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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종[熙宗]

허수아비 임금 노릇을 거부하다

1181년(명종 11) ~ 1237년(고종 24)

희종 대표 이미지

강화 석릉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머리말

희종(熙宗)은 신종(神宗)의 맏아들로, 1181년(명종 11) 5월에 태어나 1237년(고종 24)에 사망한 고려의 제21대 왕이다. 그는 1200년(신종 3)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204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영(韺)이고 초명은 덕(悳), 자는 불피(不陂)이다.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靖宣太后 金氏)이며, 비는 영인후(寧仁侯) 진(稹)의 딸인 성평왕후(成平王后)이다.

2 최충헌에 의해 왕이 되다

1204년(신종 7) 정월 신종은 병이 깊어지자 태자인 희종에게 양위할 것을 최충헌(崔忠獻)에게 요청했고, 최충헌은 이를 측근들과 의논한 뒤 진행시켰다. 희종은 태자였지만, 최충헌의 권력이 워낙 막강하여 태자의 왕위 계승조차도 최충헌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러니 희종이 최충헌을 제어하기는 사실상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희종은 최충헌의 거수기 역할밖에 할 수 없는 임금이었던 것이다.

희종은 즉위한 후, 자신을 임금으로 세워준 최충헌의 관작을 높여 주었다. 당시 최충헌에게 내린 관작은 ‘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판병부어사대사’였다. 희종은 최충헌을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은혜를 입은 재상’ 즉,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인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희종은 다시 1206년(희종 2)에 최충헌을 진강후(晋康侯)로 삼고 부를 세워 흥녕부(興寧府)라고 하며 관원을 두고, 흥덕궁(興德宮)을 여기에 소속시켰다. 이후 최충헌은 관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궁궐에 드나들며 해를 막는 일산을 쓰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그에게 소속된 문객이 거의 3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위세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희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207년(희종 3)에는 다시 최충헌을 중서령(中書令)·진강공(晉康公)으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최충헌이 ‘공(公)’ 이란 것은 5등급의 작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이고, 중서령은 관직 중에 제일 높은 자리라 하여 사양 하자 결국 임명되지는 못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국왕인 희종이 신하인 최충헌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고자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충헌이 그 자리를 사양한 것은 겸양의 미덕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굳이 더 이상 오를 필요가 없었던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1208년(희종 4) 희종은 이판(梨坂)에 위치한 최충헌의 아들 최우(崔瑀)의 집으로 옮겨 거처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만큼 희종이 최충헌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최충헌을 암살하려 하다

희종이 왕위에 오른 시기는 최충헌의 정치적 기반이 굳건히 자리 잡힐 무렵이었으므로 임금으로서 희종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희종의 재위 7년째인 1211년(희종 7), 그가 있는 궁궐에서 최충헌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벌어졌다. 희종이 최충헌을 죽이려는 거사에 직접 개입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최충헌을 제거하고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이상을 품고 있었을 것은 짐작할 수 있다. 1210년(희종 6) 4월에 최충헌이 활동리(闊洞里)에 지은 그의 저택은 웅장하고 화려하여 그 규모가 궁궐에 버금갈 정도였으며, 때문에 나라 안에 불평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최충헌의 권세가 왕을 능가하고 그 세력이 서울과 지방에까지 떨쳤으므로, 사람들이 그 뜻을 거스르기만 해도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는 임금의 권위를 능가하는 최충헌의 권력 행사에 대하여 사람들의 불만도 그만큼 쌓여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희종도 최충헌의 제거를 구상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희종이 최충헌을 죽이려고 했던 다른 하나의 이유로는 1210년(희종 6)에 최충헌이 예전에 폐위된 명종(明宗)의 태자로 후에 강종(康宗)이 되는 왕숙(王璹)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불러들인 사건 을 들 수 있다. 명종의 태자였던 왕숙의 존재는 희종에게 왕위 유지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이자 위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희종은 최충헌이 언제든지 자신을 내칠 수 있다고 받아들였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1211년(희종 7) 12월 최충헌은 인사 문제로 희종을 알현하기 위해 수창궁(壽昌宮)을 찾았다. 최충헌이 왕의 앞에 앉아 있을 때, 환관이 최충헌을 따라 온 사람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자 갑자기 승려를 포함한 10여 명이 무기를 들고 뛰쳐나와 최충헌의 시종들을 공격했다. 최충헌은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깨닫고 희종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희종은 못들은 척 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 마음이 다급해진 최충헌은 왕의 비서일을 담당하는 정3품 지주사(知奏事)의 방 은밀한 곳으로 급히 몸을 숨겼다. 한 승려가 세 차례나 찾았으나 최충헌을 잡지 못했다. 사이 최충헌의 측근인 상장군 김약진(金若珍)과 최우 등이 들어와 최충헌을 피신시키고, 그 무리인 신선주(申宣胄)와 기윤위(奇允偉)등이 최충헌을 죽이려던 자들과 격투를 벌였다. 이어 최충헌의 사병집단인 도방이 궁궐 안으로 돌격하여 그를 구해냈다.

당시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이는 내시(內侍) 왕준명(王濬明)이었다. 그리고 참정(參政) 우승경(于承慶), 추밀(樞密) 사홍적(史弘績), 장군 왕익(王翊) 등도 참여하였다. 내시는 왕의 비서일을 하는 직책이었으므로, 내시 왕준명이 사건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임금인 희종과의 교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의미한다. 희종이 기획하지 않았을지는 모르지만,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음은 분명한 상황인 것이다.

4 최충헌에 의하여 폐위되다

국왕 측근의 최충헌 암살 미수 사건은 곧 희종의 거취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최충헌은 희종을 폐하여 강화도로 옮겼다가 자연도(紫鷰島)로 다시 이동을 시켰다. 아들인 태자 왕지(王祉)도 지금의 인천인 인주(仁州)로 내쫓겼다. 물론 내시 왕준명 등도 모두 귀양을 가야만 했다. 쫓겨난 희종은 1215년(고종 2)에는 교동현으로, 1219년(고종 6) 3월에는 개경으로, 1227년(고종 14) 3월에는 다시 교동(喬桐)으로 옮겨졌다. 최충헌이 이광유((李光裕)를 파견해 희종을 교동으로 옮기게 했을 때, 희종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한다. 아마도 최충헌이 자신을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희종의 귀양생활이 매우 열악했음은 희종의 귀양지에 비용으로 있는 것이 6섬의 쌀밖에 없었다는 이광유의 보고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희종은 구차한 삶을 꾸러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왕준명 사건에 대해 최충헌이 후일 “내가 어질게 용서하지 않았다면 임금 부자의 목이 오늘까지 붙어 있겠느냐. 왕준명 사건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의 머리카락이 모두 곤두선다.” 라고 토로한 것으로 보아, 당시 최충헌이 느꼈던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최충헌은 자신을 암살하려 한 희종을 죽이지는 못했다. 만일 희종을 죽였을 경우, 조야의 여론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충헌은 희종을 폐위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1227년(고종 14)에 희종의 복위 음모가 있다 하여, 다시 그를 교동으로 옮겨 법천정사(法天精舍)에 머무르게 했다. 1237년(고종 24) 희종은 법천정사에서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은 후 빈소는 낙진궁(樂眞宮)에 차려졌다. 『고려사』에는 희종에 대해 “이 때에 최충헌이 나라의 정권을 잡은 지가 여러 해 되어……희종이 비록 일을 해보고자 한들 어찌 하겠는가. ……왕은 이를 알지 못하고 경박한 계책을 부려서 한 때의 분을 풀려고 하다가 마침내 내쫓김을 당했으니, 슬픈 일이다” 라는 사신의 평을 덧붙였다. 허수아비 임금 노릇을 거부하다 폐위되어 쓸쓸히 사라진 희종의 삶을 한 줄의 평이 대신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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