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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郭再祐]

붉은 옷의 의병장

1552년(명종 7) ~ 1617년(광해군 9)

곽재우 대표 이미지

곽재우 동상 제막식(1972)

국가기록원

1 곽재우의 생애

1552년(명종 7)∼1617년(광해군 9). 조선의 문신이자 의병장.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고향에 내려와 있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의 의병활동은 경상우도지역과 전라도가 보전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조정에서 내리는 높은 관직보다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일본군들을 물리치고 전쟁을 극복할 것인가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전쟁 이후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정치적 분쟁에도 관여하지 않은 채 조용히 여생을 마감했다.

2 임진왜란 이전 곽재우의 삶

선조대는 성리학의 사상적 심화가 본격화된 시기였다. 또한 지방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 오던 사림들은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사림 세력 사이에서도 학술적, 정치적 견해차로 인해 붕당이 형성되기도 했다. 곽재우는 그 중에서도 남명 조식(曺植)의 학풍이 강했던 지역인 의령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현풍이고, 자는 계수(季綏)이며,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곽위(郭瑋)의 증손으로, 조부는 곽지번(郭之藩), 아버지는 곽월(郭越), 어머니는 진주 강씨이다. 외조부 강승두는 의령군 유격면 세간리 일대에 대대로 거주해 온 부호였다. 곽재우의 부친은 이곳으로 이사하여 용연정을 짓고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고 곽재우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곽재우는 16세에 김행의 딸과 결혼했다.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되었으며, 김우옹(金宇顒)과는 동서 사이가 되었다. 그는 처외조부인 조식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유학경전 뿐 아니라 천문과 지리, 무예서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는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했으나 지은 글이 선조의 뜻에 거슬린다 하여 며칠 만에 합격이 무효가 되었다. 이후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포기하고 고향에 내려와 평생을 은거하기로 마음먹었다.

3 임진왜란 발발과 곽재우의 활동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조선의 관군이 일방적으로 패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곽재우는 4월22일 자신의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7월에 유격찰방에 임명된 후 곧 형조좌랑에 올랐다. 10월에는 절충장군이라는 관품으로 승진하였고 조방장에 임명되었다.

곽재우가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수가 적었다. 그러나 재산을 털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병사들의 가족까지 돌보았고 오직 나라를 구하기 위한 마음으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자 곽재우를 따르는 의병들은 점점 늘어나서 천 여 명에 이르렀다.

자신을 따르는 의병의 수가 늘어나자 전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참모를 선정하고 명령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삼가대장에는 윤탁(尹鐸), 도총에는 박사제(朴思齊), 수병장에는 오운(吳澐), 이운장, 선봉장에는 배맹신과 심대승 등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의병은 조선의 정규군이 아니었다. 장수나 지방관이 아닌 자가 군사를 거느리는 일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당연히 관아에 있는 곡식을 취해서도 안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직한 성품의 곽재우가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를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다 하여 맹비난 하자 둘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 갈등은 김면(金沔)과 김성일(金誠一)이 중재하였다. 조정에서는 김성일을 김수와 교체했고, 김성일은 곽재우의 활동을 지지해주었다.

곽재우는 성에 들어가서 백성들과 함께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하기보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하는 유격전, 혹은 복병전을 선호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 하여 아군 뿐 아니라 적에게도 위엄을 보이고, 홀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거나 위장 전술을 펴거나,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그의 뛰어난 전술적 능력과 함께 자신의 거주지인 낙동강 근방의 지리를 꿰뚫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출귀몰한 그의 전술은 일본군을 더욱더 겁에 질리게 했다. 정암진에서 안코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의 부대와 접전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현풍, 창녕, 영산에서의 전투를 통해 지역을 회복했다. 뿐만 아니라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전투(第1次 晋州城戰鬪)에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경상우도지역의 백성들은 그의 활약 덕분에 평시와 같이 농사를 짓고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일본군의 전라도 지방 진출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593년(선조 26) 12월에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산성수축 등 방어태세 구축에 힘을 기울였다. 1595년(선조 28)에는 진주목사로 전임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1597년(선조 30) 강화교섭이 결렬되고 일본군이 재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비로소 조정의 부름에 응하여 경상좌도 방어사의 직임에 나아갔다. 현풍의 석문산성을 수축하던 중, 7월 재침이 시작되었고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방어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4 임진왜란 이후의 곽재우

전쟁이 끝난 후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그를 중요한 자리에 임명하였으나 적극적으로 임하기를 꺼렸다. 1599년(선조 32) 9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 부임했다가 이듬해 그만두었다. 이 문제로 조정의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이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에 들어가 곡식을 먹지 않고 솔잎만 먹고 살다가 망우정이라는 집을 짓고 여생을 보내기로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가 곡식을 먹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한다는 사실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실록 편찬 작업에 참여한 사신은 곽재우 역시 세상을 걱정하여 그 같은 행동을 한 것이며, 이를 비판의 근거로 삼아 그를 파직한 것은 오히려 곽재우가 바란 바가 아니겠느냐며 탄식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전화(戰禍)를 복구하기 위해 노력하던 나라의 부름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지방관이나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에 임명하였으나 곽재우는 대개 벼슬에 잠시 나가더라도 곧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벼슬을 멀리했던 것은 그의 활약이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명망이 있던 의병장들은 세상으로부터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이산겸, 김덕령(金德齡), 최담령과 같이 억울하게 희생되기도 했다. 누구보다 높은 전공을 올렸던 곽재우는 이에 커다란 회의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곽재우의 묘지는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다. 죽은 뒤에 그의 사당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망우집](忘憂集)〉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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