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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金尙容]

절의(節義)로 조선의 기풍을 세우다

1561년(명종 16) ~ 1637년(인조 15)

김상용 대표 이미지

김상용 순절비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김상용이 조선후기 ‘절의’의 상징이 된 이유

김상용(金尙容)이 살던 시기는 조선왕조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으며 밖으로는 변화하는 국제질서에 새롭게 적응하고 동시에 안으로는 피폐해진 민생과 요동치는 정국을 수습해야 하는 때였다. 그는 선조(宣祖) 대부터 인조(仁祖) 대까지 조정에서 관료로 활동하면서 언론・외교・지방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서인(西人) 관료로서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그의 관료 생활은 비교적 평탄한 편이었다. 김상용이 후대에 이름을 남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의 순절했던 일 때문이다. 김상용은 왕실 사람들을 모시고 피난을 떠난 강화도에서 성이 함락되자 도망가지 않고 폭약 더미 위에 불을 붙인 뒤 그 위에 올라가 자결하였다. 이 일로 그는 그의 동생이자 척화(斥和) 대신으로 알려진 김상헌(金尙憲)과 더불어 조선후기 절의(節義)의 상징이 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집안인 안동김문은 서울을 기반으로 서인 노론(老論)계열의 유력 가문으로 급속하게 성장하게 되었고, 나날이 번창하여 19세기 세도가문이 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안동 김문이 가진 정치적 명분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조선의 시대적 상황과 정치사상적 맥락을 알아야 한다.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운 나라인 청나라는 한족 정권인 명나라를 중원에서 밀어냈고, 조선에까지 그 여파가 미쳐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화(中華)의 정통성이 명나라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무력으로 명나라를 밀어낸 청나라를 야만시 하였다. 이런 야만적인 오랑캐에게 패배한 병자년의 전쟁은 조선 사람들에게 엄청난 치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후기 내내 청나라에 복수하고 중화를 조선에 구현하겠다는 존주의리(尊周義理) 혹은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 효종(孝宗)이 즉위하고 송시열(宋時烈) 등과 더불어 ‘북벌’을 꾀하여 청과 전쟁을 하여 중원을 수복하는 데에 앞장서려 했다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상용은 조선후기의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기에 앞서 전쟁 중에 죽음으로써 청나라에 대한 불복종을 실천하였기 때문에 중화 이념을 조선에 구현하고자 했던 사대부들에게 각별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2 가문과 출사

김상용의 자는 경택(景擇)이며, 호는 선원(仙源) 또는 풍계(楓溪),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561년(명종 16)에 서울에서 태어나 1637년(인조 15)에 졸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아버지는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김극효(金克孝), 어머니는 좌의정을 지낸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을 하였으나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김상용 대에 이르러 그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탄탄한 관료 생활을 하면서 이들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안동김씨 경파(京派)가 독자적인 문중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일러 ‘장동김씨(壯洞金氏)’라고 칭하는데, 서울 장의동이 그들의 세거지였던 까닭에 그 이름을 빌린 것이다. 우리가 흔히 세도가문이라고 칭하는 안동김씨는 장동김씨를 지칭한다.

김상용은 외가에서 태어나 외조부인 정유길에게 고문과 시를 짓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모나지 않아 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렸으며, 책 읽기를 좋아하여 한 번 서실에 들어가면 해가 질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이(李珥)를 스승처럼 존경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김상용이 서인의 학통을 이은 것은 확실하다. 그가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시절 사귄 친구들도 오윤겸(吳允謙)・이춘영(李春英)・황신(黃愼) 등 성혼의 제자들이거나, 이항복(李恒福)・신흠(申欽)・이정구(李廷龜) 등 당대 이름난 서인의 문사들이었다.

3 관료 생활과 몇 가지 일화

김상용은 1590년(선조 23) 별시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철(鄭澈)과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였는데, 오랫동안 이들과 머물면서 많은 일을 의논하고 처리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김상용은 이 때 전라도와 경상도를 왕래하면서 명나라 장수들을 응대하는 일을 하였는데, 전쟁 중이라 열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맡은 임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를 인정받아 1598년(선조 31)에는 품계를 뛰어넘어 동부승지에 발탁되는 특전이 주어졌다. 또한 명나라 황제의 탄신일을 축하는 성절사로 임명되어 이 해 겨울 북경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 뒤 관직이 계속 바뀌어 14번 자리를 옮겼으나, 국왕을 가까이 모시거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 승정원과 대간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김상용이 선조에게 큰 신임을 얻은 까닭이었다.

김상용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의 일화이다. 그는 선조에게 ‘언론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궁궐이 엄숙하게 단속되지 못한다.’라는 비판을 한 적이 있었다. 이에 선조는 “궁궐이 엄숙하지 못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숨기지 말고 말하라.”고 하였다. 김상헌은 “여러 소인배들이 궁궐의 액정들과 내통하여 나쁜 짓을 저질렀다.”며 문제가 되고 있었던 사안을 숨김없이 말하였다. 그 때에 윤홍과 이수라는 사람이 궁궐 내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며 조정에서 결정되는 인사(人事)에 관한 정보를 몰래 얻고, 이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일이 있었는데, 아무도 후환이 두려워 선조에게는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였다. 김상용이 용감하게 선조에게 측근을 잘 단속하라는 말을 하자, 비로소 이정구를 비롯한 대신들이 “조정 내의 사람들 모두 이들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가 될까 두려워 아무도 말하지 못하던 것을 김상용이 홀로 해냈으니, 이는 마치 ‘조양에서 봉황이 우는 것(朝陽之鳴)’ 마냥 과감하게 직언을 한 것입니다.”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선조는 김상용 앞에서는 수긍하는 듯하였으나, 후일담에 따르면 그에게 매우 노하였다고 한다.

얼마 안 있어 김상용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여 선조의 마음을 산 유영경의 미움을 받아 정주목사(定州牧使)로 좌천되었다. 이곳은 명나라 사신들이 서울로 오갈 때 지나다니는 길목이라서 이들에게 바치는 공물이 너무 과하여 백성들이 힘들어하여 견디지 못하고 도망까지 가는 곳이었다. 김상용이 정주에 부임했을 때에도 마침 고천준 등 사신 일행이 이르렀는데, 요령이 있게 잘 처리를 하였다고 한다. 김상용은 유영경이 세력을 잡고 있는 탓에 중앙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상주목사, 안변부사 등 외직을 떠돌았는데, 가는 곳마다 잘 다스려서 범죄가 줄어 옥사와 송사가 없어지고 창고에 곡식을 잘 비축하여 가뭄과 홍수에도 구휼에 걱정이 없었으며 여관과 역(驛) 등의 국가 기반시설을 잘 관리하여 백성들이 공덕비를 세우며 칭송할 정도였다. 그의 오랜 외직 생활은 선조가 승하하자 끝이 났다. 그는 당시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하여 선조의 명정(銘旌)을 전서(篆書)로 쓰라는 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일을 마치고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김상용은 선조 대에 외교와 지방행정에 유능한 관료로서 직무를 원활하게 수행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그는 조선으로 파견된 웅화・유용 등 명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다시 맡았는데, 이는 선조 대에 그가 사신들을 응대하는 데에서 이미 증명된 매끄러운 일처리 능력 때문이었다. 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그는 2품계를 올려 받아 대사헌, 형조판서, 한성판윤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광해군대 중반부터 김상용의 관료 생활은 어려움을 겪었다. 1613년(광해군 5)에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등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대비의 수렴청정을 꾀한다는 역모를 꾸며 김제남이 사사되는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김상용의 동생 김상헌은 김제남과 사돈관계였는데, 이 일로 두 형제는 적지 않은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5년 후에는 인목대비를 폐하자는 논의까지 일어났다. 김상용의 아버지인 김극효는 이 논의에 병을 핑계대고 참여하지 않았으며, 김상용 역시 회피하였다가 이이첨 등의 탄핵을 받고 이듬해에 사직하고 원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이후 7년간의 긴 은거생활이 지속되었다.

4 뛰어난 외교술과 병자호란 때의 순절

김상용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재기하였다. 직접 반정모의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서인계 인사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까닭에, 김상용은 반정 후의 혼란 수습에 적극적으로 임하였다. 특히 당시 떠오르는 후금과 망해가던 명나라 사이에서 요동치던 동아시아 국제 정세는 조선에게도 최고의 난제였는데, 그는 뛰어난 외교술로 명나라를 상대하는 어려운 일을 맡아 처리하였다. 당시 명나라 요동 도사였던 모문룡은 요동에서 후금에게 밀려 패하고 조선의 철산과 선천 부근에까지 넘어와 조선에 해악을 끼치고 있었다. 조선은 명나라 군병을 모른척할 수 없어 이들을 가도(椵島)에 주둔시키며 군량과 군사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나날이 커지는 후금의 세력을 생각한다면 모문룡 등은 큰 부담이었다. 더구나 후금에게 점령당한 지역의 명나라 유민들이 자꾸 가도에 몰려와 조선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후금의 거세지는 외교적 압력을 견뎌야 했다. 김상용은 이 때 가도에 가서 모문룡과 명나라 유민들의 처리 문제를 상의하는 중책을 맡았다. 또한 수세에 몰린 명나라에서 조선에 자주 사신을 보내어 무리한 것을 요구하였는데, 명나라의 왕민정 등의 사신이 파견되었을 때도 김상용은 원접사로 임명되어 이들을 접대하면서 알맞게 대응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서 예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영돈령부사 등을 역임하며 국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조정의 핵심에서 활동하였다.

이 동안에 후금은 무섭게 세력을 키워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침략하였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 때 조정에서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고 하였으나, 후금의 군사들이 이동하는 시간이 워낙 빨랐기 때문에 도중에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다만, 먼저 출발한 인조의 후궁과 원손과 왕자들은 강화도에 들어가 있었는데, 김상용은 이들을 호위하며 같이 있었다. 그는 강화도에 있는 동안 남한산성의 소식을 계속 수집하며 의병을 꾸려 남한산성에 지원을 갈 것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과의 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소식을 알 길이 없고, 주변에서 아무도 호응하지 않아 안타까워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강화도 방어를 책임진 김경징은 후금 군사들이 강화도를 향해 몰려오자 가솔들을 챙겨 먼저 도망을 가기까지 하였다.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어 후금의 군사들은 강을 건너 성 아래까지 이르렀다.

1637년(인조 15) 1월 22일, 김상용은 속수무책인 상황 속에서 결심을 하였다. 집안사람들에게 영결 한 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곁의 하인에게 맡긴 뒤에 성 남쪽 문루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화약 더미를 쌓아놓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러나라고 손짓을 하였는데 이 때 피한 사람도 있고 피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김상용은 마침내 화약더미에 불을 붙여 자결하였다. 그의 나이 77세였다. 천둥과 벼락 같이 요란한 소리가 땅과 하늘에 울려 퍼졌으며 문루의 지붕과 서까래 기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적병이 물러가자 그의 아들들은 황급히 그의 시신을 수습하려 강화도로 들어갔지만, 끝내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김상헌은 이를 듣고 통곡하며 “어찌하여 우리 형은 수명을 다 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신체를 상하지 않게 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불행을 당하였는가.”라며 슬퍼했다고 한다. 김상용의 죽음에 대해서는 후대에 논란이 있었다. 그의 죽음은 의도한 것이 아니라, 화약더미에 실수로 담뱃불을 떨어뜨려 생긴 실수라는 것이다. 이른바 김상용의 ‘실화(失火)’ 논란은 신익성 등의 증언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그를 위해 정려문이 세워졌다. 그의 순절은 빠르게 인정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에 대한 추모와 현창은 고양되어 삼학사(三學士)와 더불어 병자호란 때의 대표적인 순절자가 되었다. 1758년(영조 34)에 김상용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강화도에 있는 충렬사는 김상용을 기리는 사당이며, 안동 김씨의 문중서원인 양주 석실서원과 그가 수령으로 있던 정주 봉명서원, 안변 옥동서원 등에 제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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