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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굉필[金宏弼]

조선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잇다

1454년(단종 2) ~ 1504년(연산군 10)

김굉필 대표 이미지

소학당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도학(道學)의 조종(祖宗)

조선시대에 성리학은 ‘도학’이라고 불렀다. 도덕성과 명분으로 당시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사림세력의 목표를 잘 보여주는 용어가 바로 ‘도학’이었다. 사림세력은 도학의 계보화를 통해 도통(道通)을 수립하면서 내부적인 결속을 다져나갔다.

도통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김굉필은 사림 세력에 의해 크게 강조되었다. 특히 퇴계 이황(李滉)은 김굉필을 ‘근세 도학(道學)의 조종(祖宗)’이라 추앙했으며, 기대승(奇大升)은 조선 성리학의 연원을 정몽주(鄭夢周)로부터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진다고 언급하여, 이후 이것이 조선 유학자들에게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이 조선 유학 도통의 중심에 김굉필이 있었다.

2 김굉필의 생애

김굉필의 가문은 원래 서흥(瑞興)의 토성(土姓)으로 자리 잡고 있었으며, 무반으로 관직에 올라 단계적으로 신분을 높이면서 서울에 거주하는 선비로 발판을 다졌다. 그러다가 조선 초기 증조부 김중곤(金中坤)이 부인의 고향을 따라 현풍(玄風)에도 토대를 만들면서, 그의 가문은 서울과 지방에 기반을 둔 유력한 가문으로 성장했다. 김굉필은 1454년(단종 2) 한양 정릉동에서 태어났으며, 19세에 박예손(朴禮孫)의 딸과 결혼하여 합천의 처가에서 기거하였다. 한훤당이라는 자호는 그가 처가 옆에 지은 서재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예닐곱 살에 거리를 지나다가 거만하고 무례한 사람을 보면 채찍을 휘둘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남다른 성품을 보이기도 했으나, 성장하면서 점차 학문을 연마하는데 집중하였다.

김굉필은 21세가 되었을 때 당시 함양군수로 재직 중인 점필재 김종직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김종직은 그에게 《소학(小學)》을 가르치며 학문적 천착 뿐 아니라 실천에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이에 김굉필은 《소학》을 다 읽은 후에 〈독소학(讀小學)〉이라는 시를 지어 “소학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술회하며 실천의 의지를 새롭게 가다듬었다. 김굉필은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하며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30세가 되어서야 다른 책을 접했다고 한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어 세상을 어지럽히는 원각사 승려를 비판하면서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진흥하자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1494년(성종 25)에는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성리학을 오로지하며 지조와 행실이 바른 숨은 선비’라는 명목으로 천거되어 남부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됨으로써 관직에 진출하였다. 1496년(연산 2)에 군자감주부,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형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498년(연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을 때,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연루자의 범위가 김종직 문인 전체로 확대됨에 따라, 이미 죽은 김종직을 비롯하여 그의 문인들 가운데 중앙정계에 진출해 있던 대부분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 김굉필 역시 김종직의 문인으로 붕당을 지었다는 이유로 이종준(李宗準)·최부(崔溥)·이원(李黿)·강백진(康伯珍)·이주(李胄)·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 등과 함께 곤장 80대를 맞고 먼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 평안도 희천으로 갔다가 2년 뒤에 순천으로 옮겨졌다.

김굉필이 희천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 조광조가 그를 찾아왔고, 김굉필이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해주면서, 김굉필에서 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 유학사의 도통이 형성 되었다.

무오사화 6년 후인 1504년(연산 10)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이었던 사람들이 대거 희생되었고, 김굉필 역시 참형에 처해졌으며 효수되었으며 그의 자식과 형제들은 먼 지방으로 내쫓겼다.

3 사후의 신원 과정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중종[조선](中宗)이 즉위하자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 출신 관료들은 조선 건국과정에서 희생된 정몽주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서 화를 당한 인물들에 대한 추숭과 문묘배향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로써 김굉필도 관작을 회복하였고 그의 자손은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다. 조광조 일파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정몽주와 김굉필에 대한 문묘종사 운동을 벌였다. 1517년(중종 12)에 이르러 8차례에 걸쳐서 문묘종사 상소와 조정의 논의가 이어졌지만, 같은 해 정몽주 한 사람만의 문묘 배향으로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조광조는 계속해서 중종 앞에서 자신의 스승인 김굉필의 공헌을 강조하는 한편 그의 학문적 연원이 정몽주에게 있음을 말하였다.

조광조는 그의 스승 김굉필의 학문적 연원과 정통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이후 조광조를 논할 때 반드시 김굉필을 거론하여 학문의 유서가 깊음을 밝혔고, 김굉필을 논할 때 꼭 조광조를 거론함으로써 그의 학문이 후대에까지 이어져 빛을 발하게 되었음이 강조되었다.

김굉필은 1517년(중종 12) 8월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김굉필이 도학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서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러나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가 대거 희생되면서 더 이상의 추증 논의는 이어지지 못하였다.

네 차례 사화가 지나간 1565년(명종 20)이 되서야 퇴계 이황에 의해 김굉필의 문집 《경현록(景賢錄)》(景賢錄)이 개정되면서 김굉필의 학문적 연원과 위상이 높아질 수 있었다. 이어서 이황은 선조 즉위 초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乙巳士禍)의 실상과 그 희생자들의 무고함을 밝히고, 그들이 지닌 명분과 역사적 의의를 국왕의 의식 속에 자리 잡게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선조 때에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國朝儒先錄)이 편찬되었다. 이 책에는 4대 사화 희생자의 상징적 존재였던 김굉필․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 네 사람의 학문과 행적을 담아 후세의 모범을 삼고자 하였다.

선조 때에 활발하게 일어난 문묘종사운동은 김굉필에서 그의 사우(師友)인 정여창, 제자인 조광조,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이언적과 이황을 보태 이른바 ‘동방오현(東方五賢)’에 대한 문묘종사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 많은 논란과 곡절을 거치면서 동방오현에 대한 문묘종사가 마침내 1610년(광해군 2)에 모두 확정되었다.

당시의 신료들은 대개 5인을 학파논리로나 정치적 파당논리로 대응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묘 종사에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도리어 국왕 자신이 문묘종사를 국가의 중대사로 인식하여 지나치게 과민하게 대응함으로써 시일을 오래 끌었을 따름이다. 이는 후일 붕당정치가 극에 달한 숙종[조선](肅宗) 때에 문묘종사에 대한 논의에서 신료들끼리 논쟁이 벌어졌던 것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4 김굉필의 교우관계

김굉필의 생애는 길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사우 문인을 접촉하고 사귈 수 있는 기간 또한 길지 않았다. 그의 문집 《경현록》에서 언급된 사우 문인의 수는 모두 52인으로 집계된다. 대표적인 인물은 그의 스승 김종직을 들 수 있고, 그 밖에 김맹성(金孟性), 정여창, 남효온(南孝溫), 신영희(辛永禧), 이승언(李承彦), 이철균(李鐵鈞), 주윤창(周允昌),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홍귀손(洪貴孫), 이장길(李長吉), 최충성(崔忠成), 허반(許磐), 민구손(閔龜孫), 강흔(姜訢), 유우(柳藕), 이장곤(李長坤)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의식 성향 면에서 사림의 색채가 선명하지 못한 인물들도 있었던 반면,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사림의 의식 성향을 적극적으로 대변한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후일 사림이 주도하는 사회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조광조․김안국(金安國)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5 김굉필의 학문과 그 영향

김굉필의 도학은 성리학의 관념적 접근을 넘어서서,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원리를 현실에 구현하는 실천적인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 그리고 비록 기초적 수준에 머물기는 했지만 성리학의 철학적 구조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는 《소학》을 주축으로 하여 수기의 원리를 실천할 구체적 행동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대학》을 비롯한 각종 성리학 서적을 탐구하여 절대적 선(善)인 리(理)의 보편성을 보장하는 독자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을 확립했다. 이를 근거로 선과 악, 정(正)과 사(邪) 분별의 확고한 가치관을 수립하여 모순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며 개혁적 자세를 견지했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기묘사림 개혁정치의 발판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훈척정치의 모순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사림들이 공통적으로 도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개혁의 방향을 다각도로 모색하게 되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림세력은 각각의 독자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현실인식과 대응방식을 달리하면서 점차 분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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