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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忠宣王]

팍스몽골리카 시대의 혼혈 국왕

1275년(충렬왕 1) ~ 1325년(충숙왕 12)

1 개요 및 가족관계

고려의 제26대 왕인 충선왕은 1275년(충렬왕 원년)에 충렬왕(忠烈王)과 몽골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왕원(王謜)이었으며, 후에 이름을 고쳐 왕장(王璋)이라 했다. 몽골 이름은 이지르부카(益知禮普花)이다.

충선왕은 몽골 및 몽골 황제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의 국왕권을 강화시켰던 국왕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려는 충렬왕대에 비해 제도적, 의례적인 면에서 더욱 몽골 제후국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고려의 정국은 몽골의 정국 동향에 긴밀하게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에 충선왕은 몽골의 정국 변화 속에서 결국 유배당하기에 이른다. 한편, 그는 몽골에서의 정치 활동을 위해 고려 국왕위를 아들인 충숙왕에게 넘기면서도, 고려에서의 국정주도권 장악을 위해 아들을 견제하고 조카인 심왕 왕고를 총애하여 충숙왕대의 정국 동향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가 다른 형제로 정화궁주(貞和宮主) 소생의 강양공(江陽公), 정녕원비(靜寧院妃), 명순원비(明順院妃)가 있다. 부인으로는 몽골 성종(成宗)의 형 진왕(晋王) 감마랄(甘麻刺)의 딸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 몽골 출신 부인 의비(懿妃), 종실 서원후(西原侯) 왕영(王瑛)의 딸인 정비(靜妃), 홍규(洪奎)의 딸인 순화원비(順和院妃), 조인규(趙仁規)의 딸인 조비(趙妃), 허공(許珙)의 딸인 순비(順妃)가 있다. 이외에 충렬왕이 사망한 후 그의 부인이었던 김양감의 딸 숙창원비(淑昌院妃)를 맞이해 숙비(淑妃)로 삼았다. 자녀는 의비(懿妃) 소생의 세자 왕감(王鑑)과 충숙왕(忠肅王)이 있었고, 그 어머니를 분명히 알 수 없는 덕흥군(德興君)이 있다.

2 1298년 즉위와 폐위

충선왕은 충렬왕의 장자는 아니었으나 그 어머니가 제국대장공주였으므로, 그 이복형인 강양공 왕자를 제치고 1277년(충렬왕 3)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충렬왕, 공주와 함께 빈번하게 몽골에 입조하기도 했지만, 고려의 세자로서 상당히 오랜 기간 몽골에서 숙위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294년(충렬왕 20)에 세조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그의 손자인 성종 테무르가 즉위하면서 고려-몽골 관계가 경색되었다. 1295년(충렬왕 21)에 충렬왕은 몽골에 숙위 중이던 세자 왕장을 귀국시켜 판도첨의밀직감찰사사(判都僉議密直監察司事)에 임명하여 실제 국정을 담당하게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296년(충렬왕 22) 11월에는 성종의 조카딸인 계국대장공주와 세자의 통혼이 이루어졌다.

고려-몽골 관계의 경색은 성종과 충렬왕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고려-몽골 관계의 주체는 성종과 세자로 변경되었다. 성종과 충렬왕간 관계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성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계승 경쟁에서 충렬왕이 성종을 지지하지 않았을 가능성, 그리고 제국대장공주와 성종의 아버지 친킴(眞金)이 어머니가 다른 형제라는 점 등이 그 원인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세자가 고려-몽골 관계에서 고려 측의 주체가 되면서 고려 내에서도 그 정치적 위상이 부각되었다. 1297년(충렬왕 23) 5월 제국대장공주의 사망은 여기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세자는 공주가 사망한 원인이 충렬왕의 측근세력에 있다고 판단하여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던 궁인 무비(無比)와 환관 도성기(陶成器), 최세연(崔世延), 전숙(全淑) 등을 죽이고 그 일당 40명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0월, 12월의 세 차례 인사를 주도하면서 충렬왕 측근세력들을 새로운 인물들로 교체했다. 이에 충렬왕은 10월에 국왕위를 세자에게 넘길 것을 몽골에 청했다. 이때의 표문은 직전에 세자의 사부로 임명되었던 정가신(鄭可臣)이 작성한 것이었는데, 그가 작성한 표문 내용 중 충렬왕의 본의가 아닌 것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충렬왕이 국왕위를 세자에게 넘긴 것은 당시 내외적인 상황에서 강요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충선왕은 1298년(충렬왕 24) 1월에 고려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즉위 후 7개월만인 같은 해 8월에 몽골에 의해 폐위되어 몽골로 소환되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원인이 되었다. 첫 번째는 그가 즉위 후 단행한 개혁의 문제이다. 충선왕은 즉위 후 충렬왕의 측근세력에 의해 야기되었던 정치, 사회, 경제 등의 부문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이어 대대적인 관제개편을 단행했는데, 이는 충렬왕 원년에 개편한 관제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충렬왕대 개편한 관제가 상위의 관제만을 격하시킴으로써 하위 관제들과의 관계에서 격이 맞지 않게 된 것을 재조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충렬왕대에 제후국의 관제로서 참월하다 하여 격하시켰던 관제들이 복구되거나, 몽골의 관제와 같은 것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몽골의 입장에서 참월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소지를 갖고 있었다.

폐위의 두 번째 요인은 조비무고사건(趙妃誣告事件)으로 표출된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불화이다. 충선왕은 공주와의 통혼 이후에도 그와 부부생활을 하지 않은 반면, 다른 비들을 총애했다고 한다. 특히 조인규의 딸인 조비를 총애하였다. 이와 관련해 누군가가 충선왕과 공주의 관계가 소원한 이유는 조비와 그 어머니가 저주를 했기 때문이라는 무고를 하였다. 공주가 이를 몽골에 알림으로써 조인규, 그의 부인, 조비 등이 몽골로 소환되고 수차례 사신이 오간 끝에 결국 충선왕은 폐위되었다.

몽골은 충선왕을 폐위시켜 몽골로 소환해 숙위생활을 하도록 하고 충렬왕을 복위시켰다. 그런데 이 과정을 거치면서 고려 국왕과 신료들은 몽골과의 관계 속에서 충렬왕이 복위한 후에도 다시 폐위될 수 있음을, 충선왕이 다시 복위할 수도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에 충렬왕 측근세력들은 충선왕이 다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방편으로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를 다른 왕실 인물인 왕전(王琠)에게 다시 시집보내기 위한 공작을 했다.

사신을 통해 공주를 개가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나 충렬왕은 1305년(충렬왕 31)에 직접 그 측근세력인 왕유소(王維紹), 송방영(宋邦英), 송린(宋璘), 한신(韓愼) 등과 함께 몽골로 갔다. 이어 충선왕을 지지했던 홍자번(洪子蕃), 최유엄(崔有渰), 유청신(柳淸臣), 김심(金深), 김연수(金延壽) 등도 몽골로 들어갔다. 공주의 재혼 및 왕 부자의 관계를 두고 두 세력 사이에 정쟁이 벌어졌다.

1306년(충렬왕 32)에 몽골은 충선왕 세력의 손을 들어주었다. 여기에는 1307년(충렬왕 33), 몽골에서 성종이 사망하고 무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의 충선왕이 무종을 지지해 공을 세웠던 것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 복위 이후 정치 활동

충렬왕 세력과의 정쟁에서 승리한 충선왕은 고려의 국정을 장악했고, 1308년(충렬왕 34)에 충렬왕이 사망하자 복위했다. 이러한 폐위와 복위의 과정은 충선왕의 현실, 정치인식을 변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복위 후 달라진 충선왕의 정치방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충선왕은 복위 후 관제를 개편하고 당시 고려국정과 관련한 여러 정책들을 제시했다. 관제와 관련해서는 고려의 제후국으로서의 위상을 보다 분명히 하는 방향으로 개편이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 즉위년에 적극적으로 채용했던 원(院), 부(府)와 같은 몽골의 2품 이상 관부를 채용하지 않고, 몽골에서 정해준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를 제외하고는 몽골의 2품 이상 관부에 해당하는 성(省), 대(臺), 사(司) 등도 채용하지 않았다. 또한 즉위년 개편에서 중급관부까지 개편했던 것에 비해 하급관부까지 개편 범위를 확대했다. 이러한 복위년 관제개편의 방향은 사료에서 “상국(上國)의 제도를 피해 관명(官名)을 고쳐 제후의 법도를 삼가히 했다.”라 표현되고 있다.

또한 충선왕은 몽골에서 자신을 수종했던 신료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측근세력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충선왕이 즉위 당시에 사림원(詞林院)을 박전지(朴全之), 최참(崔旵), 오한경[오형](吳漢卿(吳詗)), 이진(李瑱) 등 과거 출신 신진관료들로 구성하여 측근중심의 충렬왕대 정치방식을 개혁하고자 했던 것과는 매우 달라진 모습이다.

한편 충선왕 복위 후 정치의 가장 큰 변화와 특징은 요령통치(遙領統治), 혹은 전지정치(傳旨政治)라고 칭해지는 방식으로 정치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충선왕은 1308년(충선왕 즉위년) 8월에 충렬왕의 장례를 위해 고려로 귀국해 즉위식을 행하고 복위교서를 내렸다. 그리고 귀국 3개월 만인 11월에 몽골로 다시 돌아갔다. 이후 1313년(충선왕 5) 3월에 충숙왕에게 국왕위를 넘기기까지, 충선왕은 복위 후 최초 3개월을 제외한 재위기간 동안 몽골에 체류하면서 왕명을 고려에 전하는 방식으로 고려를 통치했다. 이 과정에서 권한공(權漢功), 최성지(崔誠之), 박경량(朴景亮) 등 충선왕의 측근세력들이 왕의 명령을 전하면서 권력을 천단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충선왕이 이러한 통치방식을 택한 것은 그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는 몽골 정치세력, 특히 몽골황제와의 관계가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충선왕은 복위 전 무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세운 공으로 몽골의 제왕위인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졌고 이후 심왕(瀋王)으로 승급되었다. 곧이어 충렬왕이 사망하자 고려 국왕위에 오르면서 충선왕은 두 개의 왕위를 갖게 되었다. 이에 대해 대표적 부원세력이었던 홍씨 일가 측에서 문제제기를 했다. 국왕이 오랜 기간 몽골에 머무는 것에 대해서도 고려 내외에서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이에 충선왕은 일시 귀국하여 고려 국왕위를 아들 왕도(王燾), 즉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조카 왕고(王暠)를 세자로 삼은 뒤 자신은 몽골로 돌아갔다. 이어 1316년(충숙왕 3)에는 심왕위까지 조카 왕고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충선왕은 국왕위를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난 이후에도 전지를 통해 고려 국정의 주요 사안들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였다. 충숙왕은 즉위 후에도 국왕으로서 직접 정치를 할 수 없었다.

충선왕은 몽골에 장기간 체류하면서 자신의 집에 만권당(萬卷堂)을 지어 요수(姚燧),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趙孟頫) 등 몽골의 유명한 유학자들을 불러 교유하고 학문을 연구하도록 했다. 이때 이제현도 이들과 함께 교유하고 연구함으로써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문화적인 활동 외에도 충선왕은 몽골제국의 황제인 무종, 인종과의 관계를 통해 몽골의 정치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인종으로부터 몽골의 정승직을 제안 받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그가 몽골에서 황제의 케식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케식은 황제의 신변을 보호하고 개인적 사무를 처리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근위부대이다. 그 수령인 케식관들은 국가사업의 논의와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충선왕은 위와 같은 몽골에서의 활동을 통해 몽골황제 및 몽골 정치세력들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이에 충선왕은 몽골에 머물면서도 고려 내에서 확고한 국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몽골에서의 정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320년(충숙왕 7), 몽골에서 인종이 사망하고 영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충선왕은 토번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 과정에는 충선왕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던 고려 출신 몽골 환관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의 무고와 참소도 작용했다.

고려의 신료들은 수차례 충선왕을 소환해줄 것을 청하는 표문을 몽골에 보냈으나 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1323년(충숙왕 10)에 몽골에서 영종이 사망하고 태정제가 즉위하자 정국이 변동하여 충선왕은 유배지에서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인 1325년(충숙왕 12)에 몽골의 수도인 연경에서 사망했다. 덕릉(德陵)은 그의 능이다.

4 평가 및 후대에의 영향

충선왕은 1298년(충렬왕 24) 한 차례 폐위된 이후 그 스스로 몽골 황제 및 몽골 정치세력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에 매우 적극적인 노력을 했고, 또 그에 성공했던 국왕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아버지인 충렬왕과의 정쟁에서도 승리했고, 아들인 충숙왕에게 국왕위를 물려주고 난 이후에도 고려의 국정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려의 몽골 제후국으로서의 위상은 더욱 분명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몽골에서의 정치력 확보를 위해 몽골의 정국에 지나치게 개입하게 되자 충선왕 본인은 실각하게 되었고, 충숙왕의 국왕권에도 상당한 제약을 주었다.

충선왕은 조카인 왕고를 총애하여 세자로 삼았다가 심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에 심왕 왕고는 충숙왕대에 고려 국왕위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 일부 신료들은 심왕을 국왕위에 옹립하려는 시도를 단행하였다. 충선왕의 결정은 이후 고려 정국을 혼란하게 만드는 데에 주요한 빌미를 제공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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