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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高敬命]

호남에서 6천 의병을 일으키다

1533년(중종 28) ~ 1592년(선조 25)

고경명 대표 이미지

고경명을 모신 포충사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고경명의 생애

1533년(중종 28)~1592년(선조 25). 조선의 문신이자 의병장. 아버지와 장인의 정치적 입지 때문에 관직생활 전반은 파란만장했다. 관직임명과 파직을 오갔으나 교우관계는 돈독했고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고향에 있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아들들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으며 1차 금산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2 시대적, 가문적 배경

명종대에서 선조대는 사림정치가 확대되고 뿌리내리던 시기였다. 명종대 외척끼리의 권력다툼에 휩쓸려 사림 세력은 정계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으나 서원과 향약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고경명의 본관은 장흥이다.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이며, 광주 압보촌(鴨保村) 출생이다. 증조부는 고자검(高自儉), 조부는 고운(高雲), 부친은 고맹영(孟英), 어머니는 진사 서걸(徐傑)의 딸이다. 처의 부친은 김백균(金百鈞)이다.

강원도사를 거쳐 사간원, 홍문관, 시강원의 직책을 두루 역임했다. 이량과의 친분을 통해 승진을 거듭하였다 하여 비판 받았다.

3 파란만장한 관직생활

1552년(명종 7)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했고, 1558년(명종 13)에 또 문과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전적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에 호조좌랑으로 승진했다. 이듬해에는 세자시강원사서에 임명되었고, 1560년(명종 15)에는 문신들의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말을 하사받았다. 1562년(명종 17)에는 봉선사에서 당시 문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던 윤두수(尹斗壽), 강사필(姜士弼), 윤자신(尹自新), 장실(張實) 등과 같이 시우회를 열기도 했다. 이지함과 친분이 있어 그에게 서실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한 일도 있으며, 기대승(奇大升)과도 친분이 있어 그와 시를 나누기도 했다.

1563년(명종 18)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탄핵하는 데 참여하면서도, 그 경위를 장인 김백균을 통해 이량에게 몰래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되었고 곧 파직되었다.

아울러 울산군수로 가면서 시를 한 수 남기기도 하였다.

친척과 조정을 떠나는 마음이 어떠하랴. 멀고 먼 울산이 천리가 넘는다. 바닷가에 장기만 자욱할 뿐이고 오랑캐들 연기에 생선조차 나쁘리. 나의 행장 강남부보다 더 쓸쓸한데, 그 지방 풍토도 월절서와 같겠지. 그렇지만 한평생 충신으로 산다면 어디를 간다 해도 맘 놓고 살 수 있다오.

4 명나라로의 사행길

오랜 세월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1581년(선조 14) 49세 때에 영암군수로 다시 임명되었고, 곧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 김계휘(金繼輝)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종계변무란 명나라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인임으로 기록된 부분에 대해 조선이 수정을 요구한 일련의 과정을 뜻한다. 왕조초기부터 요청은 계속되었으나 명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선조대에 이르러 개정요구가 수용되어 1584년(선조 17) 개정된 부분을 등사해왔고, 1589년(선조 22) 전질을 받아왔다. 그러나 1581년(선조 14)의 사행에서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무주청사 정사에 김계휘, 서장관에 고경명, 질정관에 최립이 임명되었다.

명나라로 향하는 사행길에서 처음으로 빙등과 마유라는 과일을 먹어보기도 했으며, 이를 시로 남기기도 하였다. 또 백이숙제의 묘(廟)를 방문하여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임무인 종계변무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명조정은 조선의 요청을 또다시 거절했다. 사절일행에게는 극진한 대우를 해주었으나 고경명은 이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이에 비통한 마음을 시로 남기기도 하였다.

이듬해 서산군수로 나갔는데, 마침 이때 신종의 황태자가 탄생하자 명조정은 이 소식을 조선에 공식적으로 전하기 위해 한림편수 황홍헌(黃洪憲)과 공과급사중 왕경민을 보냈다. 이들을 접대하기 위한 원접사로서 이이가 선발되었고 고경명은 이이의 천거로 그의 종사관이 되었다.

후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을 도와 명을 침략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을 품기도 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과거에 황홍헌을 따라 조선에 왔다가 선조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자를 조선에 보내 진위를 확인하였다.

율곡이이는 황홍헌의 부탁을 받고 극기복례설을 지어줬다.

고경명은 황홍헌을 대접하며 그와 시를 나누기도 했다.

1584년 종부시첨정, 사복시첨정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순창군(淳昌郡)로 부임했다. 1588년 파직되었으나 1590년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이량과의 관계, 정철(鄭澈)과의 친분으로 인하여 대간의 탄핵 대상이 되었고, 결국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5 임진왜란의 발발과 의병활동

고향에 있던 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했다. 고경명은 곧 의병을 규합했고 명망이 높던 그를 대장으로 하여 좌우부장에 양대박(楊大樸)과 유팽로(柳彭老)를 배치하였으며, 이 외에도 양사형(楊士衡)·강염(姜恬)·박대기(朴大器)·안영(安瑛)·최상중(崔尙重)·양희적(楊希迪) 등이 합류했다. 이들은 6월11일 담양(潭陽)에서 출정했다.

일본군이 호남으로 침략할 것이라는 소식과 금산이 함락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경명은 유팽로에게 지시하여 호서의병장 조헌(趙憲)에게 격문을 보내 두 의병군이 합세하여 금산의 일본군을 함께 토벌하자고 약속하였다. 그 후 진산에서 전군을 재편한 고경명의 의병군은 일부 군사를 그 곳에 주둔시키고 군량 공급 임무를 부여한 뒤, 유팽로를 금산 공격군의 선봉장으로, 안영을 후군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7월8일 진격을 시작했다. 7월9일 전라방어사 곽영(郭嶸)과 합세한 후 금산성 밖 10리 지점에 진을 치고 공격을 시작했다. 성 내외에 피해를 입힌 후 의병들은 회군했다가 다시 기회를 보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고경명은 이에 반대했다.

7월10일 다시 적진을 공격했다. 방어사군은 북문을, 의병은 서문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적이 관군 쪽이 약한 것을 알고 그 쪽을 집중공격 하였다. 선봉장이 달아나자 관군이 일시에 무너졌다. 고경명은 의병 만으로라도 대항하려했으나 의병진영도 무너지기 시작한 후였다. 종사관이었던 안영과 유팽로 등이 대장인 고경명이라도 구하려 하였으나 구출에 실패했고, 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모두 전사했다. 1차 금산성 전투였다.

6 고경명이 남긴 것. 문집의 간행.

이후 장남 고종후(高從厚)는 아버지와 동생의 전사소식을 듣고 복수군에 합류했다.

고경명은 이후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고,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霽峯集)〉, 속집(續集)·유집(遺集), 무등산 기행문인 〈유서석록(遊瑞石錄)〉, 의병을 일으켰을 때 각 지역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正氣錄)〉이 있다.

고경명의 막내아들(여섯째 아들) 고용후가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고용후는 아버지의 문집을 들고 갔다. 이 때 명나라 예부의 주객청리사 제독이자 회동관 주사 장응회는 조선사신을 접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고용후는 장응회에게 아버지의 서문을 부탁했다. 장응회는 고경명의 시를 읽고 감탄했으며 그가 아들과 함께 전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슬퍼했다. 또한 막내아들이 성공하여 사절로 오게 된 데 대해 칭찬하면서 흔쾌히 서문을 써주었다. 1613년에 고용후가 병조정랑으로 있으면서 고경명의 문집을 목판으로 새기기 위해 그의 시 중 몇 편을 뽑아달라고 하였다. 너무 많지 않게 4~5권 정도를 희망한다는 고경명의 유지를 전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서문도 청했다. 윤근수가 영남지방에 갔다가 돌아와 봉성에 머물 때 고경명의 다섯째 아들 고유후가 찾아와 책을 가져와서 이름을 청하므로 정기록이라 하였다. 서문도 청해서 승낙하고 바로 짓지는 못하고 있던 중 수년이 지났고 고유후도 세상을 떠났다. 이후에 고용후가 다시 부탁을 해서 1599년 10월에 서문을 지어주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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