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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종[惠宗]

사라진 역사, 그늘 속의 군주

912년(인선 6) ~ 945년(혜종 2)

혜종 대표 이미지

나주완사천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머리말

“혜종의 신주(神主)를 순릉(順陵)으로 옮기고, 예종(睿宗)을 태묘에 합사하였다. 사람들이 의논하기를, ‘혜종은 민(民)에게 공덕(功德)이 있으므로 마땅히 불천지주(不遷之主)로 삼아야 하는데, 이를 옮긴 것은 예(禮)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국왕 인종(仁宗)이 자신의 아버지인 예종(睿宗)을 종묘에 모시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상황을 묘사하는 기록이다. 종묘에 모실 수 있는 신주의 수는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새로 신주를 들이는 경우 선대 국왕들의 신주를 조정하는 절차가 필요한데, 혜종의 신주를 빼자 당시 사람들이 옳지 않게 여겼다는 이야기이다. ‘불천지주’란 ‘옮기지 않는 신주’라는 뜻으로, 공덕이 높아서 영원히 종묘에 모셔져야 할 존재라는 뜻이다. 배향해야 할 선대 국왕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불천지주’로 모셔진다는 것은 대단한 존경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혜종에 관한 기록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인종대 사람들의 반응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고려 초기의 기록은 여러 차례의 전쟁과 혼란기를 거치며 아주 적은 양만 남아있다. 그리고 그 기록에 담긴 혜종의 생애에서는 ‘민(民)에게 공덕이 있었다’라는 면모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맏아들이자 고려의 2대 국왕이었던 혜종. 하지만 현전하는 기록에 담긴 그의 삶은 왕위 계승 분쟁에 시달리다가 요절한 비운의 군주 이상이 되기 어렵다.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지금은 사라진 고려 초기의 기록이 아쉬울 뿐이다. 그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자.

2 출생과 가계

혜종은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太祖 王建)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나주(羅州) 지역의 호족이었던 다련군(多憐君)의 딸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다. 두 사람은 왕건이 아직 궁예(弓裔) 휘하의 장수로 활약하던 때에 만나 인연을 맺었고, 912년에 아들 왕무(王武)를 낳았다. 그가 바로 혜종이다. 당시 왕건은 수군(水軍)을 이끌고 나주 지역에 출진하여 있었는데, 현지에서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미 왕건에게는 훗날 신혜왕후(神惠王后)로 시호가 올려지는 첫째 부인인 유씨(柳氏)가 있었으나, 둘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두 번째 부인인 오씨의 소생이 맏아들이 되었던 것이다. 혜종은 왕건과 오씨 사이의 유일한 자녀였다.

혜종의 부인으로는 『고려사(高麗史)』에 네 사람이 실려 있다. 우선 태자 시절에 태자비로 맞이했고 훗날 혜종이 묘정에 합장된 의화왕후(義和王后) 임씨(林氏)가 있다. 의화왕후는 진주(鎭州) 출신인 임희(林曦)의 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흥화궁군(興化宮君)·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정혜공주(貞惠公主)가 태어났다. 이어 왕규(王規)의 딸인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 왕씨(王氏), 김긍률(金兢律)의 딸인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 김씨(金氏)가 있었으나 이들과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한편, 연예(連乂)의 딸인 궁인(宮人) 애이주(哀伊主) 역시 후비 열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는 태자 왕제(王濟)와 명혜부인(明惠夫人)을 낳았다고 한다. 여러 자녀를 두었으나, 이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광종대에 혜종의 외아들이 정치적 사건과 연루되어 처형되었다는 말이 보여주듯, 아마도 당시의 혼란한 정국 속에서 평온하게 일생을 마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3 즉위 이전의 활동

혜종, 즉 왕무가 태어난 지 7년째인 918년(태조 원년)에 왕건은 궁예를 축출하고 새 왕조를 개창하였다. 왕무는 이제 한 나라의 첫째 왕자가 되었던 것이다. 921년(태조 4) 12월에 왕건은 왕무를 정윤(正胤), 즉 태자로 책봉하여 그 위상을 확인하여 주었다. 왕무의 나이 10세 때의 일이다.

그러나 왕무가 태자의 지위를 확인받는 데에 이르기까지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기록에는 왕무의 정윤 책봉 과정에 대한 뒷이야기가 짤막하게 실려 있다. 왕무가 7세였을 때, 즉 아마도 고려 왕조의 개창 시기 무렵에 이미 왕건은 그를 차기 왕위 계승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장화왕후의 후원 세력이 미약하여 이를 즉시 추진하지 못하고 오래된 상자에 군주를 상징하는 자황포(柘黃袍)를 넣어 장화왕후에게 내려주었다고 한다. 훗날 장화왕후가 이를 중신(重臣)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여주니, 박술희가 그 뜻을 알고 왕무를 정윤으로 책봉하도록 요청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아직 후삼국 중 한 세력에 불과했던 고려의 군주였던 왕건의 입장에서는 휘하 신료들 및 지방 호족들의 협력이 절실하게 필요하였고, 특히 혼인을 통해 자신과 결탁하고 있었던 유력자들과의 관계를 깊이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이후 정윤으로서 왕무가 등장하는 기록은 많지 않다. 훗날 최승로(崔承老)는 혜종이 태자였던 시절에 감국(監國)과 무군(撫軍)을 잘 했고, 스승을 공경하고 빈객과 신료들을 잘 대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래서 명성이 높았고, 혜종이 즉위하자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구체적인 기록으로는 먼저 932년(태조 15) 7월에 태조 왕건이 일모산성(一牟山城)을 친정(親征)하면서 왕무에게 북쪽 변방을 순시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4년 뒤인 936년(태조 19)에는 드디어 후백제와의 마지막 결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 때 왕무는 박술희와 함께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천안부(天安府)로 먼저 출병하였다. 그의 나이 25세 때의 일이었다. 전투 과정에서 왕무가 수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용맹함을 떨치며 앞장섰다’라는 묘사와 함께 공이 제일이었다는 것만 전해진다. 이 묘사가 다소 상투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훗날 자객을 맨주먹으로 때려잡았다는 일화를 보면 왕무의 본모습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

위의 전투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7년 뒤인 943년(태조 26) 5월에 병이 위중해져 왕위를 왕무에게 전하고 사망하였다. 이에 왕무가 고려의 2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4 후진(後晋)과의 교류

혜종은 943년(태조 26) 5월에 즉위하여 945년(혜종 2) 9월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이 짧은데다가, 남아있는 그 기간의 기록도 매우 소략하고 내용이 혼란스러워 이해가 쉽지 않다. 왕위계승분쟁에 관한 기록을 제외하면 사실상 중국과의 교류에 관한 기록 약간이 있을 뿐인데, 먼저 이를 살펴보자.

당시 중국 대륙 북방에는 거란(契丹)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고, 남쪽에서는 5대 10국의 혼란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혜종대의 고려는 후진과 사신을 교환하였던 기록이 보인다. 944년(혜종 원년)에는 광평시랑(廣評侍郞) 한현규(韓玄珪)와 예빈경(禮賓卿) 김렴(金廉)을 파견하여 새로 즉위했음을 알리는 동시에, 당시 후진이 거란에 대해 거둔 승리를 축하하였다. 이에 대하여 후진에서는 945년(혜종 2)에 광록경(光祿卿) 범광정(范匡政)과 태자세마(太子洗馬) 장계응(張季凝)을 사신으로 보내어 지난해의 사신 파견에 감사하고, 혜종을 지절·현도주도독·상주국·충태의군사·고려 국왕(持節·玄菟州都督·上柱國·充太義軍使·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이 외에도 고려의 사신 파견이 있었다고 하나, 양국의 기록에 연대 차이가 있어서 정확한 내용은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이 시기의 기록에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할 수 있다. 하나는 고려에서 후진에 보낸 물건의 목록을 통해 당시의 문물에 대해 단편적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거란-후진-고려 간 외교적 각축의 일면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945년(혜종 2)에 후진에서 보낸 칙서에는 고려에서 보냈던 물품의 목록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특히 비단·금실·은실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갑옷과 투구, 활과 화살·화살통, 칼과 칼집 등 다양한 무기류들이 매우 많이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그 외에도 화려한 이불과 옷, 고운 모시와 각종 천, 인삼, 향유, 잣, 방울 등 다양한 품목을 보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후진에서는 그 정교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찬탄하는 말을 전하였다. 이러한 상세한 묘사는 앞으로 고려 초기의 문물을 재현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한편, 중국측 자료인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태조대부터 혜종대 무렵에 고려와 후진에서 거란에 대한 협공을 논의했던 모습이 짤막하게 실려 있다. 이 역시 고려측 기록과 약간의 연대 불일치의 문제가 있으나, 대체적인 내용을 통해 당시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충분할 것이다. 이에 따르면 태조 왕건이 발해의 복수를 위해 거란을 공격하려 하면서 후진에 협공을 제안했었다고 한다. 후진은 비록 이 때에는 거절했으나, 거란과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이 방안을 다시 검토하였다고 한다. 마침 고려에서 혜종이 즉위하자 후진은 사신을 보내어 고려의 상태를 살펴보았으나, 지난날의 말과 달리 군사력이 매우 약한 것을 보고 실망하여 중단하였다고 적혀 있다. 아마도 이는 혜종대 무렵의 정치적 혼란상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으나, 고려 초기의 발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거란·후진·고려의 외교적 각축의 한 자락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5 왕위계승분쟁과 이른 사망

안타깝게도 자료의 부족 때문에 혜종대의 국내 정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가 없다. 다만 왕위 계승 분쟁에 관한 자료들이 일부 전해지는데, 이를 살펴보자.

혜종대의 왕위를 둘러싼 분쟁은 왕규(王規)·박술희·최지몽(崔知夢) 등 주요 신하들과 왕요(王堯)·왕소(王昭)·왕식렴(王式廉) 등 왕실 구성원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전개되었다. 이는 태조 왕건에게 29명의 부인이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혜종을 포함하여 25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가 태어났던 당시의 왕실 상황에서 피하기 어려운 분쟁이었을 것이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휘하 신료들 및 지방 호족·신라 귀족 등 다양한 세력과 혼인을 통하여 결속하였다. 이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큰 보탬이 되었겠으나, 이제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그 후폭풍을 불러왔던 것이다.

혜종의 측근으로는 대표적으로 그 즉위에 공을 세운 박술희와 정치적 조언자였던 최지몽(崔知夢)이 있었고, 그 외에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향리(鄕里)의 소인(小人)’이라 묘사된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개 혜종의 외가인 나주쪽 출신의 사람들로 추정된다. 혜종은 이들을 중용하고 주변에 항상 호위 병사들을 배치하여 특혜를 베풀었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혜종을 가장 위협했던 사람은 왕규였다. 광주(廣州) 출신으로 태조 왕건에게 두 딸을 시집보냈던 왕규는 태조의 임종을 지키고 유명(遺命)을 선포했을 정도로 당시에 위상이 높았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위에 올리기 위하여 여러 차례 혜종을 습격하기도 하고, 혜종의 배다른 동생이었던 왕요·왕소 형제가 모반을 꾸미고 있다고 고발하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박술희와 대립하다가 혜종의 서거 시점 전후로 왕명을 위조하여 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런 왕규를 제거한 것은 왕요·왕소 형제 및 이들을 도운 친척 왕식렴이었다. 이들은 서경의 책임자였던 왕식렴의 병력을 동원하여 왕규 세력을 제압하고, 왕요를 추대하여 국왕으로 모셨다. 그가 바로 고려의 3대 국왕인 정종(定宗)이다. 훗날 동생 왕소는 4대 국왕인 광종(光宗)이 된다.

물론 이 기록이 매우 소략한데다가, 왕위에 오른 왕요 세력의 입장이 반영된 내용일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왕규는 혜종의 장인이기도 했으므로, 당시의 정국 판도가 매우 복잡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기록이 이것뿐이므로, 지금으로서는 그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긴장 국면에서 혜종은 결국 이른 죽음을 맞이한다. 즉위 2년째였던 945년(혜종 2) 9월, 자객을 맨주먹으로 때려잡았다는 일화가 전해질만큼 기운이 좋았던 것으로 보이는 혜종은 병이 들어 그대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분쟁 과정에서 혜종의 측근이었던 박술희도, 난을 꾸몄다고 지목된 왕규와 그의 세력 300여 명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혜종의 측근 ‘향리 소인’들도 모두 스러졌다. 후삼국의 통일이라는 빛나는 업적 뒤에 드리워진 어둡고 비정한 그림자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는 이후 정종(定宗)·광종·경종(景宗)대를 지나 성종(成宗)의 시대에 가서야 안정을 찾게 된다.

백성들에게 공덕이 커서 불천지주로 모셔져야 한다고 거론되었던 혜종. 그러나 지금 남겨진 기록만으로는 그 모습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후세에 기록을 남기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상기시키는 인물이자, 잃어버린 역사상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하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6 관련 유적

전라남도 나주시 송월동에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가 만났다는 ‘나주완사천(羅州浣紗泉)’이 전라남도 기념물 제93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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