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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金萬重]

우리말로 소설을 쓴 국문학의 선구자

1637년(인조 15) ~ 1692년(숙종 18)

김만중 대표 이미지

서포 김만중 영정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명문가 집안의 유복자

김만중은 조선이 병자호란을 겪고 있던 1637년(인조 15) 2월 10일 강화도에서 나오는 피난선 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호는 서포(西浦), 자는 중숙(重淑)이다. 그의 아명은 ‘배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의 ‘선생(船生)’이다. 김만중이 태어나기 약 3달 전 12월 9일은 만주지역을 통일하고 청나라를 건국한 태종이 직접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 날이다. 청군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진군하여 5일 만에 서울 근처까지 왔고, 놀란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을 결정하였다. 이 때 김만중의 아버지인 성균관 생원 김익겸(金益兼)도 강화도로 피난을 하였다. 그러나 청군은 1월 22일 강화도로 쳐들어왔고, 검찰사로 임명되어 강화도 방비의 책임을 맡았던 김경징(金慶徵)은 이미 도망 간 상태였기 때문에 쉽게 함락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원임대신 김상용(金尙容)은 화약 상자에 불을 붙여 자폭하였는데, 김익겸도 같이 순절하고 그 어머니도 뒤따라 자결하였다.

김만중의 어머니는 이때 21살로, 만삭이었다. 남편이 죽은 것을 알고는 자결하려 하였으나 종복이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안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김만중이다. 조선후기 사회의 방향성을 결정지었던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와중에 극적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만큼 그의 삶도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유복자로 태어났으나 김만중의 집안은 광산 김씨로 당대의 명문가였다. 조선후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이 그의 증조부이며, 조부 김반(金槃)은 참판을 지냈다. 그의 아버지 김익겸은 순절의 일로 조선후기 내내 절의의 상징으로 칭송받았으며, 형인 김만기(金萬基)는 송시열(宋時烈)의 제자이자 숙종 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아버지로 노론(老論)의 핵심에서 정치활동을 하였다. 그의 외가 해평 윤씨 집안도 역시 명문이었다. 김만중의 외고조는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이며, 병자호란 때 종묘사직의 위패를 가지고 강화도에 들어갔던 김만중의 외증조부 윤방(尹昉)은 이이(李珥)의 문인이면서 인조 대에 영의정을 지냈다. 외조부 해숭위 윤신지(尹新之)는 선조[조선](宣祖)의 딸 정혜옹주(貞惠翁主)의 남편이다. 윤씨는 이러한 명문가의 딸답게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였으며, 반가의 법도를 잘 지켜 남편이 순절한 이후에는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운 것은 멀리하고 자식들 교육에 매진하였다고 한다.

김만중은 3살 때부터 어머니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외가에서 자랐는데, 그가 4살 때에는 경제적, 정신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외조부가 사망하자 어머니 윤씨는 몸소 베를 짜고 수를 놓아 생계를 꾸렸지만 땔나무가 없어 술통을 쪼개 땔감으로 쓸 정도로 가난했다. 이렇게 궁핍한 살림이었지만 자식들 교육에만은 투자를 아끼지 않고 곡식과 옷감을 바꾸어 책을 사 읽혔다고 한다. 더 이상 책을 살 수 없자, 이웃에게 책을 빌려 손수 베껴 주기까지 하면서 항상 학문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독려하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여 김만중은 16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1665년(현종 6) 29살이 되던 해 정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여 그해 5월 1일 성균관 전적으로, 22일에는 예조좌랑을, 이듬해 11월에는 정언을 제수 받으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김만중은 순절자의 아들이자 예학에 으뜸가는 집안의 후예라는 후광을 입고 청요직을 두루 거치며 국왕의 최측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 사이 그는 이단상(李端相)의 딸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2 시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

김만중이 관직생활을 했던 현종[조선](顯宗), 숙종[조선](肅宗) 연간은 조선후기 정치사에 있어서 가장 다변하고 치열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통설에서는 이 시기를 붕당정치기의 틀에서 설명하고 있다. 현종 대에 이르면 두 차례의 예송(禮訟)을 거치면서 붕당간의 갈등이 격화된다. 예송은 왕실 상례에 관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관료들의 이견으로 학문적・정치적 갈등 양상을 보인 사건이다. 1차 예송인 기해예송은 효종(孝宗)의 상에 계모인 장렬왕후(莊烈王后)가 몇 년의 상복을 입어야하느냐의 문제였으며,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은 효종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역시 자의대비가 몇 년의 상복을 입어야하느냐의 문제였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상례에 대한 이론적 차이였으나, 정치적 문제로 비화된 이유는 이 문제가 왕가의 종법문제로 민감한 사안을 건드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이 효종의 경우 ‘서자(庶子)’에 해당된다고 했을 때, 이를 두고 왕을 능멸하고 왕가의 종통을 어지럽히는 것이라는 남인의 비난이 무수히 쏟아진 것이 한 사례이다. 서인은 1차 예송에서는 승리하였지만, 이와 같은 이론상의 민감한 문제와 허적(許積)에게 의지했던 현종의 결정에 힘입어 2차 예송은 남인이 승리하였다.

두 번의 예송 뒤에는 숙종대의 환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환국은 정권이 갑작스럽게 뒤바뀌는 것을 지칭하며, 숙종대의 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己巳換局), 갑술환국(甲戌換局) 3번의 환국을 거치면서 남인이 완전 실각하고, 이 과정에서 서인은 노론과 소론(少論)으로 분기되어 최종적으로 노론이 정국을 좌우하게 되었다. 경신환국은 2차 예송으로 수세에 몰린 서인이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의 역모를 고변하면서 남인들이, 기사환국은 남인의 후원을 받던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고 장희빈이 인현왕후(仁顯王后) 대신 왕비가 되는 과정에서 노론들이 대거 사사되거나 유배를 당했던 사건이다.

김만중은 노론으로서 출사한 뒤 두 차례의 예송과 두 차례의 환국을 정국의 중심에서 정면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의 관료생활은 부침을 거듭했으며, 수차례의 유배생활에서 문학 창작에 매진하기도 하다가 결국 마지막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서인 명문가에서 태어난 만큼 당대의 정치적 격변을 한가운데서 맞아야 했던 그의 삶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3 관직생활과 유배

29살에 처음 출사를 해서 순조롭게 관직생활을 시작한 김만중은 그의 관직생활 동안 주로 홍문관, 사헌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의견 개진을 잘하여 자주 임금에게 꾸짖음을 당하였다. 이는 그의 성품 탓인 것도 있겠지만, 서인 노론의 중심에 있었던 그의 가문을 생각하면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1668년(현종 9)에 김만중은 홍문관 부수찬으로 있으면서 임금이 허적에게 내관을 보내어 문안한 것을 극력 비판하다가 그 자리에서 파면되었다. 옆에 있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김만중을 변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해에 그는 다시 수찬, 헌납에, 이듬해에는 부수찬에 제수되어 송시열을 조정에 머물게 할 것을 청하고 뇌물을 받은 관리들에 대한 처벌을 청하는 등 자신의 직분을 다하였다. 1670년(현종 11) 12월 26일에는 형 김만기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그의 집안의 정치적 입지와 위상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는 암행어사로 용인, 파주 등 경기도의 여러 고을을 돌아보고 진휼을 게을리 한 수령들과 직무에 뛰어난 수령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때 지은 5언 절구의 시 8수가 그의 문집에 남아있다.

김만중의 관직생활은 영의정 허적을 비판한 일로 중단된다. 남인의 영수인 허적은 1673년 영의정이 되었는데, ‘삼복’이라고 불리던 복창군(福昌君) 등 3명의 종친과 이들과 친분이 있던 남인 인사들이 이 시기쯤부터 현종의 의중에 들었던 까닭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만중이 허적은 그릇된 예론을 주장하였으며, 영의정이 된 뒤에 ‘형벌과 복을 주는 권력이 임금에게 있지 않다.’는 말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부적절한 행동을 보였기에 군자가 아니라며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현종은 김만중이 허적과 당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영의정이 된 것을 그르다 여겨 근거 없이 비난하는 것이라고 하자, 김만중은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이 조정에 동시에 있을 순 없다며 소인인 허적을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현종은 매우 화가 나서 김수흥(金壽興) 등의 변론에도 불구하고 이틀 뒤 그를 잡아 심문하라고 하였다. 이 일은 서인계 신료들의 변호로 해가 넘어가도록 결론이 나지 않다가 다음 해인 1674년(현종 15) 정월이 되어서야 김만중의 유배가 결정되었다. 결국 그는 27일 강원도 금성(지금의 고성)으로 유배를 떠났다.

김만중은 첫 번째 유배에서 2달 만에 풀려났다.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여 그의 조카딸인 인경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었기 때문이다. 2차 예송의 여파로 서인의 활동이 많이 위축되기는 하였지만, 이 상황에서도 그는 척족의 집안이었기 때문에 동부승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기 전까지 그는 파직과 사직을 거듭하며 조정에 나아가지 않으면서 시 짓기에 몰두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이후 김만중의 관료생활도 다시 활기를 띤다. 그는 이 해에 대사성, 홍문관 제학, 대사헌, 예문관 제학, 대사간 등에 제수되었지만 소를 올려 모두 체직을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는 그의 숙부 김익훈(金益勳)이 척족으로서 허견 옥사를 주도하며 무고한 남인들을 많이 죽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신중하고 삼가는 처사를 한 것이었다. 1682년(숙종 8) 1월 1일 김만중은 예조참판에 제수되고, 그 이후에는 다시 순조로운 관직 생활을 하게 된다. 대사헌, 예조판서, 병조판서, 좌참찬 등을 거쳐 1686년(숙종 12) 9월 17일에는 양관 대제학을 겸하게 됨으로써 문신으로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1687(숙종 13)년 3월은 김만중의 형 김만기가 사망하고, 그도 9월 11일 큰 정치적 파란을 일으키게 되면서 다시 유배 길에 오르게 된다. 이때는 숙종이 장희빈을 매우 총애하여 희빈과 연계된 남인들이 다시 정국에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김만중은 경연 자리에서 장희빈에 대한 상소를 올린 김창협(金昌協)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김수항(金壽恒)을 홀대함은 옳지 않으며, 대비 조씨의 재종제인 조사석(趙師錫)이 좌의정이 된 것은 장희빈의 어미와 친하여 연줄을 대었기 때문이지 결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님을 얘기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샀다. 숙종은 바로 이 자리에서 그를 의금부에 가두고 그 소문의 진원지를 밝히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만중은 끝까지 밝히지 않았고, 결국 12일 선천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박세채(朴世采), 남구만(南九萬) 등 여러 신하들과 사헌부 등이 그를 용서하라고 청하였지만 숙종은 모두 물리쳤다고 한다. 이 일을 두고 사관은 “세상에서 모두 그의 과감한 직언을 칭찬하였다.”라고 적었다. 문학작품으로 잘 알려진 김만중이지만 그의 관직생활의 일화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직언을 주저하지 않는 관료였다.

김만중의 선천 유배는 1688년(숙종 14) 장희빈의 원자 출산으로 특사의 은전이 베풀어지면서 끝났다. 그러나 바로 다음 해에 기사환국이 발생하면서 그는 더욱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이 사건은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려는 숙종의 시도에 반대한 서인 신료들을 대거 처벌한 일이다. 이 때 송시열이 83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두었으며, 김수항 역시 이 때 사사되었다. 서인의 중심이었던 김만중의 집안도 무사하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잡혀와 조사석 일에 대해 문초를 당했다. 김만중은 끝까지 그 소문의 진원을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그의 사위인 이이명(李頤命)의 형, 이사명(李師命)이 말 해 준 것인데, 이 전말을 이사명이 국문장에서 모두 실토하였다. 이로써 김만중은 경상도 남해로 3번째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유배생활 도중에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데다 온갖 질병 때문에 몸이 쇠약해져 1692년 4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4 문학과 벗을 삼다

김만중은 유배지에서 많은 문학작품을 창작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구운몽(九雲夢)』이다. 이 소설은 그가 장희빈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선천에 유배된 1688년(숙종 6)년에 저술에 착수하여 다시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게 되는 이듬해에 남해 유배 도중 완성했다. 이 소설의 저술 동기에 대해서는 그가 혼자 적적하게 계실 어머니를 걱정하여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지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는 정조[조선](正祖)가 “김만중이 그의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구운몽을 지었던 것처럼, 나도 요새 어머니(혜경궁 홍씨)를 위해 『시경』에서 100편을 선정하여 『모시백선』이라 이름하고 경들에게 분담해서 언문으로 번역하게 하였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내용은 육관대사의 제자인 성진이 인간세상에 양소유라는 사람으로 태어나 팔선녀의 환생인 8명의 각기 다른 여자들을 차례로 만나 영화롭게 사는 꿈을 꾸다가 깨어 일체의 부귀영화가 모두 허망한 것임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하여 이재(李縡)는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충정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 담긴 굴원의 『초사』「이소」의 모티프를 차용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귀양살이를 하는 김만중의 마음이 투영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또 다른 소설인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역시 남해 유배시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내용상 목적성이 강한 작품이다. 즉,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들인 숙종의 처사를 비판하고 덕을 가진 조강지처의 복위를 바라는 의도가 소설 속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위의 두 소설 외에 그의 저술로는 『서포만필(西浦漫筆)』과 그의 사후 간행된 문집 『서포집(西浦集)』이 있는데, 이들 속에서는 특히 김만중의 여러 시들이 주목된다. 대부분 금성, 선천, 남해 유배 시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시는 특히 여성을 형상화한 시와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지은 시가 많은 것이 특징인데, 군신간의 의리를 남녀 간의 정에 비유하여 쓴 시도 있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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