 황제의 지지에 힘입어 급진적 활동을 펼쳤다. 정치·경제·사회의 세 분야에서 총 12가지 항목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당시 정치도감 관원들은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거나 몸소 지방관이 되어 외방 관리들의 횡포 및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자의적 수탈을 방지하였고 토지를 점탈하거나 양인을 노비로 만든 권세가들을 처단하였다. 원 황제의 지지를 기회로 삼아 충목왕 즉위 직후의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정치도감 활동의 주요 골자였다.

정치도감은 3개월에 걸쳐 과감하게 권세가들을 처단하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과감성은 곧 정치도감에 독이 되었다. 기황후의 일족 기삼만(奇三萬)이 정치도감에서 장형을 받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기삼만의 죽음은 충목왕에게 있어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원과의 마찰을 염려할 수밖에 없었기에 충목왕은 정치도감 관원인 서호(徐浩)와 전녹생(田祿生)을 가두어 그 책임을 물어야만 했고, 원 역시 사신을 파견하여 진상을 규명하였다. 이로부터 정치도감 활동은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원 황제가 다시 정치도감을 두었으나 한 차례 고초를 겪었던 정치도감 관원들은 이전처럼 의욕적으로 활동을 펼칠 수 없었다. 결국 1348년(충목왕 4) 12월, 충목왕이 1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이윽고 정치도감 활동 또한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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