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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립[姜弘立]

전략가인가 변절자인가

1560년(명종 15) ~ 1627년(인조 4)

1 머리말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광해군(光海君)의 명을 받아 도원수로서 심하전투(深河戰鬪)에 참전하였다가 패전하여 투항하였다. 이후 후금의 정보를 탐색하고 후금과 조선의 관계를 주선하는 데 노력하였다.

2 강홍립의 관직생활 : 심하전투 이전까지

강홍립은 1560년(명종 15년)에 태어났다. 강홍립의 자는 군신(君臣), 호는 내촌(耐村)이다. 그의 본관은 진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이고, 아버지는 참판 강신(姜紳)이며, 숙부로 강인(姜絪)이 있다. 그가 8살 때 선조[조선](宣祖)가 즉위한 이후 정계는 급격히 사림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동인과 서인의 붕당이 출현하여 치열한 정쟁이 벌어졌다. 그의 아버지 강신 역시 이 과정에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처리하는 데 참여하여 평난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강홍립은 30세 때인 1589년 진사가 되고, 1597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1598년에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어 홍문관원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았는데, 이는 문장과 학행을 갖추고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젊은 관료로 인식되었음을 뜻한다.

강홍립은 초기에 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 등의 청요직을 역임하다가 1599년에는 함경도도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명과 조선이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나중에 청의 시조가 되는 누르하치를 비롯한 북방의 여진족들이 힘을 키우고 있었고, 일본과의 전쟁을 겨우 마무리한 조선은 다시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에도 대처해야 했다. 특히 조선에 반란을 일으킨 여진족 추장 노토(老土)를 정벌하는 일이 현안이 되었는데, 함경도도사였던 강홍립은 이에 대해 적절한 의견을 제시하여 정벌을 도왔다. 이때부터 북방 문제에 대해 경험을 쌓은 것이다. 그가 올린 방안은 선조에게까지 보고되었는데, 노토 부락을 정벌할 시기 및 노토 부락으로 향하는 길, 구체적인 습격 방법까지 자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후에도 그는 홍문관, 사헌부, 성균관 등에서 관직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외교나 국방에 관계된 업무를 맡기도 했다. 예를 들어 1606년(선조 39년)에는 왕이 명 사신을 접대할 때 어전통사로 발탁되었는데, 이를 통해 그가 중국어를 할 줄 알았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또한 1607년(선조 40년)에는 함경도 순검어사로 나가 6진 및 길주 이북의 군대를 정비하는 일에 대하여 건의를 올렸는데, 이는 10년 전에 함경도 도사로 부임한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인 1608년에 그는 이덕형(李德馨), 황신(黃愼)과 함께 서장관으로서 명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이는 그가 승진하는 발판이 되었다. 광해군은 선조의 적장자가 아니어서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이덕형 등은 명에 광해군을 왕으로 책봉해 줄 것을 주청하기 위해서 사신으로 갔던 것이다. 이때 사신으로 다녀온 사람들에게는 상을 후하게 내렸는데, 강홍립 역시 관작이 올랐다. 이후 그는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수원부사 등의 중직을 역임하였고, 1618년에는 진령군(晉寧君)에 봉해졌다. 강홍립은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서도 공적을 올려 현지의 인심을 얻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심하전투에 참가하기 전까지 강홍립은 홍문관 등의 청요직을 역임하여 조선 관인의 전형적인 출세 코스를 밟았으며, 특히 중국어 능력과 여진족에 대한 대책 등이 높이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심하전투의 조선군 사령관 : 인생의 분기점

선조대부터 문제가 되었던 북방의 여진족 문제는 광해군대가 되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다. 건주위 여진족의 추장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누르하치는 젊은 시절부터 군사적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내었고, 마침내 1616년(광해군 8년)에는 후금을 세우고 명으로부터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명은 후금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에서도 군대를 보낼 것을 요구하였으며, 광해군은 이를 최대한 피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원정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광해군이 명에 군사적 선택을 신중할 것을 충고하였음을 보면, 후금과의 전쟁을 광해군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1618년(광해 10) 명이 경략 양호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후금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자, 광해군은 강홍립을 원정군을 이끌 도원수로 삼았다. 그의 변경에서의 근무 경력과 군무에 대한 지식, 중국어 능력 등이 고려된 인사였다. 그와 함께 군대를 이끌 부원수에는 김경서(金景瑞)를 임명하였으며, 휘하에 안여눌(安汝訥), 문희성(文希聖), 김응하(金應河) 등을 배속시켰다. 강력한 후금을 상대로 출정하는 도원수의 임무는 그에게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이어서, 임명을 사퇴하고자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강홍립은 1618년(광해 10) 8월에 한양을 출발하여 9월에 평양에 도착하였고, 10월에 창성에 주둔하면서 군사를 정비하고 명군과 군대 편성 및 군사계획을 조율하는 등 출정을 준비하였다. 이때 광해군은 그에게 명 장수들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 힘을 쓰라고 특별히 지시하였다.

이듬해인 1619년(광해 11) 2월 명군은 누르하치의 본거지를 향해 네 방면에서 군대를 출동시켰고, 강홍립 역시 약 1만 3천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남쪽에서 출발하는 명군과 합류하여 후금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당시 종사관으로 참전했던 이민환(李民寏)의 증언에 따르면 도원수 강홍립 직속부대가 740명, 부원수 김경서 직속부대가 1890명이었고, 중영 3350명, 좌영 3480명, 우영 3370명이 편제되어 있었다. 또한 별도로 5천 명의 마군(馬軍)이 군량을 운송해 오기로 되어 있었다.

조선군은 군량이 제때 도착하지 않은데다가 길이 험하여 전진에 어려움을 겪었고, 강홍립은 도원수로서 조선군의 입장을 명군에 설명하며 일정을 늦추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명군은 기일이 정해져 있다는 이유로 행군을 엄하게 독촉하였다. 그 결과 조선군은 굶주리고 피로에 지친 상태로 행군할 수밖에 없었다. 강홍립의 보고에 따르면 명군 지휘부 내부에도 균열이 있었으며, 조선군은 군량이 다 떨어진데다가 병사들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3월 4일,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행군하던 중 부차(富車)에 도착하였다. 당시 명군의 다른 부대들은 후금군에 의해 각개격파되었으며, 조선군보다 앞서서 행군하던 명군 부대 역시 후금군에게 괴멸당했으나, 조선군은 이를 모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후금군이 접근해 오자 강홍립은 진영을 정비하도록 지시하였지만, 미처 대오가 완전히 갖춰지지 못한 상태에서 후금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순식간에 김응하가 이끄는 좌영이 먼저 괴멸당했고, 이를 구원하러 간 이일원의 우영 역시 전멸당해 강홍립이 있는 중영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후금군이 중영에까지 공격해 온다면 전군이 전멸할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후금은 조선군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왜 원한도 없는 조선이 자신들을 치러 군대를 보냈느냐고 물어 왔고, 강홍립은 이번 출병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였다. 후금군과 조선군이 서로 사람을 보내어 교섭한 끝에 강홍립을 비롯한 조선군 지휘부는 항복을 결정하였고, 이로써 전투는 종결되었다. 이것이 심하전투(深河戰鬪)의 마지막 국면인 부차전투(富車戰鬪)이다.

조선군과 후금군의 전투 양상 및 항복 경과에 대해서는 참전했던 이민환의 기록과 평안감사 박엽(朴燁)의 장계, 강홍립의 보고 등 다수의 기록이 전한다.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한 것에 대해서는 출정 전에 미리 상황을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광해군의 밀지를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어 전투 전에 강홍립의 지시로 후금에 역관을 파견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해 광해군일기는 강홍립이 역관 하서국(河瑞國)을 미리 후금 진영에 파견하여 조선군이 후금 침공에 동참한 것은 본의가 아니라고 미리 언질을 주었다고 한 반면, 강홍립의 종사관으로 출진했던 이민환은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의 격문을 가지고 정보를 탐색하기 위해 보낸 것이라 기록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후금군과 싸우다 전사한 조선군 숫자만 9천 명에 이르는 사실 등으로 볼 때 그의 투항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루어졌으며, 항복하라는 내용의 밀지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4 투항 이후 : 고국을 위한 노력과 불안해져가는 입지

강홍립은 능력을 인정받아 도원수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최선을 다했으나, 후금군에 의해 명군이 패배하고 조선군도 반수 이상이 괴멸당하면서 투항이라는 선택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후 죽을 때까지 그를 얽어매는 족쇄가 되었다.

강홍립은 항복한 이후 후금의 도성인 허투알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누르하치와 접견하였다. 다른 포로들 중 다수는 탈출하거나 석방되어 조선에 돌아올 수 있었지만, 강홍립은 김경서 등 10여 명의 장령들과 계속 억류당했다. 강홍립은 억류된 지 얼마 안 되어 후금에서 자신을 핍박하여 굴욕을 주려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고 했지만, 후금에서는 그의 안전을 보장하며 안도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후금이 근거지를 이동할 때 강홍립 역시 따라가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먹을 것과 땔나무가 부족하여 많은 고생을 했다.

다만 후금의 강홍립에 대한 대우는 전반적으로 후해서, 정묘호란이 끝나고 강홍립과 박난영(朴蘭英)이 귀국한 후 후금군이 조선에 전해준 그들의 재산은 중국인 남녀 2백 47명과 조선인 31명, 낙타 한 마리, 수레 다섯 채, 마소 30여 필에 이르는 것이었다.

또한 후금은 포로가 된 요동지휘사 동기공(佟奇功)의 딸을 강홍립과 박난영에게 시집보냈고, 이들은 정묘호란 이후 강홍립과 박난영을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당해 있으면서 후금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을 막고, 조선의 입장을 설명하며, 수차례 조정에 밀계를 올려 후금의 정황을 조선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보고를 통해 광해군은 후금이 조선과의 화친을 원한다는 사실과 후금의 현재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강홍립은 조선과의 강화를 둘러싼 후금 내부의 의견 대립이라든지, 심하전투 이후 후금의 군사행동을 자세히 기록하여 보고하였다.

또한 강홍립은 후금에 조선의 출병이 부득이했음을 알리고, 조선에서 보내온 문서를 좋은 쪽으로 해석하며, 과거 후금과 조선의 갈등에 대해 조선에 유리하도록 해명하는 데 힘썼다.

조선군이 패하고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명에서는 조선이 의도적으로 군대를 항복시킨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비변사와 삼사에서도 강홍립과 김경서 등 장수들의 직명을 삭제하고, 그들의 가족들을 구금, 처벌하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를 물리치고, 오히려 강홍립이 포로로서 후금의 정보를 보고하는 것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강홍립의 가족들이 그와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나아가 강홍립을 통해 후금과 교섭하고자 했다. 광해군은 강홍립의 입장을 변호해 주면서, 그를 통해 후금과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중립외교를 실천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는 당시 사대부들의 생각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남인 문위(文緯)와 서인 심광세(沈光世)는 당색은 달랐지만 똑같이 강홍립의 항복을 강상을 무너뜨린 것으로 극렬히 비난하였다.

반면 광해군은 강홍립의 처벌을 청하는 양사의 상소에 “고상한 말은 국사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젊은이들의 부박한 논변은 잠시 멈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 하며 거부하였다. 또한 “강홍립이 무슨 나라를 판 일이 있는가” 하며 그를 변호하였다.

비난이 계속되자, 강홍립 역시 자신의 항복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음을 변명하는 장계를 올렸다.

그러나 중립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이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폐위되고 인조[조선](仁祖)가 즉위하여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하자, 강홍립의 입지가 애매해졌다. 비록 새로 집권한 인조가 후금과의 관계를 고려해 강홍립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고, 그의 가족도 여전히 안전하게 생활하고 있었지만, 조정의 분위기가 바뀐 상황에서 강홍립은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괄의 난(李适-亂) 때 후금으로 도망친 한윤(韓潤)이 강홍립에게 그의 부모, 처자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거짓으로 말함으로써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사태를 염려하여 실제로 이괄의 난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강홍립에게 가족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리려고 시도했으나, 명의 감시로 인해 결행하지 못했다.

5 귀국과 최후

그가 오랜 억류 끝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얄궂게도 전쟁 때문이었다. 1627년(인조 5년),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는 사촌형 아민에게 군대를 주어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발한 것이다. 후금군은 한윤을 길잡이로 삼고, 강홍립과 박난영을 대동하여 조선으로 쳐들어갔다. 강홍립으로서는 9년만의 귀향이었다.

전쟁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던 조선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렸고, 후금군은 순식간에 평안도를 돌파하여 황해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금군 역시 전쟁의 주요 목적인 가도(椵島)의 모문룡 제거에 실패했고, 조선을 완전 정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실제로 후금군은 전쟁 초기부터 조선에 강화를 먼저 요구해 놓은 상태였다.

조선측에서도 강화에 적극 호응하였는데, 이때 강홍립의 존재가 다시 중요해졌다. 조선에서는 강홍립과 박난영에게 서신을 보내어 후금의 입장을 탐색하면서 강화의 실마리를 얻고자 했다. 후금에서도 강홍립을 강화 주선에 이용하였고, 강홍립은 조선 조정에 편지를 보내어 후금이 강화를 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강홍립의 숙부 강인과 아들 강숙을 후금 진영에 왕래하게 하여 강화의 사자로 삼았다. 강홍립의 존재가 위기에 빠진 조선으로서는 더없이 귀중해진 것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강홍립과 박난영에게 이전의 허물을 용서하고 후한 상을 주겠다고 회유하기까지 했으며, 그 아들들에게는 벼슬을 내렸다.

강홍립은 인조와 조선 조정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2월 9일, 인조가 피난해 있던 강화도로 강홍립과 박난영이 후금의 사신과 함께 찾아왔다. 조정에서는 척화론을 주장한 윤황(尹煌)과 같이 강홍립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인조는 이를 묵살하고 2월 10일 강홍립과 박난영을 접견하였다. 강홍립은 그 자리에서 인조에게 후금군이 쳐들어온 이유와 후금군 내부의 강화 논의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강홍립은 조선에 후금에 대한 정보를 알려줌은 물론, 후금군 진영으로 돌아간 후에도 조선 조정과 지속적으로 서신을 왕래하면서 강화의 체결 및 후금군의 약탈 방지를 위해 힘을 썼다. 그 결과 강화가 체결되었고, 강홍립은 조선에 영구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홍립의 말년은 평탄치 못했다. 인조는 강홍립의 관작을 회복해 주고, 그에게 요미(料米)를 지급하는 등 후하게 대우했다. 하지만 강홍립의 어머니는 그가 후금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세상을 떠나 있었다. 그가 어머니의 무덤을 보러 간 사이 후금의 사신이 들어와 그의 소재를 물었고, 그를 조선에서 죽인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일까지 있었다. 또한 조정 신료들은 계속 그를 처형하라고 요구하였고, 명에서도 그를 조선에서 왜 보호하는지를 캐물었다. 강홍립에 대한 처우가 어느 정도 결정된 이후에도 조경(趙絅)과 같은 다수의 신료들은 그에게 후하게 대우하는 것을 문제시했다. 그는 끊임없이 복잡한 국제관계 및 조선 내부의 의리명분론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강홍립은 귀국한지 1년 4개월 남짓 지난 1628년(인조 5년) 7월 27일 병사했다. 그가 죽자 인조는 다시금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과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는 신료들의 반대로 인해 결국 취소되었다.

그는 후금에 항복한 일로 오랫동안 비판받았으며, 정묘호란 이후부터는 후금의 조선 침공을 유도했다는 이유로 더욱 비난을 받았다. 생전에는 그를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사후에는 정묘호란의 원인을 그에게 돌리는 부당한 평가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는 그를 주인공으로 삼아 철저히 부정적으로 묘사한 『강로전(姜虜傳)』이라는 소설까지 만들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강홍립은 병사들을 살리고, 후금의 정보를 조선에 전달하며, 후금과 조선의 강화를 주선하는 등 주어진 상황에서 조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부당하게 비판받은 시대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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