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고려
  • 충혜왕

충혜왕[忠惠王]

두 번의 즉위와 두 번의 폐위

1315년(충숙왕 2) ~ 1344년(충숙왕 복위12)

1 개요

충혜왕은 고려의 제28대 왕으로, 고려 정치에 끼친 원나라의 영향력이 강력하였던 14세기 전반에 두 차례 왕위에 있었다. 첫 번째 재위 기간은 1330년(충숙왕(忠肅王) 17)부터 약 2년 정도였고, 두 번째 본격적인 재위는 충숙왕이 죽은 뒤인 1340년(충혜왕 후 원년)부터 약 3년 반 정도 이어졌다. “악소배들을 가까이하고 황음무도했다”는 『고려사』 찬자의 평가대로, 그의 생애는 기행에 가까운 온갖 악행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두 차례의 즉위에도 불구하고 거듭 폐위된 것은 그의 악행 탓도 있었지만, 원나라 정국의 변동과도 크게 연관이 되어 있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뒤에는 멀리 중국의 남쪽으로 유배를 가던 도중에 죽었으나,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는 사신의 논평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내린 조치들 중에는 상업을 부흥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는 정책들도 있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그의 개인적인 악행과는 별개로 평가가 필요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2 첫 번째 즉위와 폐위

충혜왕의 이름은 왕정(王禎)이고, 몽골식 이름은 부다시리[普塔失里]이다. 1315년(충숙왕 2) 정월, 충숙왕과 명덕태후 홍씨(明德太后 洪氏) 사이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충혜왕은 1328년(충숙왕 15) 2월, 세자의 신분으로 원나라 수도인 대도(大都)에 가서 황제의 숙위(宿衛)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즉위 이전에 황제의 측근에서 몽골의 권력자, 엘리트들과 교제하며 몽골 황실에 대한 충성을 보이고, 고려 국왕으로 즉위할 준비를 하는 단계였다. 충혜왕이 이후 자신의 후원자가 될 몽골의 권력자 엘테무르[燕帖木兒]를 만나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그의 나이가 15세가 되던 1329년(충숙왕 16), 부왕이 아들에게 양위할 뜻을 표하였다. 이에 이듬해 2월, 충혜왕은 ‘개부의동삼사·정동행중서성좌승상·상주국·고려 국왕(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承相·上柱國·高麗國王)’이라는 책봉호와 함께 국왕인(國王印)을 받으며 정식으로 국왕에 임명되었다. 다음 달에는 원의 관서왕(關西王) 최펠[焦八]의 맏딸에게 장가들었으니, 그가 덕녕공주(德寧公主)이다. 당시 충혜왕은 원에 머물고 있었는데, 귀국하여 고려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것은 그로부터도 6개월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충숙왕이 자신의 병을 이유로 아들에게 양위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상은 훨씬 복잡하였다. 충숙왕은 재위 기간 내내 밖으로는 부왕인 충선왕(忠宣王)과 원 조정의 끊임없는 간섭을, 안으로는 심왕(瀋王)을 추대하려는 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아왔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원 황실과 조정에서는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치열한 정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1320년부터 1333년까지 13년 동안 무려 7명의 황제가 차례로 교대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원에서 태정제(泰定帝) 정권이 붕괴되고 문종(文宗)이 즉위하며, 거기에 공을 세운 엘테무르가 집권하게 되면서 고려 국내의 정치세력들도 충혜왕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또한 충혜왕과 결혼한 덕녕공주의 집안 역시 엘테무르 정권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국에서 충혜왕은 고려 국왕위에 한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었고, 결국 충숙왕이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충혜왕의 첫 번째 재위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빌미가 된 것은 왕의 악행이었으나,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린 것은 원 조정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복잡한 정치적 알력이 개입되어 있었다. 폐위를 단순히 충혜왕의 악행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이해하는 것이다.

왕위를 빼앗긴 충숙왕은 원에 머물면서 자신의 반대파였던 심왕의 세력들을 포섭하는 등 자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때 의외의 사건이 벌어졌다. 몽골 황실의 잠재적인 황위 계승자인 토곤테무르[妥懽帖睦爾]가 고려의 대청도(大靑島)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원 조정에서 충혜왕이 그를 옹립하고자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무고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충혜왕은 즉위한 지 2년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3 두 번째 즉위와 온갖 악행

첫 번째로 폐위된 이후 충혜왕은 곧바로 원나라로 떠나 다시 황제의 숙위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를 지지해주던 엘테무르가 사망하고, 그의 정적이었던 바얀[伯顔]이 집권하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바얀은 엘테무르 가문을 포함해서 충혜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세력들을 모조리 제거해버렸다. 그러면서 충혜왕이 위구르족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악행을 일삼자, 황제에게 “왕정은 평소 행실이 나빠서 숙위에 누를 끼칠까 우려되니, 그 아비가 있는 곳으로 보내 올바르게 지도해야 합니다.” 라고 건의하였다고 한다. 결국 1336년(충숙왕 후5), 충혜왕은 고려로 돌아오게 되었다.

부왕과의 사이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충숙왕은 자신의 아들을 ‘발피(撥皮, 망나니)’라고 부르며 냉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충혜왕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의 왕위는 더 이상 전왕의 유언에 따라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충숙왕이 눈을 감은 것은 1339년(충숙왕 후8) 3월의 일이었으나, 충혜왕이 왕위를 잇는 것으로 결정된 것은 그해 11월의 일이었다.

충혜왕은 곧바로 원 조정에 소환되어 형부(刑部)에 수감되는 위기에 놓이기도 하였다. 1340년(충혜왕 후원년) 정월의 일이었다. 원 조정의 최고 권신(權臣)이었던 바얀이 주도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달인 2월에는 상황이 급격히 변하였다. 바얀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그의 조카 톡토[脫脫]가 바얀을 축출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톡토의 주청으로 충혜왕은 석방되어, 정식으로 고려 국왕위에 복귀할 수 있었다. 3월의 일이었다.

복위 이후 충혜왕은 본격적으로 상식을 벗어난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우선 그는 각종 오락을 즐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대에 대한 길지 않은 『고려사』의 기록 가운데 상당 부분이 사냥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물론 사냥은 그 자체로 악행이라고 할 수 없고, 당시 몽골의 황제들도 주기적으로 사냥을 통해 숭무(崇武)의 정신을 떨치려 했다고 한다. 문제는 왕의 사냥을 수행한 이른바 악소(惡小) 무리들의 무절제한 행동 탓에 민간에 끼친 해악이 매우 컸다는 데에 있다. 또한 격구(擊毬)나 수박(手搏)의 관람을 즐겼던 탓에, 여기에 가담하는 자들의 횡포를 막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의 황음무도함이었다. 『고려사』에는 그가 수많은 부녀자들을 간음하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그 대상에는 조정의 중신들이나 국왕 측근 신료들의 아내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충혜왕은 부왕인 충숙왕의 부인이었던 몽골인 경화공주(慶華公主)도 간음하였다. 이 사실이 빌미가 되어, 당시 왕위를 노리고 심왕과의 모의 하에 정승 조적(曹頔)이 난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다. 국왕의 악행이 그치지 않자 그 주위의 악소배들이 왕을 사칭하고 부녀자들을 간음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하였다.

4 두 번째 폐위와 유배, 그리고 죽음

충혜왕이 악행을 거듭하고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등 실정을 반복하자 고려 신료들의 마음이 그로부터 떠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기황후(奇皇后)의 형제인 기철(奇轍)을 비롯하여 원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기황후는 바얀이 축출된 직후인 1340년(충혜왕 후 원년) 4월,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되었다. 그와 동시에 고려 국내에서도 기씨 가문의 세력이 급격히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충렬왕은 기씨 가문과 그다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였던 것 같다. 1341년(충혜왕 후2) 11월에는 기황후의 형제인 기륜(奇輪)과 충돌하여, 그의 집을 헐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계속되자 기철을 비롯한 일부 신료들은 충혜왕의 황음무도함을 언급하면서 고려에 원나라 내지와 같이 행성(行省)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른바 입성책동(立省策動)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국내외의 반발에, 원 조정에서도 충혜왕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상, 충혜왕의 왕위도 무사하지 못하였다. 1343년(충혜왕 후4) 10월, 원의 사신으로 고려 출신의 환관인 고용보(高龍普)가 와서는 기습적으로 충혜왕을 체포함으로써 왕위에서 밀어내버렸다.

국왕이 구타를 당하며 쫓겨나는 상황에서도 고려의 신료들 가운데 이를 적극적으로 저지하려는 이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충혜왕이 원나라로 압송되어 가던 도중 숙주(肅州)에 이르러 지방관에게 이불을 요구하자, 그는 “왕이 탐욕과 음행 때문에 죄를 받았으며 도리어 내 이불을 빼앗으려 한다.”라고 하면서 주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임명한 지방관에게도 외면당하였으니, 충혜왕의 몰락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을 것이다.

충혜왕은 원의 대도(大都)에 끌려갔다가 황제에게 질책을 당하고서 게양현(揭陽縣), 즉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주(潮州)라는 곳을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곳은 수도에서 2만여 리나 떨어진 곳으로, 당시로서도 가장 무거운 죄인들의 유배지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유배길에는 수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이 왕의 자기 손으로 옷 보따리를 가지고 가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배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를 싣고 가던 함거가 너무 빨리 달리는 바람에 왕이 온갖 고통을 겪다가 결국 이듬해인 1344년(충혜왕 후5) 정월 병자일, 그러니까 23일만에 악양현(岳陽縣), 지금의 호남성 악양에서 죽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5 충혜왕에 대한 평가

충혜왕의 사망 소식이 고려로 전해졌으나, 그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어떤 백성들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하며 기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가 백성들의 인심을 잃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고려사』의 찬자는 그의 세가 말미에 다음과 같은 사평을 남기고 있다. “왕은 성품이 호협하고 주색(酒色)을 즐겼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해 황음무도하였다. 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친소(親疏)와 귀천(貴賤)을 따지지 않고 모두 후궁으로 들였으니 그 수가 백 명이 넘었다. 또한 재물에 관계되는 것이면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따져 항상 이익을 올리려 하였다. (중략) 군소배들은 뜻을 얻고 충직한 자들은 배척당하였으며,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여버리니 사람들이 죄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충혜왕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그가 보인 모습이 유교적인 정치이념에서 요구하는 올바른 군주상과 어긋난 까닭에 『고려사』의 편찬자들이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면모만을 부각시킨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당시의 고려 사회가 바라던 지도자의 면모와는 분명 거리가 멀었으며, 현대적인 상식으로도 용납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그가 전무후무하게 두 차례나 왕위에 올랐다가 두 차례나 폐위되는 비운을 겪었던 것은, 당시 고려 국왕위의 향배를 비롯한 고려의 정치상황이 원나라 조정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