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강위

강위[姜瑋]

실학자에서 개화사상가로

1820년(순조 20) ~ 1884년(고종 21)

강위 대표 이미지

고환당 강위

동북아역사재단 뉴스레터(동북아역사재단)

1 가계와 성장배경

강위는 19세기 후반기 한국 한문학계를 대표하는 뛰어난 시인인 동시에 개화파 지식인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동아시아 삼국이 서구의 충격에 휩싸이며 격심한 사회변동을 겪은 시기이다. 아편전쟁(鴉片戰爭)에서 패배한 청이 남경조약을 통해 서구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일본도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문호를 열었다. 이로써 서구적 조약체제의 도입이 이루어지고 동아시아 질서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를 살면서 때로는 방외인으로, 때로는 외교의 막후로 현실에 참여하였던 것이 강위의 인생이었다.

강위의 본관은 진양(진주)로서 즉 오늘날의 진주 강씨이다., 고향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복정리였다. 이 곳은 남한산성(南漢山城) 서북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진양 강씨세보에 의하면 중시조는 은열공 강민첨(姜民瞻)이며 강위는 23세대에 해당한다고 한다.

강민첨은 북방에서 다양한 군사적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 동여진의 침략을 물리치고 거란의 침입을 맞서 맹활약했으며 강감찬의 부원수로 활약하였다.

6대조 강원길은 중추밀직부사를 지냈고 이 분의 직계가 광주군으로 옮겨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까지 거주하고 있다. 12대조 강희신은 조선조 중종년간에 현량과(賢良科)를 통해 등용되었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 일 이후 그의 집안은 문관직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고 강위 대에는 완전히 무반직으로 굳어져 있었다. 1882년 봄 강위가 일본에 두 번째 방문할 때 국왕으로부터 선공감 가감역(종구품) 벼슬이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격하여 시를 지었는데, 오랜 세월 문반으로부터 거리가 있었던 집안 사정 때문에 더욱 감회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세는 빈궁했던 것으로 보이며, 어렸을 때부터 몹시 병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국 관리 황옥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어렸을 때 옷을 입고 밖에 출입할 수 없을 정도로 병약했고, 11세에 비로소 서당에 가고 14세에 향시를 봤다고 했다. 이후 과거에 뜻을 두고 서울에 올라와 정원용 가에 머물며 수학하였는데, 이 시기 정원용(鄭元容)의 손자 정건조(鄭健朝)와 함께 수학하여 절친이 되었다. 이후 24세에 이르러 과거를 포기하고 민노행(閔魯行)의 문하에서 4년간 수학하였고 이후 제주도에 귀양가 있던 김정희(金正喜)를 찾아가 사사하였고, 김정희가 1848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자 역시 스승을 따라 북청에 갔고 1년이 지나 석방되자 같이 서울로 돌아왔다.

김정희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그는 고증학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아 기왕의 생각을 뒤집어버릴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양자, 고자, 묵자, 순자 등 종래 저평가받았던 제자백가들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주역』, 『춘추』, 『예기』가 한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등 종래 경전의 권위를 무시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이후 전국을 유랑하며 다양한 경험을 하였고 시문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이중하(李重夏)에 의하면 전국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였고, 동해도 두 번이나 돌았으며 가족을 데리고 무주산 중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이후 철종대 삼남지방의 민란으로 난민들에게 협박당해 집이 불타기도 했다고 한다. 난민들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뒤 정건조의 권유로 의삼정구폐책(擬三政捄幣策)을 짓기도 했으며, 이후 1873-1874년 두 번의 중국여행을 통해 개화파로 변신하게 되었다.

의삼정구폐책은 『고환당수초』의 일부분으로서 당시 민란의 주요 원인이었던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적은 내용으로 중국에서도 출판될 정도로 명문이었다고 알려져있다. 『고환당수초』는 1881년에 문인 방치요(房致堯)가 저자의 시문 수백 장을 지인들에게서 수집하고 정건조(鄭健朝)로부터도 소장하고 있던 『의책(擬策)』 1권, 고근체시 160여 수를 받아 『수초(收艸)』라고 명명한 책이다. 1884년 저자가 졸하자 아들 강요선(姜堯善)이 방치요 등과 함께 시문을 부집하여 문인 이건창의 교정과 정만조(鄭萬朝)의 편집을 거친 다음 김윤식의 서문을 받아 1885년 광인사에서 『고환당수초(古歡堂收艸)』의 시고를 17권 3책의 활자로 간행하였다

2 개화파로의 변신과 활동

근대 이후 서양의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세계 곳곳으로 유럽 세력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들어 조선에서도 이들 유럽의 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그 이전에 네덜란드인 하멜 등이 표류한 적이 있었으나 이 시기 들어서 등장한 유럽 선박의 등장은 이전에 비해 더욱 빈번해졌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이양선이라고 부르면서 경계하였으며, 이들과 접촉을 자제하면서도 이들이 정박할 경우 물자를 간단하게 지원해주곤 했다.

초기 강위의 서양 인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김정희의 경우, 서양의 위협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김정희는 1845년 5월 영국 군함 사마랑(Samarang) 호의 정박을 목격했으며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誌)』를 읽고 그 해방(海防)사상에 공감을 보였지만, 서양세력이 침공할 의사가 있었으면 어째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겠는가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는 이 책을 국가 방비의 계책 및 서구 문물이 실린 실학 서적으로 읽었고 서양세력의 침공에 대해서는 그리 우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김정희의 낙관적인 인식은 그의 제자였던 강위에게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51년 태평청국군의 봉기, 이후 1860년 북경이 영미연합군에 함락되고 함풍제가 열하로 피난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조선인들 사이에서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1866년에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하고 급기야 이양선이 강화도(江華島)를 거쳐 부평(富平)·양화진(楊花津)에까지 이르게 되자 조선인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조야의 위기의식이 고조된 가운데 강위는 당시 총융사(摠戎使)의 직책을 맡고 있던 신헌(申櫶)을 대신하여 강화도 현지를 시찰하기도 하는 등 당시의 군사적 위기를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당시 평안감사 박규수(朴珪壽)가 조정에 올린 제너럴 셔먼호 문정 보고를 보면 당시의 상황의 급박함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1873-1874년의 중국 여행을 계기로 서구의 군사적 위협을 실감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적극적인 개화파로 변신하게 된다. 1876년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에서는 신헌을 막후에서 보좌하였고, 1880년 조정에서 김홍집(金弘集)을 수신사(修信使)로 파견할 때 김옥균(金玉均)의 추천으로 동행하였다.

김옥균은 당대의 풍운아로서 이후 일본식 메이지유신을 롤모델로 일본측에서 차관을 빌려 개혁을 실시하려고 하나 실패하고 이후 갑신정변으로 급격한 변화를 꾀했으나 삼일천하로 그치고 말았다. 이후 망명생활을 이어나가다 홍종우에게 암살당한다.

이 여행에서 일본과 중국 인사들이 조직한 흥아회에 참여하여 교분을 맺기도 했다. 특히 황준헌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그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전파하기도 했다. 『조선책략』은 1880년(고종 17)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修信使) 김홍집이 당시 청국 주일공사관 참찬관(參贊官) 황준헌(黃遵憲)에게 기증받아 고종(高宗)에게 복명과 동시에 바친 책으로, 러시아의 남진 정책에 대비하기 위하여 조선·일본·청국이 펼쳐야 할 외교 정책을 다룬 책으로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막기 위해 동양 3국은 협력하고 미국과 연합하는 외교책을 쓰는 동시에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배워야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이후 조선 조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어 고종이 이 책의 내용을 대신들과 검토하고 전국에 배포하게 하였으나 보수적 유생들의 강한 반발을 받아 영남만인소를 유발하기도 했다.

반면 지석영처럼 『조선책략』의 내용에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1882년 다시 김옥균과 함께 동경에 갔으나 귀국하는 도중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행과 헤어져 중국 상해로 건너가 그곳 정치가들과 사태를 협의하기도 했다.

임오군란의 발발로 조선 정부는 급히 중국과 일본에 통보하면서 대처방안을 모색했다. 결과적으로 이 임오군란은 청국군의 조선 진입의 명분을 주었다.

1870년대 이후 강위는 중국에 세 번, 일본에 두 번 여행을 간 셈인데, 당대인들 중 보기 드물게 외국 여행을 많이 다닌 것이며, 그만큼 견문이 넓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1884년 4월 5일 65세를 일기로 많은 동료 제자들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다.

3 업적

그의 문집으로는 『고환당수초』가 있는데 당대의 석학 이건창(李建昌)이 교정하고 정만조(鄭萬朝)가 편집하였다. 시문을 모은 것은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방치요인데, 갑신정변 이후의 정세 때문에 김옥균,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들과 오고간 시문은 모조리 삭제되었으며, ‘경위합벽’, ‘손무자주’와 같은 고증학적 업적도 세론을 두려워하여 문집 간행 때 제외되었다가 모조리 산일되었다. 이후 『고환당집』, 『담초』, 『동문자모분해』 등과 함께 아세아문화사에서 『강위전집』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으로서 그는 김택영(金澤榮), 황현(黃玹) 등과 더불어 3대 시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며 그의 시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파격과 자유로움으로 유명하다.

4 영향과 계승

강위는 1870년대 두 차례의 중국 여행 이후 격동하는 국제 정세와 약육강식의 현실에 대해서 자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찍부터 중인층들과의 교분이 두터웠고 중국 출입의 기회가 많았던 역관배들과의 교류도 활발하여 다른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제 정세에 더 밝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막후에서 박규수(朴珪壽), 신헌 등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젊은 양반들의 계몽에 힘써 시짓는 모임을 개최하면서 젊은 사대부들과 교분을 쌓고 이들을 계몽하기 위해 힘썼다.

강화도 조약 이후 그는 이미 당대의 명사가 되었고 그의 시모임에는 그의 시제자가 되기 위한 지망생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중인 계층들이 다수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이후 개화 운동에 적지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