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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안[姜希顔]

조선 전기 시(詩)·서(書)·화(畵)의 삼절(三絶)

1417년(태종 17) ~ 1464년(세조 10)

강희안 대표 이미지

고사관수도

국립중앙박물관

1 가문 배경과 가족 관계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字)는 경우(景愚), 호(號)는 인재(仁齋)이다.

강희안의 친가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고려 말~조선 초기에 여러 대에 걸쳐 재상(宰相)급의 고위 관료들을 계속 배출한 명문가의 하나였다. 즉, 그의 증조부 강시(姜蓍)는 공양왕(恭讓王)의 사돈으로 관직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조부 강회백(姜淮伯)은 고려 말에 정당문학(政堂文學)과 대사헌(大司憲), 조선 초에는 동북면 순무사(東北面巡撫使) 등을 역임하였다. 또 아버지 강석덕(姜碩德)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친동생 강희맹(姜希孟)은 좌찬성(左贊成)에까지 올랐으며, 종형(從兄)인 강맹경(姜孟卿)은 세조대에 영의정을 지냈다.

강희안의 어머니는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세종(世宗)의 장인인 심온(沈溫)의 딸이며,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다. 따라서 강희안은 세종의 조카가 되고, 문종[조선](文宗)·세조[조선](世祖)·안평대군(安平大君) 등과는 외종(外從) 관계가 되는 왕실의 인척이었다. 이상과 같은 강희안의 친가와 외가의 가문 배경은 그가 순탄한 관직 생활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희안은 두 번 결혼하였다. 첫 번째 부인은 지통례문사(知通禮門事) 이곡(李谷)의 딸이었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이 일찍 사망하였다. 이에 강희안은 전(前) 주부(主簿) 김중행(金仲行)의 딸과 혼인했는데 아들 없이 딸만 넷을 낳았으므로, 후에 동생 강희맹의 둘째 아들 강학손(姜鶴孫)을 후사로 삼아 대를 잇게 하였다.

2 세종~세조대의 관직 생활

강희안은 1438년(세종 20)에 진사시(進仕試)에 합격하였고. 3년 후인 1441년(세종 23)에 식면 문과(式年文科)에서 정과(丁科) 13위로 급제하였다.

문과 급제 후 예문관(藝文館)의 한림(翰林)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강희안은 이후 세종 말까지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예조좌랑(禮曹佐郞),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 이조좌랑(吏曹佐郞), 부지돈령부사(副知敦寧府事)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강희안은 돈령부주부로 재직하던 1444년(세종 26) 2월에는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현로(李賢老)·이개(李塏) 등과 함께 『운회(韻會)』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또, 그는 훈민정음 28자에 대한 해석과 범례를 정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1447년(세종 29)에는 최항·성삼문(成三問)·이개 등과 함께 『동국정운(東國正韻)』을 완성하는 등 훈민정음의 창제 및 이와 관련된 각종 연구와 저술 사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후 강희안은 1451년(문종 1)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등을 역임했고 1454년(단종 2)에는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올랐다. 그리고 1455년(세조 1) 12월에는 세조 추대에 참여한 공로로 아버지 강석덕, 동생 강희맹과 함께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었다.

그리고 지병조사(知兵曹事)를 거쳐 1456년에는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다.

1456년(세조 2) 6월 성삼문·박팽년 등이 단종[조선](端宗)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때 강희안도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강희안이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이개로부터 “인심(人心)이 흉흉하다.”는 말을 듣고는 못들은 것처럼 피했을 뿐 이를 왕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것과 성승(成勝)의 집에서 박팽년·하위지(河緯地) 등과 함께 술을 마신 일 등을 근거로 강희안 역시 단종 복위 도모에 관련되어 있다고 하면서 그를 처벌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조가 나서서 강희안을 적극적으로 비호해 줌으로써 대간의 계속된 탄핵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1458년(세조 4)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임명된 강희안은 같은 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어 외직에 나갔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인해 서울로 다시 돌아왔고 호조참의에 복직되었다. 1459년(세조 5) 9월 부친상을 당한 강희안은 상기(喪期) 동안 관직을 떠나 있다가 상을 마친 후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 복직하였다. 인순부윤으로 재직 중이던 1462년(세조 8) 4월에는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사행을 다녀왔다.

사행에서 돌아온 후 강희안은 행 상호군(行上護軍)·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인수부윤(仁壽府尹) 등을 역임했으며. 1464년(세조 10) 10월에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에서 보듯이 강희안은, 사육신 사건 때 잠시 어려움에 처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일생동안 큰 부침 없이 평탄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 실록에 수록된 강희안의 「졸기(卒記)」에서는 강희안이 젊어서부터 영달(榮達)하기를 즐기지 않았으며, 재주가 많았음에도 어리석은 것처럼 몸을 지켰다고 하면서 이를 ‘어질다’고 평가했다.

3 시(詩)·서(書)·화(畵)에 출중한 예술가

앞 장에서 본 것처럼 강희안은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으며 여러 동료 학자들과 각종 연구와 편찬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하지만 강희안의 명성은 시와 글씨, 그림 등의 예술 분야에서 더욱 높았다. 그는 시와 글씨, 그림에서 모두 뛰어난 실력을 갖추어 ‘삼절(三絶)’이라고 불렸으며, 특히 글씨와 그림에서는 당대에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던 예술가였다. 이와 같은 강희안의 예술적 재능은, 그의 아버지 강석덕과 동생 강희맹도 시·글씨·그림에 출충한 능력을 보였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집안 대대로 이어져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강희안의 시는 당대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강희안의 시에 대한 당대인들의 평을 검토해 보면, 대체적으로 그가 담박(澹泊)하고 평이하면서도 우아하고 법도에 맞는 시풍(詩風)을 지녔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강희안의 시는 그의 동생 강희맹이 편찬한 『진산세고(晉山世稿)』에 66제 171수가 수록되어 있다.

강희안의 글씨는 진(晉)나라의 왕희지(王羲之)나 원(元)나라의 조맹부(趙孟頫)에 비견될 정도였으며, 특히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조선 초기의 학자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강희안과 정난종(鄭蘭宗), 그리고 자신의 형인 성임(成任) 등 세 사람이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고 하였다.

강희안의 글씨는 조정에서도 뛰어남을 인정받았는데, 이는 국가적인 필사(筆寫) 사업에 강희안이 항상 참여했던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세종대와 세조대에는 금이나 은으로 불경(佛經)을 필사하여 죽은 이의 명복을 빌거나 소원을 비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그때마다 강희안이 필사자로 참여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1446년 3월에는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 이영서(李永瑞)와 함께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집에서 금으로 불경을 필사했고, 1450년(세종 32) 1월에는 세종의 명에 따라 미타관음경(彌陀觀音經)을 필사했으며, 4월에는 서거한 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추진된 불경 필사에 참여하였다.

이밖에 강희안은 1445년(세종 27) 국왕의 어보(御寶) 중 하나인 소신지보[국새](昭信之寶)를 제작할 때에 그 인문(引文)을 전서로 썼다.

또, 세조대에 새로 금속활자를 주조할 때도 강희안이 글씨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을해자(乙亥字)이다.

강희안은 그림에 대해 동시대의 학자 서거정은 송나라의 화가 유용(劉墉)과 곽희(郭熙)의 묘를 체득했으며 또 스스로 깨달은 묘법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

강희안이 명나라에 사행을 갔을 때 산해관(山海關)에서 만났던 주사(主事) 양거(楊琚)는 강희안에게 얻은 단찰(短札)을 보배처럼 여기면서 상자에 넣어 간직했다고 한다. 또, 그는 강희맹을 통해 강희안의 시를 얻은 일이 있었는데, “글씨와 시(詩) 두 가지가 모두 절묘(絶妙)하다.”라고 하면서 강희안의 시와 글씨를 극찬하였다.

강희안의 작품으로 문헌상에 남아 있는 그림의 제목들을 보면 그는 주로 산수(山水)·인물(人物)·화훼(花卉)·초충(草蟲) 등을 주로 그렸고, 특히 묵화(墨畵)로 대나무·매화·난 등을 즐겨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강희안의 「행장(行狀)」에 따르면, 강희안은 서화는 천한 재주이며 후세에 유전되면 단지 이름을 욕되게 할 뿐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작품이 후대에 전해지는 것을 꺼려했다고 한다. 그 결과 강희안의 탁월한 능력과 명성에 비해 그의 작품으로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많지 않다.

현재 강희안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그림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고사도고도(高士渡稿圖)」·「절매삽병도(折梅揷甁圖)」·「소동개문도(小童開門圖)」·「교두연수도(橋頭煙樹圖)」 등과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 있는 「산수도(山水圖)」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강희안의 진작(眞作)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로 알려져 있는데, 그 화풍(畵風)은 대체로 남송(南宋)의 원체화풍(院體畵風)과 명나라 초기의 원체화풍 및 절파화풍(浙派畵風)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4 꽃과 나무를 사랑한 학자

강희안은 출세하여 명성을 얻는 것보다 날마다 글을 읽고 꽃을 키우는 일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강희안은 직접 쓴 『양화소록(養花小錄)』의 서문에서 자신이 조회에 참석하거나 아침저녁으로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때를 제외하면 항상 꽃을 키우면서 소일했다고 하였다. 또, 강희안이 꽃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친구들이 진귀한 꽃을 선물로 주었고, 그 결과 강희안은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화훼를 소장할 수 있었다.

강희안은 화훼를 기르면서 직접 터득한 재배법과 또 중국 문헌을 통해 습득한 화초 재배법 등을 종합 정리하여 하나의 책을 편찬했는데, 그것이 바로 『양화소록』이다. 『양화소록』은 원래 독립된 저술이었으며, 대략 1449년(세종 31)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강희맹이 1473년(성종 4)경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형 강희맹의 시문을 종합·정리하여 『진산세고』를 편찬하면서 『양화소록』을 『진산세고』의 마지막 권4에 수록하였다.

『양화소록』의 내용을 보면, 맨 앞에 강희맹의 서문과 강희안의 자서(自序)가 있다. 이어 본문은 정원을 꾸미는 식물 16종과 괴석 등 모두 17개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되어 있다. 꽃과 나무를 화분에서 재배하는 법, 화분을 배열하는 법, 종자나 뿌리를 보관하는 법 등 원예에 관한 다양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강희안은 서문에서 꽃과 나무를 기르는 것은 단지 그것들이 각각의 천성을 온존하게 하고 각각의 본성을 따르게 해주는 것에 불과하며, 특별한 지혜나 힘이 더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어 그는 사람도 화훼와 마찬가지여서 그 마음을 졸이고 몸을 피로하게 하여 천성을 어기고 본성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점을 확충시켜 나간다면 어딜 가더라도 바르게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서문 내용은 강희안에게 있어 화훼 재배는 단순한 취미 생활에 그친 것이 아니라 삶의 철학적 토대를 이루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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