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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奇大升]

퇴계와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하다

1527년(중종 22) ~ 1572년(선조 5)

기대승 대표 이미지

기대승 종가 소장 문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조선 정치와 학문의 발전을 선도한 학자

기대승은 조선 후기의 학자·관료이다. 호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 자는 자(字)는 명언(明彦)이다. 문헌(文憲)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기묘사림(己卯士林)의 후예로, 이황(李滉)과의 논쟁을 통해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끌어올렸으며, 사림(士林) 중심으로의 정치적 변화를 선도하였다.

2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16세기 전반 조선의 정치는 사화(士禍)로 얼룩졌다. 성종[조선](成宗)대 국가체제가 완비되면서 조선의 정치는 점차 안정되었다. 이러한 안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인 사림이 등장하여 성리학적 정치체제를 향한 개혁을 진행하고자 하였고, 당시 기득권 세력으로 분류되던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였다. 결국 스스로의 정체성을 훈구와 달리 규정한 이 집단은 이후 조선의 주요 정치세력으로 자리를 잡았으나 또한 큰 희생을 필요로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네 차례의 사화이다.

1498년(연산군 4) 김종직(金宗直)이 쓴 성종실록의 사초,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단이 되어 김종직의 문인 김일손(金馹孫)이 사형당한 것을 비롯하여,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이 처벌받았다. 이를 무오사화(戊午士禍)라 한다.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폐비 윤씨(廢妃尹氏)의 죽음과 관련된 자를 처벌한 것으로, 김굉필 등이 죽음을 당하고 이미 죽은 조위(曺偉), 정여창 등은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산군의 폭정에 반대하여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주동이 되어 중종[조선](中宗)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중종반정(中宗反正)이다. 중종은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기묘사림(己卯士林)을 중용하여 정치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조광조는 소격서(昭格署) 혁파, 현량과(賢良科) 실시 등을 통해 성리학적 정치 질서를 구현하려 하였으나, 반정공신(反正功臣) 녹훈 삭제 문제로 훈구파와 크게 대립하였고 결국 1519년(중종 14) 조광조와 김식(金湜), 기준(奇遵) 등 기묘사림이 화를 당하였다.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한다. 1545년(명종 즉위)에는 윤원형(尹元衡)과 윤임(尹任) 등 외척 세력의 대립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벌어졌다.

조선의 정치 질서는 점차 변화하고 있긴 하였으나 변화에 맞서는 훈구파의 반발로 수차례의 사화가 발생하여 변화를 주도한 사림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학자들은 철학적 고민에도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인간 심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 통치자의 도덕성에 주목, 정치 질서를 개혁하는 데에 보탬을 주고자 한 것이다. 기대승은 이러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기대승의 본관은 행주로, 가문 대대로 서울, 고양 등지에서 생활해 왔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무관직에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문관을 주로 배출하였다. 기대승의 숙부 기준은 기묘사화 당시 화를 입은 기묘사림의 일원이었으며, 부친 기진(奇進)은 동생이 화를 당하자 관직에 뜻을 버리고 전라도 광주에 내려와 은거하기 시작했다. 기준은 기묘명현 중 하나로 사림에게 널리 추앙되기 시작하여 인산서원(仁山書院), 충곡서원(忠谷書院), 문봉서원(文峯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이러한 그의 가문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도덕과 문장으로서 사림의 영수가 되었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기대승의 가문은 당시의 조선 정치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3 어려운 형편에도 학문에 몰두하다

기대승은 기진과 진주 강씨의 삼남 중 둘째로 1527년(중종 22) 11월 18일 전라도 광주 소고룡리 송현동 집에서 태어났다. 기대승은 일곱 살에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고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총명한 자질을 타고 났음에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일 새벽 잠에서 깨면 단정하게 앉아서 쉬지 않고 책을 읽었다. 누군가 위로하는 말로 힘들지 않느냐고 묻더라도 ‘저는 스스로 이것을 즐깁니다’하며 계속 독서에 집중하였다.

그러던 중 1533년(중종 28) 기대승의 나이 여덟 살에 모친 진주 강씨의 상을 당하였다.

모친을 잃은 슬픔에 그는 사람들이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애통하게 울부짖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자를 배출해 왔으나, 숙부가 젊은 나이에 화를 당하고 부친이 전라도로 옮겨 온 상태이기 때문에 살림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기대승의 모친이 온갖 고생을 하며 그들 형제를 키웠고 기대승 또한 어린 나이었지만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꿈은 입신출세하여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었으나 그 꿈이 무너진 것이다. 비통함에 빠진 그는 학문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기대승의 마음을 헤아린 부친 기진 또한 공부를 독촉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고난 학자의 자질 덕분일까. 기대승은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효경』 등의 경전을 읽기 시작하였다. 학업이 점차 진보하기 시작하자 기대승은 집에서 하는 공부에 한계를 느꼈다. 1537년(중종 32) 그는 향숙(鄕塾)에 나아가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학문은 점차 발전하여 대학, 서경, 논어, 주역, 자치통감강목 등의 고전을 두루 섭렵하였다. 1546년(명종 1) 20살의 나이로 기대승은 향시(鄕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22세 때에는 이씨 부인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1549년(명종 4)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551년(명종 6)에는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였으나 외척 윤원형이 기대승이 기준의 조카임을 알고 방해하여 낙방하였다. 1554년(명종 9) 그는 다시 동당향시(東堂鄕試)에 응시하여 장원의 영광을 얻었으나 이듬해 부친 기진의 상을 당하여 장례를 치루었다. 삼년상을 치루고 난 1557년(명종 12)까지 그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의 글을 주로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 편찬한 『주자문록(朱子文錄)』에는 『주자대전(朱子大全)』의 글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그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날로 깊어만 갔다.

4 논쟁, 조선 학계를 뒤흔들다.

1558년(명종 13) 7월 기대승은 당대의 이름난 학자 김인후(金麟厚)를 배알하였다. 이 때 그는 성리학 심성론의 주요 개념인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해 토론하였다. 특히 기대승은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에 관한 견해를 깊게 의심하여 이에 대해 김인후가 여러 조언을 해주었다. 또한 기대승은 이항(李恒)을 배알하고 태극도설에 대하여 논쟁하였다. 여기에서도 역시 이기(理氣)의 관계가 주된 주제가 되었다. 기대승의 견해는 당시 학계를 대표하는 대학자 이황의 논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대승의 의문은 조선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영향이 컸던 논쟁으로 이어진다.

퇴계 이황은 인간 본성의 선함을 확신하고 본래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데에 그 학문의 주안점을 두었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선한 감정인 사단과 악한 감정인 칠정을 구분하고, 이들을 각각 본성의 선함에서 오는 것과 바깥의 사물에 의해 동요된 것으로 규정하였다. 이황이 보기에 본성의 도덕성은 만물을 관통하는 이치인 이(理)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선한 감정인 사단을 이(理)가 발동한 것으로, 악한 감정인 칠정을 기(氣)가 위주가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기대승 또한 사단이 가진 도덕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이황의 설명에 어폐가 있다고 느꼈다. 기대승의 견해에 따르면, 세상 만물은 모두 이(理)와 기(氣)가 합쳐져 발생한 것이기에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여 발동하였다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사단과 칠정 모두 이기(理氣)가 합쳐진 것이고 사단과 칠정 또한 본래 선과 악으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칠정은 모든 감정을 아우르는 명칭이며, 그 중에서 절도에 맞은 것들만을 추려 사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수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한 끝에 기대승은 결국 자신의 견해를 유보하고 이황의 견해대로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理)와 기(氣)로 나누어 볼 수 있다며 논쟁을 정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기대승의 견해가 전적으로 부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황 또한 기대승의 견해 중 많은 부분을 받아들여 자신의 견해를 더욱 정밀하게 다듬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기대승의 견해는 후일 또 다른 대학자 이이(李珥)에게로 계승된다. 이이는 성혼(成渾)과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켰다. 특히 이이의 문인으로 구성된 서인이 조선 후기 가장 큰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을 보면, 기대승의 문제제기가 가진 중요성을 잘 알 수 있다.

논쟁의 와중에 감정적인 대응을 하기도 했던 기대승과 이황이지만 오히려 둘의 사이는 더욱 깊어졌다. 그들은 서로의 학설을 비판하였지만 상대방의 견해가 가진 탁월한 점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기대승은 젊은 자신에게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학자 대 학자로 논쟁에 임해준 이황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이황이 서울을 떠날 때에 전송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고, 1570년(선조 3) 이황의 부음(訃音)을 접하자 신위를 설치하고 통곡하며 위대한 학자의 죽음을 추모하였다.

기대승의 문제 제기로 야기된 이황과의 논쟁은 당대 학자들에게도 큰 반향을 낳았다. 비록 조식(曺植)과 같은 실천주의자는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 논쟁을 통해 헛되이 이름을 구하려 한다고 비판하였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들의 논쟁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그 논의를 나름대로 다시 탐구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조선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과 마음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중국 성리학과는 다른 측면이다.

또한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은 조선의 학계를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황의 문인을 중심으로 한 남인(南人), 기대승의 견해를 계승한 이이의 문인을 중심으로 한 서인(西人) 계열은 조선 후기 사상계의 양대 축을 형성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성리학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논쟁의 파장은 조선 정치 질서의 변화도 가져왔다. 이후 남인과 서인이 중앙 정계에서도 양대 세력으로 활동하며 조선 정치의 특징인 붕당정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비록 당파 간의 정쟁이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지만, 이들 붕당은 상호견제와 비판을 원칙으로 조선의 정치를 운영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준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루려했던 사림 중심의 정치 질서의 기틀을 그 조카 기대승이 다진 것이다.

5 정치가 기대승

기대승은 퇴계와의 논쟁을 시작하기 한 해 전인 1558년(명종 13) 문과에 합격하며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정치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자랑하였다. 특히 그는 당시 예법의 해석과 시행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성리학은 인간의 도덕성에 주목한 학문이며, 이 본연의 도덕성을 겉으로 드러나게 하는 형식인 예법을 강조하였다.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한 조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국가 전례의 시행은 국왕의 지위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기도 했기 때문에, 국상(國喪)이나 사신 영접 등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에 행하는 의례는 무엇보다도 엄격하게 논의되었다. 기대승의 예법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견해는 당대 국가 의례를 시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567년(명종 22) 명종[조선](明宗)이 승하하자 명종의 형수가 되는 인종[조선](仁宗)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의 복제가 문제가 되었다. 당시 조정의 논의는 인성왕후가 명종의 형수이므로 명종에 대해 따로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예법에 밝았던 퇴계 이황 또한 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대승의 생각은 달랐다. 명종이 비록 인성왕후의 시숙이기는 하지만, 형제가 임금의 자리를 계승할 경우 군신간의 관계가 되는 것이므로 마땅히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를 듣고 이황은 매우 감탄하면서 기대승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예를 그르친 천고의 죄인이 될 뻔하였다며 조정에 글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기대승은 선조[조선](宣祖)에게 국왕의 몸으로 사친(私親)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잘못이라고 간언하기도 하였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로, 명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승하(昇遐)하자 왕위를 잇게 되었다. 당시 대신이 선조의 친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에게 제사를 올릴 것을 건의하였는데 기대승은 대통을 이은 군주로서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간하였다. 퇴계 이황 또한 사친에게 제사지내는 것이 예에 위배되는 것이라 간한 바 있다.

선조는 이황과 기대승 등 뛰어난 학자들을 곁에 두어 후하게 대접하는 한편 사림계 인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기대승은 이러한 사림 중심으로의 정치적 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기묘사림의 영수 조광조와 이언적(李彦迪)의 명예 회복을 건의하였다. 또한 그는 정몽주(鄭夢周)로부터 김종직, 김굉필을 이어 조광조에까지 이어지는 사림의 도통(道統)을 천명하였다. 그의 숙부 기준이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화를 당했던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자기 가문의 명예 회복과도 관련된 것이었으며, 사림 중심으로 변화해가던 정치를 승인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경연에서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등을 강의하였는데, 이는 왕으로 하여금 성인(聖人)이 되도록 하는 성리학적 정치 질서의 구현을 위한 것이었다.

기대승은 성균관대사성, 좌승지, 대사간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학계와 정계의 변화를 이끌었으나, 나이는 속일 수 없었는지 40대에 접어들면서 신병으로 인해 관직을 사임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러나 시대는 여전히 기대승의 능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다시 요직에 임명되었다. 나라를 위해 힘을 너무 쓴 것일까, 그는 1572년(선조 5) 11월 1일 향년 46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 학자로서 존경하였던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지 약 2년만이었다. 당시 선조는 기대승에게 어의를 파견하며 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드러내었고, 기대승의 사후에는 그의 장례 비용을 국가에서 대도록 하는 한편 그가 경연 등에서 상주했던 글들을 모아 『논사록(論思錄)』이란 제목으로 간행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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