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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金尙憲]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

1570년(선조 3) ~ 1652년(효종 3)

김상헌 대표 이미지

김상헌 선생 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조선시대 절의의 대표자

근엄한 학자, 꼿꼿한 태도, 대쪽 같은 원칙. 우리가 흔히 선비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에 가장 부합하는 역사 속의 인물은 바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일 것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두 차례의 호란을 목도하며, 아무리 상대방의 세력이 강성해도 절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은 선비. 청음 김상헌은 당시의 어느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대쪽 같은 삶을 살았다. 그의 이 절개와 의리는 조선 학자들에게 높이 평가받았으며, 19세기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가 가능했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2 오랑캐에 짓밟힌 국토

김상헌이 살다간 시대, 조선의 국토는 소위 오랑캐들에게 유린당했다. 당시 동아시아는 명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 질서의 영향 속에 있었다. 당시 명은 유교문명의 담지자이자 주변국 중 가장 강대하였기 때문에 조선이 이 중화질서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명에 못지않은 문명국이라 자처하였던 조선은 소중화라 자칭하며 그 자부심을 표현하였다. 주변의 왜나 여진의 부족은 조선의 변방을 약탈하는 무리에 불과했기 때문에 조선은 그들을 오랑캐라 부르며 아직 제대로 된 문명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이러한 조선의 인식은 무참히 박살났다.

끝없이 이어진 전란 끝에 일본 전 국토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총 끝을 조선과 명으로 향하였다. ‘명으로 이어지는 길을 터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를 조선은 당연히 거절하고 나름의 전쟁 준비도 갖추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의 군대는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왜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주로 기마민족과 상대해왔던 조선의 정예군은 조총을 앞세운 왜군의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순식간에 전 국토는 왜군의 손에 들어갔다. 국왕 선조[조선](宣祖)는 압록강을 넘어 피난하는 것을 고려할 정도였다. 명의 도움과 이순신의 활약, 각지에서 이어진 의병의 궐기로 조선은 끝내 나라를 지킬 수 있었으나,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임진왜란의 피해를 막 회복해가고 있을 무렵, 설상가상으로 북쪽 변방이 들끓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에 원군을 파견하며 국력을 손실한 명은 북방의 여진족에 대한 견제력을 상실했다. 여진족은 점차 강대해져 후금이라는 국가를 수립하고 중국 본토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내부적으로도 농민 반란에 시달리던 명에게 이들을 저지할 힘은 없었다. 여진족은 명으로의 침공을 위해 먼저 후방의 조선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두 차례의 호란이 발발하였다. 기마민족의 신속하고도 강력한 공격에 조선은 다시 한 번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포위되었던 인조는 항복을 선언하며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의 예를 행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였다. 머리를 땅에 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말에 인조[조선](仁祖)는 이마가 깨지도록 머리를 땅에 내려쳤다. 문명국을 자처하던 조선에게는 실로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중화의 담지자 명이 오랑캐 청에게 멸망당한 시대, 전통적인 중화질서가 흔들리던 시대, 스스로를 무장했던 가치관이 무너지던 시대, 조선 사람들은 수많은 선택을 강요당했다. 김상헌은 그 격동하던 시대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문명에 대한 신념과 절개를 지켜낸 인물이었다.

3 사림 가문으로

김상헌 이후 그의 가문, 소위 장동 김문은 사림(士林)을 대표하는 명문가로 성장하였지만, 김상헌 이전까지만 해도 오히려 훈구파(勳舊派)에 가까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상헌의 오대조 김계권(金係權)은 문종[조선](文宗)대 이조판서를 역임한 권맹손(權孟孫)의 사위가 되어 서울 장의동(현재 종로구 청운동)에 터를 잡았다. 그는 세조[조선](世祖)의 즉위를 도와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한성판관을 역임하여, 명문가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닦았다.

김계권의 첫째아들은 출가하여 불교의 승려가 되었는데 법명을 학조(學祖)라 하였다. 학조는 세조의 총애를 받은 당시 불교계의 대표적인 승려로 왕실과 명문가의 후원을 받은 인물이다. 김계권의 막내아들 김영수(金永銖)는 비록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음직으로 출사하여 사헌부장령 등을 지냈으나 활쏘기나 음악 등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고 많은 이들과 교유하였다.

김영수의 아들 김영(金瑛)과 김번(金璠)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그 중 김번은 주로 외직을 역임하였는데, 조부 김계권이 터를 잡았던 장의동 지역에서 거주하면서 가문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특히 그는 백부 학조에게 많은 재산을 상속받아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이루었다. 사림의 일원으로 대접받았던 형 김영에 비해 김번과 그의 아들 김생해(金生海)는 사치가 심하다는 이유로 다른 이들의 비판을 받았다. 한편, 김번은 죽은 후 경기도 양주의 석실에 안장되었다. 안동 김문과 석실의 인연은 후일 학계를 선도하게 되는 석실서원의 건립으로 이어진다.

김생해의 아들 김극효(金克孝)는 정광필(鄭光弼)의 손자 정유길(鄭惟吉)의 사위가 되어 사림의 명가와 인연을 맺었다. 사화의 시대를 거치며 조선 정치의 중심은 훈구에게서 사림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러한 변화를 김상헌에 이르기까지의 가계가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안동 김문이 사림의 명문으로 떠오르는 것은 김극효의 아들 김상용(金尙容), 김상헌의 대에 이르면서부터이다.

4 임진왜란과 초기 관직생활

김상헌은 1570년(선조 3) 6월 3일 서울 남쪽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1572년 그의 큰아버지 김대효가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러나 가정교육 등은 여전히 친아버지 김극효에게 받았다. 김극효가 외직에 부임될 때마다 이를 따라다녔으며, 9살이 되자 그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1585년(선조 18)에는 김상헌은 이황(李滉)의 문인 윤근수(尹根壽)에게 글을 배웠다고 한다. 김상헌은 또한 신흠(申欽), 이정구(李廷龜), 유근(柳根) 등 당대의 명사들에게서 수학하였으며, 홍서봉(洪瑞鳳), 이안눌(李安訥), 조희일(趙希逸), 장유(張維) 등과 교유하였다. 당대 학계의 중심에서 청운의 꿈을 키웠던 것이다.

그러나 순탄해보였던 김상헌의 인생에 급작스레 고난이 찾아왔다. 1591년(선조 24) 자신의 양육을 맡아주었던 할머니 이씨 부인이 세상을 떠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양주에 머물던 그는 부모님을 모시고 강원도로, 강화도로, 그리고 서산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피난길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겨우 2세에 불과한 아들을 잃기도 했다.

김상헌은 전란 중인 1596년(선조 2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다. 승문원, 세자시강원, 이조, 홍문관 등에서 재직하였던 그는 1601년 제주에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안무어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이때 지은 것이 바로 『남사록(南槎錄)』이다. 1602년(선조 35) 김상헌은 급작스레 고산도 찰방이라는 외직에 임명되었다. 김상헌은 이조에 있을 때에 유영경(柳永慶)이 대사헌이 되는 것을 극력 반대한 바 있었다. 이에 유영경이 앙심을 품고 김상헌을 외직에 보임한 것이다. 또한 그 당시 정인홍(鄭仁弘)이 실세가 되어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류들을 내쫓고 있었는데, 김상헌 또한 여기에 포함된 것이었다.

그는 대쪽 같은 성격으로 인해 이미 다루기 어려운 사람으로 분류되어 고생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는 파직되어 돌아온 후 1605년 경성판관에 제수되어 다시 한 번 북방으로 나섰다.

1607년(선조 40) 김상헌의 나이는 38세가 되었으나, 일찍이 잃은 아들을 제외하고는 후사가 없었다. 이에 형의 아들 김광찬(金光燦)을 후사로 삼아 대를 잇도록 하였다. 이듬해에는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면서 대북정권이 성립되었다. 김상헌은 이 시기 계속 벼슬에 제수되긴 하였으나 특별히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중 1611년(광해군 3) 3월 정인홍이 차자를 올려 이황과 이언적(李彦迪)의 행적을 비판하고 문묘에 종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이다.

이황과 이언적은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당시 남인의 사상적 뿌리이기도 했기에, 정국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당시 동부승지로 있던 김상헌은 동료들과 함께 선현을 무함하려 한다며 정인홍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결국 김상헌은 다시 외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그는 다시 연안도호부사로 옮겨갔으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옥사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당시 역모의 주모자로 몰린 김제남(金悌男)과 혼사를 맺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김상헌의 아들 김광찬은 김제남의 손자 사위였기 때문이다.

5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 및 북인정권이 축출되었다. 광해군 말기 김상헌은 친아버지, 친어머니, 어머니의 죽음을 연달아 당하여 양주의 석실에서 상을 치루고 있었다. 당시 그는 광해군의 비, 문성군부인 유씨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병간호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비록 쫓겨난 폐주와 폐비라 할지라도 예를 지켜야 한다는 김상헌의 원칙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조정에서는 대쪽 같은 성품으로 유명한 김상헌을 중용하려 하고 있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아직 상중인 그에게 기복하라는 명이 있었으며, 병조에 김상헌의 형 김상용이 있는데도 상피제(相避制)를 어기고 김상헌을 이조참의에 임명하려 하였다. 김상헌은 여러 차례 규례에 어긋난다고 고하며 결국 사임하였다. 이어 그는 대사간, 도승지 등을 역임하며 서인의 중추로 떠올랐다.

1626년에는 당시 가도(椵島)에 주둔해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조선이 후금과 내통하는 것 같다며 명 조정에 무고한 일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김상헌을 파견하여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여 명의 의혹을 없애고자 했고 김상헌은 이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였다. 김상헌이 아직 북경에 머물러 있을 때, 후금이 조선을 침공하였으니 바로 정묘호란이다. 김상헌은 이를 듣고 급히 명에 원군을 보낼 것을 상주하였으나, 다행히 조선과 후금 간의 화의가 성립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하기까지 김상헌은 대사헌, 대제학, 예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병자호란 직전에는 침략을 염려하여 북쪽의 방어 체제를 개편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의 예감은 현실이 되어 그 해 12월 청군은 다시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내달렸다.

병자호란 당시 김상헌은 척화파의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인조는 청군의 신속한 진격을 듣고 화의의 뜻을 내비추었으나, 김상헌은 이에 반대하였다. 싸우지도 않고 비굴한 말로 화의를 청한다면, 화의 또한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 바로 김상헌의 뜻이었다. 왕세자를 인질로 보내는 이야기가 나올 때에도 김상헌은 신하가 앞장서서 세자를 인질로 보내는 일을 건의할 수는 없다고 강력 주장하여 논의를 막았다.

남한산성에 포위되자 항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가 되었고, 결국 최명길(崔鳴吉)에 의해 화의를 청하는 국서가 만들어졌다. 이에 김상헌은 굴욕적인 국서를 찢어버리며 화의를 반대하였다. 본격적으로 화의가 진행되자 식사를 하지 않고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결국 인조는 성을 나와 항복하고 청 태종 앞에서 굴욕적인 예를 행하였다. 강화가 성립된 뒤, 강화도에 있던 김상용은 스스로 폭약에 불을 붙여 순절하였다. 어두운 시대에 형제의 의기가 밝게 빛난 것이다.

6 심양에서도 빛을 발한 절개

비록 시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평가가 있기는 해도, 김상헌은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으며, 또 그 결과에도 책임을 졌다. 청은 척화파의 주요 인물들을 압송하라고 지시했고, 안동에 내려와 있던 김상헌 또한 대표적인 척화파로 지목되어 1640년(인조 18) 북쪽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인조는 김상헌에게 편지와 모피를 내려 위로하였으나, 북쪽으로 끌려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때 김상헌은 서울을 떠나며 다시 서울을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내일을 노래하였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심양에서 적국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도 김상헌은 자신의 생각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그의 행적을 꼬치꼬치 캐묻는 적국의 관료에게 오히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전달하였다. 청의 관료들도 대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노인이라면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모진 추위에 갇혀있으면서도 김상헌의 뜻은 꺾이지 않았다. 당시 주화론의 대표자 최명길도 심양에 압송당한 처지였다. 두 대신은 이때 시를 주고받으며 서로 간에 쌓인 오해를 풀었다고 전해진다.

양대의 우정을 찾고,(從㝷兩世好)
백 년의 의심을 푼다.(頓釋百年疑)
-김상헌-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君心如石終難轉)
나의 도는 둥근 꼬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돈다.(吾道如環信所隨)
-최명길-

비록 아직도 자신의 입장이 옳다는 점은 분명히 하였으나, 서로 극렬하게 대치했던 상반된 두 입장이 결국은 모두 나라를 위한 행위였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7 절의의 상징으로

심양에 잡혀 있던 중 김상헌은 명의 멸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듬해 그는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 그는 주로 석실에 머물면서 벼슬이 내려져도 나아가지 않다가 1652년(효종 3) 6월 25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상용과 김상헌 두 형제의 절의는 당시 많은 사류들이 높이 추앙하는 바가 되어 안동 김문은 절의를 대표하는 가문으로 조선 정계에서 급성장하였다. 특히 김상헌의 후손 중에서 노론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연이어 배출되면서, 19세기 안동 김문 세도정치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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