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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光海君]

격변기를 헤쳐나간 성군인가? 폐모살제의 폭군인가?

1575년(선조 8) ~ 1641년(인조 18)

광해군 대표 이미지

남양주 광해군 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탄생과 세자책봉

광해군은 조선의 15대 임금으로 1575년(선조 8) 음력 4월 26일 선조[조선](宣祖)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琿)이고, 어머니는 후궁이던 공빈 김씨(恭嬪金氏)였다. 선조의 정비(正妃)는 의인왕후(懿仁王后)였지만 자식이 없었다. 아홉 명의 후궁에게서는 열세 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공빈 김씨가 낳은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이 장남과 차남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장자인 임해군이 왕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러나 임해군의 성질이 사나워, 세자에 오르고 왕위를 계승한 것은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에게 있어서 생모인 공빈 김씨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공빈은 광해군을 낳은 지 삼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을 낳은 이후 시달려온 출산 후유증이 원인이었다. 또한 선조의 총애를 받아왔던 공빈 김씨는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는 그렇지 못한 신세였다. 병세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인빈 김씨(仁嬪金氏)로 인해 선조의 총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외롭게 세상을 떠난 생모의 처지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기회가 적었던 광해군 스스로의 그리움과 합쳐지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발전하였다.

왕위에 오른 이후 여러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궁에 불과했던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격상시켜 명나라의 재가를 얻고, 이를 바탕으로 종묘(宗廟)에 생모의 위패를 모시도록 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효심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효심은 광해군이 왕세자로 책봉되고 왕위에 오르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을 인용하여 광해군이 세자가 되는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를 소개하였다. 선조가 시험 삼아 여러 왕자에게 묻기를, "반찬 중에서 무엇이 으뜸이냐?" 하니, 광해가 대답하기를, "소금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소금이 아니면 온갖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자, 임금이 또 묻기를, "너희들이 부족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냐?" 하니, 광해가 말하기를, "모친이 일찍 돌아가신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대답을 기특하게 여겼다. 광해가 세자가 된 것은 순전히 이 말에 힘입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광해군의 효심이 선조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짐작할 수 있고, ‘소금’을 반찬 중의 으뜸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지혜로웠음도 알 수 있다. 광해군의 총명함과 학문을 좋아하였음은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수록된 『정무록(丁戊錄)』에서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세자를 정하지 못하여 여러 왕자의 기상을 보려고 앞에다 보물을 성대하게 진열해 놓고 마음대로 취하도록 하니, 여러 왕자가 서로 다투어 보물을 취하는데 유독 광해군만은 붓과 먹을 가지므로 임금이 기이하게 여겼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총명하고 학문에 힘썼던 점은 광해군이 세자가 되는데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며, 광해군이 조선시대 군주 가운데 가장 총명한 군주 중 하나였다는 세간의 말들도 아마 이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광해군이 열여덟 살이 되던 해인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그리고 보름만인 4월 28일 문경새재를 지키고 있던 최후의 보루, 신립(申砬)장군마저 탄금대(彈琴臺) 전투에서 참패하고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군이 서울로 입성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너도나도 피난길에 올랐고,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국왕 선조를 위시한 조정도 파천, 즉 피난을 준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부승지 신잡(申磼)이 종묘사직의 미래와 민심수습을 위해 왕세자를 책봉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였다.

불과 1년 전에는 권력의 정점에 있던 정철(鄭澈)이 후계자 논의를 꺼냈다가 실각한 일이 있었는데, 전란이라는 급박한 상황 때문에 이번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누가 왕세자로 적당한지에 대한 선조의 물음에 대해서 어느 누구하나 쉽게 대답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선조가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그를 세워 세자로 삼고 싶은데 경들의 뜻에는 어떠한가?”라고 묻자 신하들은 그 말에 전폭적으로 동의하였다. 만 하루도 되지 않는 빈약한 논의 과정과 몇몇 신하들의 동의만으로 광해군이 왕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화려한 책봉의식도 없이 광해군은 왕세자가 된 다음날인 30일 새벽 경복궁(景福宮)을 나와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2 전란 중 눈부신 활약과 광해군의 취약한 입지

한양을 떠나 의주까지 피난하게 되면서 권력의 중심이 행재소가 있는 국토의 서북쪽 끝, 의주로 옮겨지게 되자 한반도 전체가 구심점을 잃은 형국이었다. 조정이 유지되고 있는지조차 의심하는 백성들이 있는 상황에서 선조는 국왕의 권력을 왕세자에게 나누어주어 평안도와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등지를 다니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분조(分朝), 말 그대로 조정을 둘로 나뉘는 특단의 조치가 취해졌다.

1610년(광해군 2), 아버지 유홍(兪泓)과 함께 광해군을 수행했던 유대조(兪大造)가 올린 상소문의 일부를 보면 광해군은 분조를 맡아 노숙까지 할 정도로 고생도 많이 하였고, 한양 이북지역에 국한된 활동이었지만, 분조활동을 계기로 조정이 여전히 굳건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백성들이 다시 결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반해 친형 임해군은 함경도로 들어가 근왕병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잘 수행하기는커녕 국경인(鞠景仁)의 반란 때 사로잡혀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졌다. 전란의 와중에 송환협상까지 하게 만든 임해군과 광해군의 활약은 자연스럽게 대비될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보내왔지만 계속해서 조선에게 일본과 화친할 것을 압박하였다.

사실 임진왜란 초반 불리했던 전세는 명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부터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화포로 무장한 명군은 1593년 1월 9일 평양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크게 물리쳤고, 개성을 탈환하여 한양으로부터 일본군이 물러나게 하였다. 하지만 명은 일본군과 전쟁을 계속하기보다는 강화협상을 통해서 문제를 매듭짓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대승을 거둔 권율(權慄)이 이후 명나라의 허락 없이 전쟁했다는 것을 이유로 벌주려 하기도 했다.

선조와 조선 조정이 명이 주도하는 강화 협상에 반발하자 명에서는 왕위 교체론을 흘리면서 선조를 압박하였다. 1593년 10월 조정이 서울로 돌아오는 시점을 전후로 하여 광해군의 자질과 능력을 한껏 칭찬하면서 선조를 대신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의 군사관계 업무를 총괄토록 하라고 종용하였던 것이다.

결국 광해군은 윤 11월 19일부터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 호조판서 한준(韓準), 공조판서 김명원(金命元) 등 세 판서가 소속된 ‘무군사(撫軍司)’를 이끌고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병력모집과 훈련, 군량수집의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듬해 8월 광해군이 서울로 귀환한 이후로도 명에서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사관계 업무를 광해군에게 계속 주관토록 하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1595년 3월 27일 명의 황제가 보내온 칙서에서 광해군에게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군무를 총괄하도록 명령하였다. 더욱이 국왕에게 보내야 할 황제의 칙서가 세자인 광해군 앞으로 되어 있었고, ‘부왕의 실패를 만회하라’는 말로써 노골적으로 선조의 실정을 언급하였다.

이처럼 원병으로서의 명과 전쟁의 직접적 피해자로서의 조선의 입장이 충돌할 때, 명은 광해군을 언급하면서 선조를 압박하였고, 임진왜란 동안 15번이나 선조는 광해군에게 양위하겠다는 말을 꺼내면서 이런 압박을 타개하였다.

이런 상황이 곤혹스러웠던 것은 광해군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두둔하던 명은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는 광해군이 맏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왕세자로 승인해달라는 조선의 요구를 매번 거부했다. 오히려 임해군을 원상복귀토록 하고 광해군에게는 분수를 지키라고 하여, 광해군에게 왕세자를 내어놓고 물러나라는 요구를 해왔다.

3 어려웠던 즉위과정

1606년 선조가 새롭게 정비로 얻은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선조가 얻은 첫 번째 적자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이었다. 실제로 당시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경우 영창대군 탄생 이후 광해군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1607년 선조가 병석에 눕게 되고 회복이 어려워 보이자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기고 섭정하도록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유영경이 이에 대해 반발하였고, 광해군의 섭정을 지시한 선조의 비망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숨기고 공개하지 않았다.

1608년 초 광해군과 유영경의 싸움을 보고 있던 산림(山林)이자 의병장 정인홍(鄭仁弘)이 이러다가는 “어진 아들(영창대군)을 두고도 장차 보호하지 못하겠습니다.”라는 험한 말까지 하면서 유영경을 처단하고 광해군에게 양위하라는 상소를 올려 조정의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하지만 선조는 도리어 상소를 계기로 사직을 청한 유영경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상소를 올린 정인홍과 그와 입장을 같이하던 이이첨(李爾瞻), 이경전(李慶全) 등에게는 귀양 명령이 내려졌다.

정인홍의 상소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2월 1일 선조가 병세 악화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광해군에게 남긴 유언장에서는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 인목왕후도 선조가 승하한 다음날인 2월 2일, 광해군을 새 군주로 즉위시켜 주었다.

선조에게 광해군을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귀양길에 오른 정인홍과 이이첨 등은 하루아침에 광해군 즉위에 일등공신의 입장이 되었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오래도록 명으로부터 세자책봉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자 영창대군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권력의 기반이 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인홍은 경상우도의 대학자인 조식(曺植)의 수제자라는 배경이 있었으며, 학문과 행실을 인정받아 조정에 초빙된 이후에도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큰 활약을 하였다.

이런 정인홍은 광해군에게 있어 최고의 공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산림’으로서 광해군의 정치적 기반을 넓혀줄 소중한 존재였다. 이런 광해군과 정인홍 사이를 매개한 인물이 이이첨이었다. 이이첨은 별다른 학연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고, 광해군과 정인홍을 적극적으로 매개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대북파가 강력한 권력을 쥐었지만, 광해군으로서는 왕권의 기반이 약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국의 안정이 절실하였다. 이에 당파를 불문하고 인재를 등용하고자 했다. 이로써 남인 이원익(李元翼)이 영의정에 오르고, 이항복과 이덕형(李德馨)에게 비변사를 이끌게 함으로써 국방 업무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이들에 대한 광해군의 신임을 바탕으로 서인과 남인의 소장파인 이귀(李貴), 김류(金瑬), 정경세(鄭經世) 등도 조정 내부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광해군이 당파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었기에 정국은 안정되었고 국가 기반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킬 방책들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606년 5월 경기도 지역에서 시행된 대동법(大同法)이었다. 시행초기 “널리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법”이라고 불린 대동법의 시행으로 백성들은 과도한 공물 납부의 짐을 덜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동의보감(東醫寶鑑)』(1613년)과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1617년)가 간행되었다. 이후 최고의 의서로 추앙받은 『동의보감』이 간행됨으로써 백성들은 더 이상 비싼 중국산 약재가 아닌 조선의 약재로 병을 고칠 수 있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 부모에 효도하고 여성으로서 절개를 지키고 국가에 충성하기 위하여 죽은 수백 명의 백성들에게 정문(旌門) 조치를 해준 것이었다. 전란동안 의롭게 죽은 이들에 대해 국가가 관심을 갖고 상을 내려줌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상을 내려준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 내용을 정리하여 간행한 책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였던 것이다.

4 연립정권의 붕괴와 이어진 역모사건

1610년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다섯 현인의 위패를 문묘(文廟)에 모시도록 한 것에 대해 정인홍이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자신의 스승인 조식이 빠진데다가 스승의 사상을 ‘도가에 가깝다’고 평가 절하한 이황이나 ‘척신정치기에 벼슬이나 탐했다’고 생각하는 이언적의 문묘 종사를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고 격하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 일을 보통 ‘회퇴변척(晦退辨斥)’이라 하는데, 이를 계기로 직접 연관이 있던 남인은 물론이고 서인까지도 정인홍을 공격하였다. 성균관에서는 유생명부인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지워버리기까지 했다. 차츰 붕당 간의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갈등과 대립이 지속되던 중 1612년 2월 역모사건이 불거졌다. 국왕의 도장을 위조하였다 붙잡혀 온 김제세가 김직재(金直哉)와 그 아들 김백함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했고, 이들을 조사하자 순화군(順和君)의 장인인 황혁(黃赫)이 역모를 꾀하여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晋陵君)을 국왕으로 추대하려 한다고 진술하였다. 역모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진술을 통해 거명된 인물이 늘어나면서 조정 신료들까지도 줄줄이 연루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형을 받거나 쫓겨나게 되었는데 대부분 서인이나 남인들이었다. 반대로 북인들은 조정에서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특히 광해군의 외척인 유희분(柳希奮) 등 소북파에게도 밀리고 있던 이이첨 등의 대북파가 정치적으로 역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다음해인 1613년 4월에는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게 된다. 소위 ‘칠서(七庶)’로 불리던 박응서(朴應犀), 박치의(朴致毅), 서양갑(徐羊甲), 심우영(沈友英), 허홍인, 김평손, 김경손 등 명문가 서자들이 서얼금고 폐지가 거부되자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화적질을 하던 중 문경 새재를 넘던 상인을 죽이고 은을 빼앗은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소위 은상 살인사건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강력범죄사건이었는데, 이이첨과 김개(金闓), 김창후 등이 한희길(韓希吉), 정항 등과 모의하여 거짓자복 등으로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역모사건으로 비화시켰다. 일당들에 대한 심문에서 역모사건의 우두머리가 영창군의 외조부이자 인목대비의 생부인 김제남(金悌男)이라는 말이 나왔다.

김제남이 역모의 주모자로 몰리면서 그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사건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고, 이정구(李廷龜), 김상용(金尙容), 서성(徐渻), 한준겸(韓浚謙) 등 서인과 남인의 중진들이 공모여부 등을 조사받은 뒤 풀려나거나 유배되었다. 결국 수많은 서인과 남인들이 쫓겨나 실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선조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광해군을 아들로 삼았던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유릉(현재는 목릉(穆陵))에 무당을 보내어 주술을 행한 일이 밝혀졌고 저주 행위로 간주되었다.

결국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다. 영창대군은 일반인 신분으로 강등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인목대비에 대해서도 ‘종사에 죄를 얻어 전하와의 모자관계가 이미 끊어졌다’는 요지로 대북파의 상소가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폐모논의가 시작되었다. 결국 인목대비는 서궁으로 옮겨져 사실상 감금되었다.

계축옥사를 기화로 광해군이 직접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죄 없는 동생을 죽이고, 왕실에서 어머니에 해당되는 인목대비를 쫓아내려고 했기 때문에 유학의 기본윤리인 형제간의 우애나 부모에 대한 효를 저버린 책임이 모두 광해군에게 돌아갔고, 이후 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그리고 권력이 이이첨과 대북파에게 과도하게 쏠리게 되어 겉으로는 정리된 모습이었지만, 권력 외부로 밀려난 서인과 남인들이 속으로 반격을 꿈꾸는 더욱 불안한 상황으로 치달아 가고 있었다.

5 권위 강화에 매달리다

광해군이 권위를 높이는 데 집착한 것은 신하들로부터 받은 존호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광해군은 역모사건을 진압할 때마다 존호를 받았다. 재위기간 중 총 여섯 차례 존호를 받았는데 처음 받은 것은 ‘체천흥운준덕홍공(體天興運俊德弘功)’이란 여덟 글자였는데 횟수를 거듭하면서 늘어나 최종적으로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이라는 48자로 늘어났다. 조선의 역대 왕들이 재위 중에 받은 존호 가운데 가장 긴 것이었다.

미신에도 쉽게 흔들렸고, 특히나 궁궐을 짓는데 너무나 많은 힘을 쏟았다. 종묘의 중건을 마치고 선조가 시작한 창덕궁(昌德宮) 중건사업을 마친 것까지는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국왕이 제대로 거처할 궁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수에 집착한 광해군은 가까이 하던 술사들이 서울의 기운이 쇠하였으므로 교하로 천도해야 한다고 하니 천도를 검토한 바 있고, 광해군 스스로도 ‘두 번이나 큰 일(노산군과 연산군이 폐위된 사건)을 겪은’ 창덕궁 중건은 해놓고도 머무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 또한 도성의 기운이 빠졌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대신들의 반대로 천도가 이루어지지 못하자 광해군은 창덕궁에 머물지 않기 위해 창경궁(昌慶宮)으로 옮기겠다는 명분으로 창경궁 중수를 지시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불타버린 경복궁은 다시 짓지 않으면서 성지(性智) 등이 인왕산 아래가 길지라고 하자 새 궁궐인 인경궁(仁慶宮)을 짓기 시작하였다. 인경궁이 완성도 되기 전에 돈의문(敦義門) 안에 경덕궁(후에 경희궁(慶熙宮)으로 불림)을 지었는데 원종[조선](元宗 : 인조의 아버지)의 사저가 있던 자리에 왕기가 있다는 설 때문이었다.

물론 계속된 궁궐 건설이 운수에 집착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란을 거치면서 왕실의 체면은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다. 서울을 비운 사이 제대로 왕이 거처할 만한 공간은 남아있지 못한 상태였고, 선조는 그나마 창덕궁의 중건을 마치지도 못하였다. 광해군 스스로도 국왕으로서의 지위가 즉위할 때부터 위태로웠던 터라 웅대한 궁궐을 건설하면서 체면을 되살리고 위엄을 얻으려는 마음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이 지은 수많은 궁궐은 그의 권위를 높여주지도 왕위를 지켜주지도 못했다. 전란이후 어려운 경제사정 속에서 경복궁의 10배 규모인 경덕궁과 창덕궁과 규모가 비슷한 인경궁을 동시에 건설하는 것은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재원마련이 필요하였기에 궁궐 비용을 기부하면 일반인들도 당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죄인들도 은을 내고 면죄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도사와 독운별장이라는 특별 어사를 지방에 파견하여 재정 확보와 자재 수급에 열을 올렸다. 이러한 조치는 백성들을 수탈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었고, 권위를 높이기 위해 궁궐건설에 열을 올리면 올릴수록 조정에 대한 불만만 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6 여진족 성장과 명의 원병 요구

당시는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 집단이 성장하면서 주변 국가를 압박하는 형국이었다. 이미 임진왜란 이전 건주여진 대부분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명이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주변 세력을 공략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강성해진 누르하치는 의주로 피난 온 조선 조정에게 사람을 보내 원병을 보내겠다고 제의하기까지 하였다. 독자적인 문자도 만들고 건주국이라는 나라이름도 붙이면서 누르하치 집단의 독자행동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지만, 예전처럼 명나라는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누르하치 세력이 날로 강성해 짐에 따라 다시 전운이 감돌게 되었다. 이런 군사적 긴장상태 속에서 광해군이 취한 대책은 정보의 수집이었다. 부왕 선조도 누르하치 세력에 대한 정보를 얻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를 작성하게 하는 성과도 있었는데, 광해군은 이러한 점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실제 전투가 벌어질 것을 대비하여, 수시로 군사훈련을 하도록 했으며, 우수한 장수와 병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의병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곽재우(郭再祐)를 북병사로 발탁하였고, 변방 수령 대부분을 무인으로 임명하였다. 내수사(內需司) 소속 노비를 정식군인으로 선발하고 승군을 정비한 것들도 모두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무기 생산에도 관심을 가져 1613년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확대 개편했고, 파진포(破陣砲)라는 신무기도 생산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왜란 중 위력을 발휘한 일본의 조총과 장검을 도입하기 위하여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서 비밀리에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함락시키면서 명과 직접적으로 충돌을 하게 되자, 명은 조선에도 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다. 명이 조선에 병사를 요구하면서 내건 명분은 ‘재조지은’이었다. 조선이 원병을 보내는 것은 왜란으로 인해 나라가 무너질 뻔했으나 군대를 보내 구원케 한 황제 즉 명의 은혜에 보답하는 일이라는 논리였다. 광해군은 일단 맨 처음 당도한 문서가 황제가 보낸 것이 아니라 명의 병부와 요동도사라는 것을 문제 삼으며 원병 요구를 거부하고, 여러 사신들을 보내 어려운 조선의 처지를 호소하면서 군대 요청요구를 우회적으로 거부하였다.

하지만 비변사의 신료들은 ‘재조지은’에 대한 보답과 춘추대의를 이유로 원병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광해군의 가장 큰 정치적 파트너라고 할 수 있는 이이첨 등 대부분의 대북파도 원병 수락을 주장하였다. 일부 측근을 제외하면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조정 내에서 광해군의 지지자는 없는 셈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자 했다.

그러나 황제가 직접 군대를 파견하라는 문서를 보내왔고, 결국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임명하여 1만의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하지만 후금과의 전투는 너무나도 싱겁게 끝나버렸다. 명군은 후금군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조선군과 후금군이 싸울 때는 이미 명군은 전멸한 상태였다.

후금군 쪽에서 역관을 보내 접촉해 왔고, 도원수 강홍립은 출병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하면서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적에게 투항하였다. 조정 안팎으로 강홍립을 비난하고, 그의 가족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빗발쳤다. 투항이후 돌아오지 못하고 끝내 후금에게 억류되어 있었던 강홍립은 하지만 계속해서 후금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보내왔다.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후금과 싸운 전투는 ‘사르후 전투’로 불리는데, 명청교체의 분수령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명은 끊임없이 조선에 재징병 요구를 해왔다. 조선의 원군이 필요하기도 했거니와 조선이 후금 쪽으로 기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압박의 수단이었다. 광해군은 명의 재징병 요구에 대해서 거부입장을 분명히 했다. 조선은 평안도를 잘 지키는 것이 소위 명을 돕는 최선의 길이라는 논리로서 역공을 펼치기도 했다.

7 반정과 광해군의 몰락

1623년 3월 서인 일파의 주도로 반정이라 불리운 무력 쿠데타에 의해 광해군 정권은 전복되었다. 오래 전부터 이귀 일파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주장이 많았다. 하지만 광해군이 총애하던 상궁 김개똥이 그의 판단을 흐려놓은 탓이었는지 광해군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미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때를 놓친 상태였다. 12일 새벽 반정 세력의 기습으로 내시의 등에 업혀 탈출한 광해군은 “이이첨이 저지른 짓이 아닌가?”라고 물을 정도로 사태파악을 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대북파와의 사이도 멀어진 상태였다.

불과 천 여 명에 불과한 반정 세력의 병력으로 광해군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3월 13일 광해군과 그의 아들을 찾아냄으로써 반정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반정성공과 함께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벌어졌다. 대북파의 핵심인물들이 처형되었고, 이이첨, 정인홍 모두 처형되었다. 이외의 대북파들 대부분이 처형되거나 유배, 투옥되었고, 소위 죄질이 미약한 자들은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평안감사 박엽(朴燁)과 의주부윤 정준(鄭遵)도 처형되었다. 광해군의 의중을 받들어 대외정책을 일선에서 실천했던 인물들로 명을 의식한 조처였다.

과연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의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폐모살제’였다. ‘어머니’의 위치에 있던 인목대비를 대비의 자리에서 끌어내렸으며,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은 강상윤리를 저버린 군주였다. 둘째 궁궐건설을 비롯한 수많은 토목공사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사직이 위기에 처하게 했다 셋째 명에 대한 사대를 소홀히 하고 후금과 밀통하여 명을 배신한 군주였다는 것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대의명분이었다.

하지만 권좌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명이 다할 때까지 19년이나 더 살다가 1641년 7월 1일 67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그 사이 반정직후 왕세자였던 아들 이지(李祬)가 거사를 위하여 연금된 주택을 빠져 나오기 위해 땅굴을 파고 탈출하던 중 발각되어 인조의 명령에 따라 자진했고, 세자빈이었던 며느리도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것을 목도해야 했다. 곧바로 왕비였던 부인마저 세상을 떠난다. 딸이 남기는 했지만, 혼자나 다름없었던 광해군은 반란군과 연결을 우려하여 태안이나 제주로 유배지를 옮겨 다녀야 했다. 더 이상 왕이 아닐 뿐만 아니라 죄인이었던 광해군에게 심부름하는 계집종마저도 면박을 주었다고 하니 반정이후 19년이란 세월을 더 산 것은 그에게는 어쩌면 모진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광해군이 권좌에서 밀려난 것은 분명 그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밖에는 없지만 그가 저지른 수많은 과오만큼이나 대동법 시행, 『동의보감』 반포 등등 훌륭한 업적도 많이 남긴 임금이었다. 또한 임진왜란 중 왕실의 일원이자 왕세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펼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왕세자로서 실력이 아닌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꼬리표가 끝내 광해군의 발목을 잡았다. 오히려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한 무리수들로 인해 반정의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꼴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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