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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權近]

명 태조를 감복시킨 문장가

1352년(공민왕 1) ~ 1409년(태종 9)

권근 대표 이미지

권근 응제시주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가문과 가족 관계

권근(權近, 1352∼1409)은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초명(初名)은 진(晉), 자(字)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號)는 양촌(陽村)이다. 아버지는 검교정승(檢校政丞) 권희(權僖)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재상을 역임한 한종유(韓宗愈)의 딸이다.

안동 권씨는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명족(名族) 중 하나였다. 안동 권씨의 시조 권행(權幸)은 원래 김씨였으나,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후백제군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워 태조로부터 권씨 성을 하사받았고, 안동 권씨는 안동 지역의 향리직을 세습하였다.

이후 권행의 10세손인 권수평(權守平)이 13세기 초반 개경으로 올라와 관직에 진출했고, 그의 후손들은 계속 중앙의 관료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권수평의 4세손인 권보(權溥)가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아 고위직에 올랐고, 또 본인과 아들·사위 등 일가의 9명이 모두 군(君)에 봉해지면서 안동 권씨의 가세가 급격히 성장하여 명족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권근은 권보의 증손자이다.

권근은 1352년(공민왕 1) 11월에 권희와 청주 한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증조부 권보와 그의 사위 이제현(李齊賢) 등으로 이어지는 안동 권씨의 가학(家學)을 통해 학문의 기초를 닦은 권근은 1368년(공민왕 17)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였다. 당시 성균관에는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박상충(朴尙衷)·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교수진으로 있었으며, 권근은 이들에게 수학하면서 학문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권근은 1371년경에 고성 이씨(固城李氏) 이강(李岡)의 딸과 첫 번째 혼인을 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하지만 고성 이씨는 1383년 1월 30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하였다. 이에 권근은 이듬해인 1384년 경주 이씨(慶州李氏) 이존오(李存吾)의 딸과 재혼했으며,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낳았다.

2 고려 말의 활동

권근은 18세 때인 1369년(공민왕 18)에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春秋館)의 검열(檢閱)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1389년(공양왕 1)까지 약 20년 동안 고려 조정의 관료로 활동하였다.

그는 주로 예문관(藝文館)·춘추관·성균관 등 교육과 문한(文翰) 관련 직책에 종사하였으며, 특히 1373년(공민왕 22) 12월에 지제교(知製敎)애 임명된 이래로 1388년(우왕 14)까지 이 직책을 겸직하면서 각종 국왕 문서의 작성을 전담하였다.

1375년(우왕 1) 5월, 당시 실권자였던 이인임(李仁任) 등이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이하여 북원과의 외교 관계를 재개하려 하자 권근은 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상소를 올린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방으로 유배됐는데, 권근만은 유배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이후 관직 생활을 계속 유지하였다. 권근의 「졸기(卒記)」에는 당시 반대 상소에 참여했던 인물 중 권근이 가장 여렸기 때문에 처벌에서 제외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382년(우왕 8) 11월 권근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임명되어 약 1년 간 간관(諫官)으로 활동하였다. 이 기간 동안 권근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려 당시 고려 정치·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우왕(禑王)에게 국정 운영에 충실히 임할 것을 촉구하였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실권을 장악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세력은 1389년(창왕 1) 조준(趙浚)의 주도 하에 사전개혁(私田改革)을 추진하였다. 이에 1389년(창왕 1) 4월 도당(都堂)에서 사전개혁의 문제를 논의했는데, 이때 권근은 스승 이색 등과 함께 사전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1389년(창왕 1) 6월 권근은 새로 즉위한 창왕(昌王)이 명나라에 직접 조근(朝覲)할 것을 청하는 사신단의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사행(使行)을 다녀왔다.

권근의 문집인 『양촌집(陽村集)』 권6에 수록된 〈봉사록(奉使錄)〉은 당시 사행에서 권근이 보고 듣고 경험한 내용들을 시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1389년(창왕 1) 10월 사행에서 돌아온 권근은 대간의 탄핵을 받고 있던 동료 학자 이숭인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간으로부터 ‘이숭인의 편당(偏黨)’이라는 탄핵을 받아 황해도 우봉으로 유배되었다. 이어 같은 해 12월에는, 권근이 사행 과정 중에 명나라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미리 뜯어본 후 그 내용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우왕의 장인인 이림(李琳)에게 먼저 알려준 것이 발각되어 경상도 영해(寧海)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당시 예부의 자문에는 우왕을 신돈(辛旽)의 아들로 규정함으로써 창왕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후 권근은 흥해(興海)·청주(淸州)·익주(益州) 등으로 옮겨 다니며 유배 생활을 하였다. 익주 유배 시절에는 인근 지역의 학자들이 권근에게 성리학을 배우기 위해 많이 찾아왔다. 이에 권근은 초학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성리학 입문서를 찬술했는데, 그것이 바로 『입학도설(入學圖說)』이다.

1390년(공양왕 2) 11월 권근은 유배에서 풀려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게 되자 충주 양촌(陽村)으로 내려가 1393년(태조 2) 조선에 출사할 때까지 이곳에서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와 교육·저술에 전념하였다. 특히 그는 이 기간 중에 오경(五經)에 관한 자신의 연구 성과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편찬했는데, 그 결과물이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이다.

『오경천견록』 중에서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을 제외한 나머지 4경의 천견록은 양촌 은거기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며, 『예기천견록』은 미완 상태로 남아 있다가 1406년(태종 6)에 최종 완성되었다.

3 조선 초의 활동

1393년(태조 2) 2월 태조는 새 도읍지의 후보지를 살피기 위해 계룡산으로 행차했다가, 양촌에 은거하고 있던 권근을 불렀다. 왕명을 받고 행재소에 나온 권근은 환왕(桓王)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올렸으며, 이어 3월에 태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 검교예문춘추관태학사 겸 성균대사성(檢校藝文春秋館太學士兼成均大司成)에 임명되면서 조선 왕조에 출사하였다. 권근은 조선에서도 고려 말과 마찬가지로 성균관·예문관 등 교육·문한 관련 관서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1396년(태조 5) 6월 권근은 표전(表箋) 문제의 해결을 위해 명나라에 사행을 다녀왔다. 표전 문제는 명나라가 1395년(태조 4) 10월에 조선에서 파견한 신년(新年) 축하 사신단이 올린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에 무례하고 경박한 문구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사신단을 억류하고 표전문의 찬자인 정도전을 압송할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이에 조선에서는 정도전은 표전문 찬술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표전 찬술에 간여했던 권근과 김약항(金若恒)·정탁(鄭擢) 등을 대신 보냈다.

1396년(태조 5) 7월 명나라에 도착한 권근은 명 태조(明太祖)에게 표전 사건의 경위를 잘 해명함으로써 양국 간의 외교적 마찰을 종식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뿐만 아니라 권근은 명 태조가 내린 시제(詩題)에 대해 응제시(應製詩) 24편을 지어 올림으로써 명 태조로부터 “학문이 노련하고 성숙하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더불어 명 태조의 어제시(御製詩) 3편을 하사받았다. 또, 3일 동안 수도 남경(南京)을 유람했으며 명나라의 태학(太學)인 문연각(文淵閣)에서 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 등 당시 명나라를 대표하는 학자들과 교유하면 학문을 토론하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이는 권근의 학문이 한 단계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 한편으로 응제시를 짓고 어제시를 받은 일로 인해 권근의 학문적 명성은 국내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397년(태조 6) 3월 사행을 마치고 귀국한 권근은 같은 해 12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 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권근은 자신이 비록 개국에 직접적인 공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개국 이후 각종 표문과 교서 등을 찬술했고 명 사행을 통해 표전 문제를 해결했으므로 원종공신에 들어갈 만한 자격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에 태조는 권근을 원종공신에 추가로 책록했으며, 이듬해 3월에 원종공신 녹권(錄券)을 내려 주었다.

1398년(태조 7) 7월 제1차 왕자의 난(王子-亂)이 일어나 그동안 정부의 실권을 행사했던 정도전이 살해되고 태조의 다섯 째 아들인 이방원(李芳遠, 후의 태종)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은 권근의 정치적·학문적 위상과 중요성이 이전보다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 원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로, 권근의 학문적 입장이 태종[조선](太宗)의 정치적 지향과 부합했다는 점이다. 권근은 『오경천견록』 등의 저술을 통해 국왕권의 강화와 군신(君臣) 간의 엄격한 위계질서 확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피력했는데, 이는 국왕이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가고자 했던 태종의 입장과 맥을 같이 하였다. 이에 태종은 권근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학문적·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그를 중용했던 것이다. 둘째로, 권근은 개국 초기에 정도전과 쌍벽을 이루었던 당대 최고의 학자였으며, 성리학 이론의 측면에서는 정도전보다도 더 뛰어난 인물이었다. 따라서 정도전이 실각한 상황에서 조선의 학계를 이끌어 갈 능력을 갖춘 인물은 권근이 유일했으며, 그 결과 권근은 태종대 관학(官學) 교육을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할 때, 태종 집권기 권근의 활동은 태종의 정책을 학문적·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과 유생교육 및 교육제도 정비를 통한 관학 육성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전자를 대표하는 것으로는 사병혁파의 주도를 들 수 있다. 권근은 1400년(정종 2) 3월부터 11월까지 사헌부 대사헌으로 재직했는데, 이 기간 중에 권근은 절제사(節制使)를 폐지와 모든 군병을 중앙 군영에 소속시키는 것으로 골자로 하는 사병혁파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태종의 사병혁파 추진에 대해 이거이(李居易)를 비롯한 여러 공신들이 불만을 표출하자, 권근은 사헌부의 수장으로서 이들을 탄핵하는 상소 활동을 주도해 나갔다. 이는 태종의 국왕권 강화 추진에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다음으로 관학 육성과 관련한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권학사목(勸學事目)」의 제정이라고 할 수 있다. 권근은 1407년(태종 7) 3월 상소를 올려 관학 진흥을 위한 「권학사목」 8개 조항을 건의하였다.

「권학사목」은 권근의 학문관과 교육관이 집약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과거제도에 관한 내용이다. 먼저 권근은 문과(文科) 초장(初場)에서 경학(經學)을 시험할 때 경서(經書)를 암기하는 강경법(講經法)을 폐지하고 대신 경서의 중요 논점에 대해 논술하는 제술법(製述法)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중장(中場)에서는 실제 정책 운영에서 실용성이 있는 논(論)이나 표(表)를 짓는 것으로 시험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권근은 「권학사목」에서 『소학(小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학교 교육에서 『소학』을 가장 먼저 가르칠 것과 성균관 입학생 선발에서 『소학』을 필수 시험과목으로 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이와 같은 「권학사목」의 내용은 이후 조선 초기 관학 교육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이상과 같이 권근은 태종대의 관학을 주도하던 학자이자 관료로서 ‘태종 정권의 안정화’와 ‘관학의 제도 확립’이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그리고 정치적·학문적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관료로서의 지위도 상승하여,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었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으며, 관직도 찬성사(贊成事)에까지 올랐다.

한편, 권근은 조선 초기 최고의 학자라는 평가에 걸맞게, 앞서 언급했던 『입학도설』·『오경천견록』 외에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먼저 1402년(태종 2) 6월에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강목체(綱目體) 형식으로 재편집하고 자신의 사론(史論)을 추가한 역사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였다.

이어 1405년(태종 5)에는 『효행록(孝行錄)』을 주해(註解)·간행하였다.

『효행록』은 권근의 선조인 권보와 권준(權準) 부자가 중국의 효행 설화를 모아 편집한 것에 권보의 사위 이제현이 찬(讚)을 붙여서 편찬한 책인데, 권근이 이 책의 내용을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주석을 붙인 후에 간행한 것이다. 한편, 권근은 이상의 단독 저술 외에 수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그의 문집인 『양촌집(陽村集)』에 실려 있다. 『양촌집』은 분량이 총 40권으로 조선 초기 문집으로는 상당한 거질이다.

권근은 1409년(태종 9) 2월에 58세를 일기로 사제(私第)에서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1454년(단종 2)에 좌의정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추증되었다. 묘는 처음에 광주(廣州) 모노금동(毛奴金洞)에 마련하였다가 1444년(세종 26)에 충주 미법곡(彌法谷) 언덕(지금의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으로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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