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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顯宗]

거란과의 전쟁을 끝내고 고려를 정비하다

992년(성종 11) ~ 1031년(현종 22)

1 머리말

현종(顯宗)은 고려의 제8대 국왕이다. 즉위 초반부터 거란의 침입을 받는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를 잘 극복하고 고려의 전성기로 가는 길을 닦았다.

2 현종의 즉위 과정

현종은 목종(穆宗) 다음으로 즉위하였다. 그가 국왕의 자리에 서게 된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다. 현종의 아버지는 안종(安宗)으로 추존되는 왕욱(王郁)이고, 어머니는 경종(景宗)의 왕비였던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였다. 헌정왕후는 경종의 사후 사저에 나가 살고 있었는데, 이 때 왕욱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져 왕욱은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인 사수현(泗水縣)에 유배되었다. 이 때 헌정왕후는 아이를 낳고 바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아이가 바로 왕순(王詢) 즉 훗날의 현종이다.

그런데 헌정왕후는 당시 국왕이었던 성종[고려](成宗)의 친누이였다. 성종은 자신의 친조카인 왕순을 유모에게 맡겨 기르게 했는데, 아이가 조금 자라자 유배지에 있는 아버지인 왕욱에게 보내 함께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이후 대량원군(大良院君)에 책봉되었다.

왕순은 996년(성종 15)에 왕욱이 사망한 뒤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종이 사망하고 목종이 즉위한 뒤로 정치적인 견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당시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千秋太后) 황보씨(皇甫氏)가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왕순을 꺼려서 12세 때에 강제로 머리를 깎아 숭교사(崇敎寺)에 들여보냈다. 왕순은 이후 1006년(목종 9)에 다시 신혈사(神穴寺)로 옮겨서 지냈다. 그런데 이 때 천추태후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왕순을 해치려 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왕순은 상당한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009년(목종 12)에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30세의 한창 나이였던 목종이 갑자기 병이 들어 위독해지면서 후계 문제가 대두한 것이다. 목종에게는 아직 아들이 없었는데, 당시 천추태후가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들을 목종의 후계로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병상의 목종은 긴박한 상황 속에서 측근들과 의논하여 당시 유일하게 남은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 왕순을 후계로 세울 계획을 수립하였다. 병사를 보내 신혈사에서 왕순을 불러오는 한편, 서북면을 지키고 있던 강조(康兆)를 불러들여 호위를 맡기도록 하였다.

계획이 순조롭게 흘러갔다면, 왕순은 이렇게 목종의 지명을 받아 평화롭게 국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중에 예상할 수 없었던 문제가 생겼다. 강조가 개경으로 오던 중 거듭 잘못된 정보를 입수하여, 이미 목종은 사망했고 김치양이 정권을 잡았다고 오해한 것이다. 이에 강조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개경으로 진격을 시작했는데, 그 뒤에야 아직 목종이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다. 입장이 애매해진 강조는 고민 끝에 목종을 폐위하고 새 왕을 옹립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목종이 이미 왕순을 후계로 지명한 것을 알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 그를 모셔오게 하였다.

결국 신혈사에는 목종이 보낸 사자와 강조가 보낸 사자가 함께 도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왕순을 개경까지 호위하여 왔고, 강조가 그를 즉위시켰다. 이렇게 왕순은 고려의 제8대 국왕으로 즉위했으니, 바로 현종이다.

문제는 강조가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면서 목종과 천추태후를 궁 밖으로 내쫒았고, 이어 목종을 시해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강조의 정변(康兆-政變)’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즉 현종은 원래 목종의 지명을 받아 정상적으로 후계가 될 수 있었으나, 뜻하지 않게 벌어진 강조의 정변으로 인하여 비정상적인 즉위를 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향후의 정국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오게 된다. 물론 이러한 『고려사』의 서술이 현종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그에게 유리한 쪽으로 정리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3 2차 고려-거란 전쟁의 발발과 현종의 파천

고려와 거란은 1차 전쟁 이후 994년(성종 13)에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거란-송-고려를 비롯한 여러 세력 간의 힘겨루기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1004년(목종 7년)에 거란은 송을 공격하여 ‘전연(澶淵)의 맹약’을 맺었다. 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나, 당시 거란이 송을 군사적으로 압도했다는 점은 대체로 인정할 수 있다. 이러한 중대한 정세 변화가 거란과 고려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은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일이다.

양국의 충돌을 야기한 결정적인 사건 두 가지가 이 무렵 터지고 말았다. 하나는 강조의 정변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의 변경 책임자와 여진족 간의 충돌이었다. 고려로부터 피해를 입은 여진족 일부가 거란에 이를 호소하면서 강조의 정변 소식을 알렸고, 거란의 황제 성종(聖宗)이 이를 빌미로 삼아 고려를 공격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고려는 이를 외교적으로 무마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1010년(현종 원년) 겨울에 거란의 황제 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군이 침입을 개시하여, 2차 거란의 고려 침입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발발하자 고려에서는 강조가 대군을 이끌고 맞섰다. 초기에는 좋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방심 끝에 강조가 큰 패배를 당하고 사로잡히면서 고려군은 패주하였다. 전선이 붕괴되면서 고려군은 거란군을 막을 수 없었고, 현종은 강감찬(姜邯贊)의 건의를 받아들여 개경(開京)을 버리고 남쪽으로 파천을 하였다.

당시 현종의 험난한 여정에 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현종은 후비들과 몇몇 신하, 호위군 50여 명만을 거느린 채 개경을 빠져나왔고,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숱한 고난을 겪었다. 역(驛)의 군사 몇몇이 활을 쏘며 행렬을 습격하기도 했고, 지방의 향리가 위협을 하는 일도 벌어졌다. 심지어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인 조용겸(趙容謙)은 평상복으로 왕을 맞이하고 부하들을 시켜 위세를 부리는 무례를 범하기까지 하였다. 다행히 지채문(智蔡文)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이 끝까지 현종을 호위하여 무사할 수 있었으나, 국왕으로서 큰 수모를 겪었던 것이다.

남쪽으로 몸을 피하면서 현종은 하공진(河拱振)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란에 화친을 청했다. 거란군이 개경을 점령하고 계속 남진하는 상황에서, 현종은 자신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강화를 청하였다. 거란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철군하였다. 이렇게 하여 공식적으로는 2차 전쟁이 종결되었고, 현종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4 갈등의 지속과 3차 고려-거란 전쟁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전쟁의 수습에 힘썼다. 거란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관계를 개선하려 했지만, 정작 강화의 중요한 조건이었던 친조는 병환 때문에 하기 어렵다는 말을 전하였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2차 전쟁 말기에 양규(楊規)를 비롯해 후방에 남아 있던 고려군의 활약으로 철수하던 거란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던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거란은 이에 대해 크게 분노하며, 기존에 고려의 영역으로 인정했던 강동6주(江東六州) 지역을 내놓으라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물론 고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양국 간에는 몇 해에 걸쳐 국지적인 전투가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고려가 이를 대체로 잘 막아내자, 1018년(현종 9)에 거란은 다시 한 번 소배압이 이끄는 대군을 출정시켜 고려를 공격했다. 이것이 이른바 3차 고려-거란 전쟁이다.

2차 전쟁에서는 초반에 전선이 무너지며 크게 어려움을 겪었지만, 3차 전쟁의 양상은 이전과는 달랐다. 고려에서는 전쟁에 대비하여 상당한 전력을 갖추었으니, 당시 거란군이 10만 병력을 자칭했는데 고려에서는 2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했던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벌어진 이후의 전투에서도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지속적으로 거란군에게 피해를 입혔고, 결국 귀주(龜州)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거란군을 격퇴하였다. 현종은 거란군이 개경 인근까지 육박한 상황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농성전을 준비하여 거란군이 철수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3차 전쟁에서 거란군은 겨우 수천 명이 살아서 돌아가는 대패를 당하였다. 이후 현종은 거란에 화친을 요청하였고, 거란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마침내 오랜 전쟁이 끝날 수 있었다. 이후 고려는 거란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는 점에 힘입어 국제적인 위상을 높일 수 있었고, 11세기의 활발한 국제 교류 시대를 열 수 있었다.

5 개경 궁궐과 성곽의 재건 및 보강

2차 전쟁 당시에 수도 개경은 거란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궁궐을 비롯하여 각종 시설물과 민가들이 크게 파괴되었다.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궁궐을 다시 짓도록 명령하여, 약 3년의 공사 끝에 완성하였다.

한편, 당시 개경에는 궁궐과 이를 둘러싼 황성(皇城)이 있었으나, 그 밖으로 여러 시설물과 민가가 확장되어 있어서 방어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강감찬은 나성(羅城)을 축조하여 개경의 방어를 강화하자는 건의를 하였고, 현종은 이를 받아들여 왕가도(王可道)에게 공사를 맡겼다. 약 20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된 나성은 지금도 일부가 남아 있어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6 국가 체제 정비

현종의 재위 기간에는 다방면에 걸쳐 체제 정비가 이루어졌다. 우선 거란과의 오랜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경제 상황을 개선하려는 조치들이 있었다. 1012년(현종 3)에는 장인(匠人)의 수를 줄여 농사를 짓게 하도록 하였고, 1028년(현종 19)에는 뽕나무를 심고 말을 기르는 격식을 제정하였다. 또 1025년(현종 16)에는 공사를 줄여 백성들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세금 제도를 개선하여 토지의 보유 면적에 따라 조절하도록 했고, 물가가 폭등하면 국가가 나서서 이를 조정하였다. 또한 의창(義倉) 제도도 정비하여 좀 더 실효성이 있도록 하였다.

지방제도 역시 이 시기에 재정비되었다. 1012년(현종 3)에는 동경유수(東京留守)를 없애고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고쳤고, 12목(牧)의 절도사를 폐지하고 5도호(都護)와 70도 안무사(按撫使)를 두었다. 이어 1018년(현종 9)에는 다시 안무사를 폐지하고 4도호 8목 등으로 재편하였다.

지방에 대한 재편과 함께 그 행정을 맡은 향리와 사심관(事審官)에 대해서도 정비하였다. 지역별로 향리들의 숫자를 규정하고, 호칭도 주·현(州·縣)의 향리와 향·부곡 등 특수구역의 향리에 대해 다르게 하여 그 지위를 나누었다. 한편 사심관의 선발 규정을 강화하여, 아버지나 형제가 호장을 맡고 있으면 사심관이 될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그 선발에는 그 지역 출신의 기인(其人)과 백성의 여론이 반영되도록 하였다.

한편 현종대에는 지방의 향공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규정에 대해서도 보완이 이루어졌다. 지역의 규모에 따라 올려 보낼 수 있는 향공의 수가 정해지고, 본고시인 예부시(禮部試)에 앞서 이들을 국자감(國子監)에서 미리 한 번 시험 보는 제도도 마련되었다.

7 문화 관련 정책

거란과의 전쟁이 오래 지속된 현종대였지만, 이 시기에는 유교 및 불교, 전통 문화 등과 관련된 각종 정책들도 추진되었다. 이는 백성들에 대한 교화 및 민심 수습, 정치적 지향성의 설정 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우선 신라 시대의 설총(薛聰)과 최치원(崔致遠)에게 봉작을 추증하고 문묘(文廟)에 처음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는 한반도의 유학적 전통의 맥을 짚고 고려가 유학적 정치를 지향하는 국가임을 강조한 조치였다. 또한 거란과의 전쟁을 거치며 국초 이래의 기록들이 소실되자, 1013년(현종 4)부터 역대의 실록을 다시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는 20여년 뒤인 덕종대에 완성되니, 이른바 ‘7대실록(七代實錄)’ 혹은 ‘칠대사적기(七代事蹟記)’라 불리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불교 분야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업이 진행되었다. 바로 대장경(大藏經)의 제작이 시작된 것이다. 즉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을 말한다. 후대의 이규보(李奎報)가 남긴 글에 따르면 현종이 2차 고려-거란 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난을 가면서 대장경의 제작을 맹세하자 그러자 거란군이 물러갔다고 하였다. 초조대장경은 훗날 몽골의 침입때 목판이 불타버렸으나, 현재도 간행된 책자들은 상당수가 남아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이 외에도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화사(玄化寺)를 크게 창건하고 송에서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입수하여 여기에 두는 등, 불교와 관련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성종대에 다소 침체되었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1010년(현종 원년) 2월에는 성종대에 중단되었던 연등회를 부활시켰고, 11월에는 팔관회를 다시 열었다. 또 서경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있는 여러 신사(神祠)에 훈호(勳號)를 자주 더하여 우대함을 보였다.

위와 같은 조치들을 통해 현종은 거란과의 긴 전쟁에 지친 민심을 달래고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는 데에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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