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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姜世晃]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사대부 화가

1713년(숙종 39) ~ 1791년(정조 15)

강세황 대표 이미지

강세황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성장배경과 가족관계

강세황은 1713년(숙종 39) 서울에서 강현(姜鋧)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 진주 강씨는 이 시기 전형적인 명문 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강백년(姜柏年)은 동부승지, 예조판서 등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명신이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버지 강현은 이조참의, 홍문관 대제학 등의 벼슬을 역임하다가 마찬가지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의 큰 형 강세륜(姜世胤) 역시 벼슬길에 올라있었다.

정원용(鄭元容)의 《경산집(經山集)》에 따르면 강세황은 어릴 적부터 유난히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 여섯 살 때부터 글을 지을 줄 알았고, 여덟 살 때 숙종의 국상 때 이를 추모하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열 살 때 아버지 강현이 예조판서로 재직하고 있을 때 예조의 공문 몇 글자를 대신 썼는데 윤순(尹淳)이 이를 보고 솜씨를 칭찬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듯 장래가 촉망되었던 청년의 운명을 한 순간에 뒤바꾼 것은 그가 16세가 되던 해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李麟佐-亂)이었다. 1724년 경종[조선](景宗)이 죽고 뒤이어 그 동생인 영조(英祖)가 왕위에 오르자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의 일부 과격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왕위계승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 후, 밀풍군 이탄(密豊君 李坦)을 새로운 왕으로 받들고자 하였다. 강세륜은 당시 이천부사로 있으면서 이인좌 일당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지만, 죄인을 서울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관리를 소홀히 하였고,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아 파직되었다.

그 이후 강세황을 비롯한 그의 가족들은 역모를 꾀한 집안이라는 낙인이 찍혀 벼슬길에 나아가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후일 강세륜이 역적 도당 중 한 사람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에 생긴 오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가 누명을 벗고 표면상으로나마 조정에서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은 강세황의 둘째 아들 강완(姜俒)이 과거에 급제한 1763년(영조 39)의 일이었다.

강세황은 15세가 되던 1727년 유명현(柳命賢)의 손녀이자 진사 유뢰(柳耒)의 딸인 진주 유씨와 혼인하였다. 그녀가 시집올 때만 해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였지만, 강세황이 출사하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극심한 생활고를 겪게 되었다. 강세황이 스스로 밝혔듯, 그는 현실 감각이 뛰어나다거나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 재주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약 30년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유씨는 결국 1756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강세황은 자신 때문에 부인이 고생만 하다가 갔다며 매우 슬퍼하였다.

강세황은 슬하에 진주 유씨 소생의 강인(姜亻寅)), 강완(姜俒), 강관(姜寬), 강빈(姜儐)의 네 아들과 나주나씨(羅州羅氏) 소생의 강신(姜信)을 두었다. 말년에 차남 완을 필두로 인과 관이 차례로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가면서 집안 형편도 나아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강세황은 생전에 아들들에 대해서도 각별히 애정을 쏟았던 것 같다. 강세황의 문집인 《표암유고(豹菴遺稿)》를 살펴보면 아들들과 주고받은 시가 상당하다. 예를 들자면, 둘째인 완이 지방으로 발령이 나면서 떨어져 지내게 되자, 강세황은 아버지로서 그리워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성은에 감사하며 초심을 잃지 말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당부하였다.

정작 강세황 본인이 관로를 걷기 시작한 것은 몇 년 뒤인 1773년(영조 49)의 일이었다.

2 예술세계와 인적교류 : 학문과 예술에 침잠하여

강세황은 출사의 길이 막히자 그 대신 학문과 예술에 침잠하여 젊은 시절을 보냈다. 1733년(영조 9)에 아버지, 1740년(영조 16)에 어머니를 차례로 여의고 난 후 그는 1744년(영조 20) 그간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이사하였다.

이후 그가 안산에 머물렀던 30년은 그의 예술세계가 완성되었던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흔히 18세기는 조선 고유의 문학과 예술이 크게 발달한 문예부흥의 시기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그림 분야에서는 중국의 그림을 모방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자연을 그리기 시작하는 진경산수화가 발달하였다. 이 중심에 바로 강세황이 있다.

당시 중국(청)에서는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畫)의 화풍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으며, 17세기 말부터는 이것이 각종 화보(그림책)의 형태로 조선에 수입되면서, 조선의 문인들 사이에서도 남종화의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이 당시 수입된 화보 중에서도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라는 책이 매우 유명하여 정선(鄭敾), 심사정(沈師正), 강희언(姜熙彦) 등 뭇 문인들에게 모방의 대상이 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후에 조선의 실제 산수를 그림으로 남기는 ‘진경산수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모태가 되었다.

강세황도 처음에는 이 대열에 합류하여 남종문인화의 모방작을 그려내었다. 그는 처남인 유경종(柳慶種)을 통하여 처음 《개자원화보》를 접하였고, 여기에 실린 명 화가 심주(沈周)의 그림 〈벽오청서도〉를 모방하여 그림을 그렸다. 강세황의 〈벽오청서도〉는 원작의 밑그림과 구도를 충실히 따랐으나 강세황 식으로 재해석 된 뛰어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강세황은 더 나아가 조선의 산수를 직접 답사하고 이를 그림으로 진경산수화라는 화풍이 발달하는 데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개성을 여행한 후 《송도기행첩》(1757)을 남겼으며, 차남 강완이 부안현감으로 있을 때 주변 지역을 여행하고 〈우금암도〉(1771)를 남겼다. 차남 강완이 회양부사로 재직할 때에는 금강산을 여행한 후 《풍악장유첩》(1788)을 남겼다. 특히 강세황은 당시로서는 신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음영법 등 서양의 수채 기법을 산수화에 접목시켰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예술세계는 그의 지우들과 교유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처남인 유경종, 인척인 이수봉(李壽鳳) 등은 물론이거니와 당대의 문인화가로 알려진 허필(許佖), 심사정, 최북(崔北), 당대의 대학자 성호 이익(李瀷)등과 교류하였다.

강세황의 삶을 논하면서 처남이었던 유경종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젊은 시절부터 친하게 어울려 지냈고,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면서 일상생활을 공유하게 되어 가장 많은 교류가 있었다. 생활의 측면에서는 강세황의 아내가 죽자 조카들의 생계를 책임지는가 하면, 학문적, 예술적인 면에서도 서로 시를 지어 교환하고 그림을 평하는 등 강세황의 예술세계가 정립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허필은 젊은 시절부터 매우 절친했던 지우 중 한 명이었다. 함께 개성을 비롯한 여러 곳을 유람하고 시와 그림을 남겼다. 두 사람 모두 그림 실력이 뛰어난 것으로 이름이 높아서, 두 사람은 한 개의 부채에 반 씩 그림을 나눠 그리기도 하였다( 〈선면산수도〉). 허필은 강세황의 그림에 평을 남긴 유일한 인물이다.

심사정은 강세황과 서로의 그림에 제문이나 평을 써주는 사이였으며, 함께 《표현연화첩》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강세황이 평을 남긴 심사정의 그림으로는 〈산수도〉, 〈경구팔경〉 등이 있다. 특히 〈수묵화죽도〉에 대해서 강세황은 실물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동감이 있는 뛰어난 그림이라며 극찬하였다.

이수봉은 특히 만년에 이르러 강세황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강세황은 그와 함께 산수를 유람하고 글도 지으며 교류하였다. 강세황은 그를 세상에 몇 남지 않은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라고 평하였다.

사실 강세황이 교유했던 인물들 중에 현재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풍속화의 거장 단원 김홍도(金弘道)弘道)이다. 김홍도는 어린 시절 강세황으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그 때 맺어진 인연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두 사람은 사포서(司圃署)에서 함께 근무하는가 하면, 1781년(정조 5) 정조[조선](正祖)의 어진을 그리는 작업에 핵심 인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강세황은 김홍도를 두고 천부적으로 타고난, 모든 분야의 그림을 다 소화할 수 있는 천재적인 화가로 평가하였으며, 그를 사제관계를 넘어서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로 정의하였다.

강세황이 후대에 끼친 영향력이란 단원 김홍도 한 인물로 귀결되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조선후기 선비들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인간형은 글도 잘 쓰고 서예에도 능하며 그림에도 조예가 깊은, 한마디로 팔방미인이었다. 그는 당대와 후대에 시서화 삼절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시, 서예, 그림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모두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이러한 인간형에 합치되어가고 있었고, 그 명성이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3 출사 : 늦었다고 생각할 때, 아직 늦지 않았다

늦게나마 강세황이 걸었던 관로의 시작은 그 아들에게서 비롯되었다. 1773년(영조 49)에 베풀어진 영조의 양로연에 강세황의 차남 강완이 주서를 맡게 되었는데, 그의 가족관계를 이야기하면서 할아버지 강현과 아버지 강세황이 언급된 것이다. 영조는 기로소에 들어갔던 신하의 후손 중 남아있는 자가 극히 드물다면서 61세가 된 강세황에게 영릉(英陵)을 관리하는 참봉직을 제수하였다. 비록 말단직이지만 정식으로 과거에 응시한 적이 없는 그를 특채로 선임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세황은 몇 달 지나지 않아 병이 위중하다는 이유로 사임하였다.

이듬해에 영조가 사포서의 별제직을 수여하며 다시금 그를 불러들이자 이후로는 사임하지 않았고, 계속하여 상의주부, 감찰, 한성판관 등으로 승진하였다.

강세황은 64세가 되던 1776년(영조 52), 마침내 과거에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다. 영조는 대비(인원왕후(仁元王后))가 환갑을 맞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60세 이상의 노인을 모아 기로과(耆老科)를 치렀는데, 강세황은 여기에서 전체 수석을 차지하였다.

강세황은 이로 인하여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정조대에도 그의 관직생활은 더욱 탄탄대로를 달려, 병조참의, 호조참판, 도총관 등을 역임하게 되었다.

71세가 되던 1783년(정조 7)에는 기로소에 들어가면서 강세황 자신을 포함하여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삼대가 기로소에 들어가는 흔치 않은 영광을 누렸다. 당시 강세황의 벼슬은 당시 부총관으로 기로소에 들어가기에는 모자랐는데, 정조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살피고 나더니 강세황의 할아버지 강백년 역시 현종[조선](顯宗) 대에 벼슬을 한 등급 올려주고 기로소에 들어간 예가 있다며, 특별히 그의 벼슬을 도총관으로 높여주었다.

조선시대에 삼대가 모두 71세가 넘게 장수한데다가 모두 높은 벼슬에 올라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선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강세황과 그 집안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닮아 장수의 유전자를 타고난 것인지 강세황은 이후로 8년이나 더 살면서, 79세가 되던 1791년(정조 15)에 세상을 떠났다. 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출사였지만 이를 보상받고도 남는 결과였다.

강세황의 관직생활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그가 재야에 있던 시절 갈고 닦았던 학문과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펼칠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강세황이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에 깊게 관여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뛰어난 그림 실력은 이미 조정에 널리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강세황의 명성을 익히 아는 조정 신료들이 정조의 어진을 그리는 일에 그를 강하게 추천하였고, 정조는 그에게 이 사업의 지휘를 맡겼다.

또 다른 사례는 그의 청 연행이었다. 1784년(정조 8) 강세황은 청 연행 사절에서 진하 겸 사은 동지부사로 청을 방문하였는데, 이 때 그가 사절로 선정된 경위가 흥미롭다. 청의 건륭제는 당시 재위 50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연회(千叟宴)를 열겠다며 각국의 사절들을 60세 이상의 연로한 자들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글짓기와 그림 그리는 실력이 뛰어난 강세황은 이 모든 요건을 충족시키는 적임자나 다름없었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듯 강세황은 청에 방문해서 그 실력을 마음껏 펼치고 돌아왔다. 천수연에서 지은 시는 큰 호응을 얻었고, 현지인으로부터 ‘글은 한유(韓愈)와 같고,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와 같고, 그림은 고개지(顧愷之)와 같고, 사람은 두목(杜牧)과 같으니, 광지(光之 : 강세황의 자)는 이들을 모두 겸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유, 왕희지, 고개지, 두목 등은 중국 고대의 시, 서, 화 각 분야의 명사들로, 강세황이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는 최고의 극찬을 받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6년 후 청에 갈 사신을 물색하는 과정에서 강세황의 이름이 다시금 거론될 정도로 그의 연행은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채제공(蔡濟恭)은 연행 사절의 적임자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사절에게 있어 시를 잘 짓는 능력은 필수라며 강세황의 예를 들기도 하였다.

요컨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말은 강세황의 관로, 나아가 인생에 대한 수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남들과 비교한다면 매우 늦은 출사였지만 젊은 시절 축적해 놓은 예술적 역량을 조정에서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고, 나이가 많은 것도 문제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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