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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獻宗]

못 다 핀 꽃 한 송이, 먹먹함을 남기다

1084년(선종 1) ~ 1097년(숙종 2)

1 가계

고려의 제14대 국왕인 헌종의 이름은 왕욱(王昱)이었다. 제13대 국왕인 선종(宣宗)과 사숙태후(思肅太后) 이씨(李氏) 사이에서 1084년(선종 원년) 6월에 태어났다. 같은 사숙태후의 소생으로는 수안택주(遂安宅主)가 있었다. 헌종은 선종의 4남 3녀 중 맏이였다. 헌종은 어려서 즉위했으나 얼마 재위하지 못하고 왕위에서 물러난 데다가, 그나마도 얼마 뒤 사망했기 때문에 부인이나 자식은 두지 못하였다.

2 태자 시절과 즉위

왕욱이 ‘욱’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1088년(선종 5) 11월로, 그가 다섯 살 때였다. 그 이전에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수도 있지만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당시 선종은 맏아들에게 ‘욱’이라는 이름을 내리면서 은그릇과 비단 등 각종 물품을 하사하였다. 그날 선종은 어머니를 모시고 잔치를 벌이면서, 자신의 동생들인 조선공(朝鮮公)·계림공(鷄林公)·상안공(常安公)·부여후(扶餘侯)·금관후(金官侯)를 초청하여 함께 즐겼다고 한다. 집안의 경사를 함께 즐기는 단란한 왕실 가족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나, 훗날 이들의 앞에 펼쳐질 미래는 그와는 사뭇 달랐다. 이 이야기는 조금 뒤에 이어진다.

왕욱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093년(선종 10) 3월에 머물고 있던 연화궁(延和宮)을 떠나 수춘궁(壽春宮)으로 들어오도록 명을 받았다. 수춘궁은 5년 전에 선종이 왕욱에게 이름을 내린 뒤에 왕실 가족들과 잔치를 벌였던 바로 그 장소였다. 선종은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유석(柳奭)을 태좌좌첨사(太子左詹事)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손관(孫冠)을 태자우첨사(太子右詹事)로 삼아 왕욱을 보좌하게 하였다.

수춘궁에 들어오기 얼마 전인 9세 때부터 왕욱은 서화(書畵)에 재미를 붙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총명하여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았다고 일컬어졌다. 태자 시절부터 아버지 문종(文宗)을 보좌하며 정치를 익혔던 선종이 자신의 아들에게 거는 기대도 적지는 않았으리라 상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앞일을 어찌 알 수가 있을까. 선종은 1094년(선종 11) 윤4월에 병이 들었고, 5월에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선종의 유언을 받들어 왕욱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의 나이 겨우 11살 때였다.

3 재위 기간의 모습

고려 시대에는 10대에 왕위에 오르거나 관직에 나아가는 일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11살은 너무 어린 나이였다. 역대 고려의 국왕 중에 헌종보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은 충목왕(忠穆王)과 우왕(禑王)·창왕(昌王) 뿐이었다. 그렇기에 헌종이 바로 정치 일선에 나서지 못하고, 어머니인 사숙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사숙태후는 인주(仁州) 이씨 이석(李碩)의 딸로, 선대의 중신이었던 이자연(李子淵)의 손녀가 된다.

헌종이 당면하게 된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이 시기에 대하여 ‘왕은 유약하고 병이 있어서 정치를 직접 듣고 처리할 수 없었다. 모후(母后)가 나랏일을 오로지하니, 좌우(左右)가 그 사이에서 우물쭈물하였다.’라고 하였다. 훗날 이들이 권력에서 밀려난 뒤에 남겨진 기록을 토대로 작성된 사료이므로 공정성에 의문을 가질 수는 있으나, 당시의 정세가 불안했음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불안한 정세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헌종이 재위했던 시기에 있었던 다른 모습들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즉위 후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누리떼의 피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궁궐로 노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열어주고 물품을 하사하였다. 또 상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으로서 원구(圓丘)·방택(方澤)·종묘(宗廟)·사직(社稷) 등에 대한 제사도 빠트리지 않고 올렸다고 한다. 불교 의식인 목차계(木叉戒) 역시 궁궐에서 받았다.

그러나 그의 나이를 고려할 때, 아마도 이러한 일들이 헌종이 국왕으로서 자각하여 수행한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헌종이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내의(內醫)들과 어울려 방서(方書)를 읽고 서화(書畵)를 배우곤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다소 후대의 비판적 시각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일면 사실이 담겨있을 수도 있겠다.

한편, 이 시기에도 거란과 송·여진·탐라 등 주변 국가들과 교류가 계속되었다. 거란에서는 선종에게 제사를 지내고 헌종을 기복(起復)시키는 사신을 파견하였고, 그 뒤로도 양국 간에 사신들이 왕래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송에서는 상인(商人) 서우(徐祐)와 그 일행이 1094년(헌종 즉위) 6월에 예방한 것을 필두로, 여러 차례에 걸쳐 상인들이 헌종을 알현하였다. 이들을 따라 자은종(慈恩宗)의 승려 혜진(惠珍)이 고려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는 앞 시기부터 활발하게 벌어지던 양국 간의 교역이 헌종 즉위 후에도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동여진(東女眞) 부족들도 왕을 알현하고 말과 정보를 올린 뒤에 물품을 하사받았다. 탐라에서도 사신단이 파견되어 토산물을 헌상하였다.

정치는 국왕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비록 어린 헌종이 즉위했지만 고려의 국정 운영은 일단 이전 시기의 관성을 유지하며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왕위를 둘러싼 유력자들 간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중앙 정계의 정국은 크게 소용돌이치게 되었다.

4 ‘이자의(李資義)의 난’과 양위, 그리고 죽음

헌종은 즉위한 직후 여러 왕실 구성원의 지위를 높여주었다. 그 대상은 숙부인 조선공(朝鮮公) 왕도(王燾), 계림공(雞林公) 왕희(王煕), 상안공(常安公) 왕수(王琇), 부여공(扶餘公) 왕수(王㸂)를 비롯하여 고모부인 낙랑백(樂浪伯) 왕영(王瑛), 이복동생인 한산후(漢山侯) 왕윤(王昀)이었다. 또 소태보(邵台輔)와 이자위(李子威), 유석(柳奭), 임개(林槩), 이자의(李資義), 최사추(崔思諏), 이예(李預), 손관(孫冠) 등 중신들에 대해서도 승진 조치를 내려 우대하였다. 무장 중에서는 왕국모(王國髦)가 권상서병부사(權尙書兵部事)에 오르며 권력을 장악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조치는 여러 유력자들을 우대하여 정국을 잘 운영할 수 있는 포석으로 삼으려는 것이었겠으나, 막후에서는 오히려 이들 간에 권력 쟁패가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이것이 표출된 것이 바로 ‘이자의의 난’이라고 불리는 사건의 발발이다.

이자의는 헌종의 이복동생인 한산후(漢山侯) 왕윤(王昀)의 외삼촌으로 당대의 중신이었다. 한산후의 어머니인 원신궁주(元信宮主)는 이정(李頲)의 딸로, 역시 이자연의 손녀였다. 즉 이자연의 여러 아들 중 이석과 이정이 각각 자신의 딸을 선종의 후비로 들여보냈고, 이들이 또 각각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당시 이자의는 헌종이 몸이 약하므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자신의 조카인 한산후를 옹립하기 위해 세력을 길렀고 나아가 궁궐을 공격할 준비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를 눈치챈 계림공(雞林公) 왕희(王煕)가 재상 소태보(邵台輔) 및 상장군(上將軍) 왕국모(王國髦) 등과 함께 선수를 쳐서 이자의를 죽이고 그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이른바 ‘이자의의 난’은 종결이 되었다. 승리한 숙종측의 입장에서 정리가 된 기록이므로 사건의 전모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으나, 어쨌든 당시 국왕의 자리를 둘러싸고 심각한 정치적 알력이 있었다는 점은 알 수 있다. 1095년(헌종 1) 7월의 일이었다.

헌종은 난을 진압한 숙부 계림공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올리고, 그에게 동조한 소태보와 왕국모 등에게도 관직을 올려주었다. 그리고 세 달 뒤인 10월, 자신은 나이도 어리고 병이 들어 정치를 제대로 펼 수 없다는 이유로 계림공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후궁으로 물러났다. 계림공은 바로 고려의 제15대 국왕인 숙종(肅宗)이다.

이때의 상황에서 훗날 조선의 단종과 세조의 모습이 떠오른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어쨌든 헌종은 즉위한 지 1년 5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왕위 교체에 거란에서는 약간의 의문을 가졌던 것 같지만, 질병 때문이라는 고려의 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헌종은 다음해인 1096년(숙종 원년) 2월에 흥성궁(興盛宮)으로 나가 살겠다고 청하여 받아들여졌고, 그 이듬해인 1097년(숙종 2) 윤2월에 사망하였다. 숙종은 그에게 시호를 회상(懷殤), 능호를 은릉(隱陵)이라 붙여주었다. 훗날 예종(睿宗)이 즉위한 뒤에야 공상(恭殤)이라고 시호(諡號)를 고치고, 묘호(廟號)를 헌종(獻宗)이라고 하였다.

9년 전 겨울, 국왕 선종은 그의 아우들과 맏아들, 어머니와 함께 즐겁게 잔치를 열었다. 새 이름을 받은 조카에게 숙부 계림공은 아마도 축하와 축복의 말을 건네었을 것이다. 하지만 9년 뒤, 결국 이들의 운명은 큰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잔치에 참석했던 부여후 왕수 역시 2년 뒤에 모종의 죄로 숙종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사망하였다. 단란했던 가족이 몇 년 사이에 틀어졌던 것인지, 아니면 이미 그 잔칫날에도 가슴 속에는 비수를 품고 있었던 것인지, 지금의 우리는 알 길이 없다. 헌종이 좀 더 자랐다면 훌륭한 군주가 되었을 것인지, 아니면 방탕한 혼군(昏君)이 되었을 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어른들의 비정한 권력 다툼 속에서 열네 살에 꺾여버린 그의 운명은, 900여 년이 지난 지금 사람의 마음도 먹먹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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