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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金大建]

조선 최초의 신부

1821년(순조 21) ~ 1846년(헌종 12)

김대건 대표 이미지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신부 유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

김대건이 살았던 19세기 전반기는 대내적으로는 서학(西學) 내지 천주교 신앙 등 각종 ‘사학(邪學)’이 성행하여 성리학적 질서에 균열이 심화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이양선이 조선 연안까지 출몰하면서 문호개방이나 통상을 요구하는 등 서세동점(西勢東漸)이 가속화되는 시기였다. 조선 연해에 출몰했던 이양선을 파견한 국가 가운데 조선 천주교회와 간접적 관련을 맺고 있었던 나라는 프랑스였다. 김대건이 마카오에서 프랑스 신부에게 수업을 받고 있었던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에는 프랑스인 신부인 앵베르(范世亨)·앵베르(范世亨)·샤스탕(鄭牙各伯)이 사형에 처해졌으며, 그런 가운데 조선의 천주교인들 사이에서는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비밀스러운 노력들이 전개되었다. 김대건이 바로 조선 최초로 사제서품을 받고, 선교사 영입과 전교에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2 김대건의 생애

김대건은 충청남도 당진군의 내포지방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과 어머니 고씨(우르술라)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한국천주교회가 탄생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의 집안에서 제일 처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의 종조부인 김종현(金淙鉉)이었다.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한 김대건의 아버지 김제준의 진술에 따르면, 자신의 큰아버지 김종현의 가르침을 받고 천주교에 입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김종현의 둘째 동생인 김한현(金漢鉉, 안드레아)도 맏형 김종현이 교리를 배운 뒤 형제들이 그 뒤를 따랐다고 진술하였다.

다시 말해 김종현이 천주교 신앙을 갖고 나서 자신의 집안에 천주교를 전교한 것이다. 김대건의 증조부 김진후(金震厚)를 비롯하여 조부인 김택현(金澤鉉), 종조부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 등의 일가가 모두 김종현을 통해 입교하였다. 이렇게 김대건의 집안이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내포의 사도로 유명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이 가까이 살면서 전도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이존창의 딸 멜라니아와 김택현이 혼인을 하면서 신앙 전통이 김제준, 김대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신앙생활을 하지 않다가 15~16년이 더 지나서야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의 인도로 다시 천주교를 봉행하게 되었다.

솔뫼에서 태어난 김대건은 이후 아버지 김제준을 따라 서울 청파로 이주하였다가 용인의 한덕동을 거쳐 남곡리 골배마을(南谷里) 로 이주해 살았다. 골배마을에 살던 김제준은 이후에도 자주 정하상 등과 연락하며 지내다가 1836년 모방 신부가 입국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 정하상의 집을 찾아가 그곳에 있던 신부를 만난 뒤 세례를 받고 골배마을로 돌아왔다. 모방 신부가 교우촌 순방차 나섰다가 김제준의 집을 방문하고 그 아들 재복(곧 김대건)을 본 뒤 제자로 삼고자 하여 데리고 갔으며, 김제준은 그 해 또 한 번 서울로 가서 아들을 만나 보았다고 한다.

당시 신학생으로 선발된 소년 중에서는 최양업(崔良業, 토마스)이 가장 먼저인 1836년 2월 6일에, 이어 3월 14일에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그리고 김대건이 가장 늦은 7월 11일에 서울의 모방 신부 집으로 도착했다. 그 해 모방 신부는 부활절을 서울에서 보내고 교우촌 순방에 나선 12월까지 16~17개 공소(公所)를 방문하였다. 계속 지방을 돌아다닌 것은 아니었고, 주로 서울에 머무르면서 때때로 경기도와 충청도를 순방하였으며, 그러다가 7월 경 골배마을에 들러 김대건을 선발하게 된 것이다.

모방신부는 최양업과 최방제, 김대건을 자신의 집에서 가르치다가 라틴어를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박해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조선의 신학생들을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모방 신부는 1636년 12월 3일 유방제[파치피코](劉方濟)(중국명 서항덕)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가는 정하상, 조신철(趙信喆), 이광렬(李光烈) 등 조선 밀사들에게 신학생들을 인도해 주도록 하였다.

이때 조선인 신자들은 의주(義州)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鄭牙各伯) 신부를 맞아들여 서울로 돌아왔고, 세 신학생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2명의 중국인 안내자들을 따라, 8개월 동안 요동, 만주와 중국 관내를 걸어서 횡단한 끝에,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서는 조선 신학교를 임시로 세워 이들을 교육했다.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돌아가면서 담당했다. 최방제는 마카오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6개월이 못된 1837년 11월 풍토병으로 사망하였다. 신학 공부를 계속하던 김대건과 최양업은 아편 거래로 광동과 마카오에서 소요가 일어나 안전이 위협받게 되자 1839년 4월부터 11월까지 필리핀 마닐라의 롤롬보이 수도원으로 옮겨 학업을 계속했다. 롤롬보이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김대건과 최양업은 조선의 밀사 유진길(劉進吉)과 조신철이 북경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조선 교회의 사정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소요가 잠잠해진 뒤 다시 마카오로 돌아온 두 신학생은 1841년(헌종 7) 11월 철학과정을 마치고 신학과정에 들어갔다.

마카오에 체류하던 1842년(헌종 8)에는 프랑스 함대 에리곤 호의 세실 함장이 중국어 통역을 맡아줄 조선인 신학생 1명을 부탁하자 김대건이 통역관으로 발탁되었다. 세실과 김대건 일행은 영국과 중국 사이에 체결된 남경조약을 참관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프랑스 전함의 무력을 통해서라도 조선 선교를 이루어 보려고 하였으나, 세실 측에서는 조선인을 통역으로만 이용하려 했기 때문에 에리곤 호를 이용한 프랑스 선교사의 조선 입국 시도는 좌절되었다.

신학생 김대건은 매스트스 신부와 함께 1842년(헌종 8) 2월 봉황성 책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이후 의주 변문에 대한 정부 감시가 강화되어 이곳을 통한 입국이 어렵게 되자, 선교사들은 경원(慶源)을 통한 동북방 입국로 개척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김대건은 동북방 입국로를 개척하고 1843년(헌종 9) 4월,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이 있던 소팔가자로 되돌아가 다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1844년(헌종 10)에 부제품까지 받았다.

김대건 부제는 1845년(헌종 11) 1월 1일 책문에서 이재의(李在誼) 등 밀사들을 만나 의주를 통해 입국하였다. 1845년(헌종 11)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한 이후 김대건 부제는 조정에서 이미 자신이 외국에 나간 사실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발각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도 도착 사실을 알리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선교사를 초빙해 거처할 집을 서울 석정동에 마련하고, 페레올 주교를 상해에서 맞아들이기 위해 배 2척을 구입하였다. 또 14세 된 학생 2명을 선발하여 가르쳤고, 〈조선전도(朝鮮全圖)〉를 작성하여 마카오로 보냈으며, 현석문(玄錫文)등이 수집해 온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조선 순교사(殉敎史)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런 다음 4월, 현석문·최형(崔炯)·이재의 등 11명의 교우와 예비 교우들을 데리고 제물포를 출발하여 상해로 향했고,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으며, 횡당 성당에서 첫 미사를 드림으로써, 김대건은 최초의 한국인 성직자가 되었다.

사제서품을 받은 김대건은 배를 수리하고 페레올 주교, 다블뤼(安敦伊) 신부,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8월 31일 상해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오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제주도 제주도 용수리에 표착하였다. 조선 땅 제주에서 조선인 신부에 의한 최초의 미사가 집전되었고, 김대건 일행은 10월 12일 충남 경강 부근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헌종 11)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오가며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그의 사목은 석정동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이루어졌으며, 경기도에서는 숨겨진 동네라는 뜻의 용인의 ‘은이성지(隱里聖地)’를 중심으로 안성, 이천, 용인을 두루 다니며 사목에 전념하였다. 이때 복사 이의창(李宜昌)이 김대건 신부를 도왔으며, 교인이 아닌 이들은 그를 소공동 집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김대건 신부는 이의창의 주선으로 여러 신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아직 예비 신자에 불과했으면서도 천주교에 협조적이던 임치백((林致白)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으며, 또 그의 아들 임성룡(林成龍)을 이의창의 주선으로 만나게 되었다. 1845년 12월에는 석정동에서 여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또 1846년 5월 임성룡에게 배를 사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400냥을 주었는데, 임성룡은 김대건 신부가 서해 해로를 통한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해로를 개척하기 위해 황해도로 갈 때 타고 갈 배를 장만하였다. 그러나 김대건은 황해도로 가서 중국 배에 서한과 지도를 전달하고 돌아오다가 6월 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었으며,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은 배 안에 남아 있던 김대건이 그린 지도와 서한을 보고 크게 격분하여 엄하게 조사하고 다스릴 것을 주장하였다. 권돈인을 비롯한 정부 당국의 김대건에 대한 인식은 단순히 이단을 신봉했다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을 배반하고 조선을 위협하는 외세인 프랑스와 결탁해 조선에 해악을 가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더욱 가혹한 처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결국 김대건은 서울로 압송되어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3 김대건 사후의 추모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의 시신은 안성 미리내로 옮겨져 안장되었으며, 1928년 안성 김대건 신부 묘소 옆에 기념성당이 건립되었다. 현재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혜화동 가톨릭 대학, 미리내 경당, 절두산 성지(切頭山 聖地)에 분리 안치되어 있다.

김대건은 한국 최초의 성직자이자 헌신적인 순교자의 상징으로 사후부터 현재까지 많은 곳에서 추모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14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걸고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대구에 세워졌는데, 이것이 곧 대건중학교였다. 대건중학교는 해방 이후 대건고등학교(大建高等學校)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는 대구 외에도 전국 여러 지역에 대건중고등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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