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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金誠一]

퇴계의 학통을 잇다

1538년(중종 33) ~ 1593년(선조 26)

김성일 대표 이미지

학봉 신도비 및 묘방석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중종 전반기 기묘사림에 의해 일시적으로 사림정치가 개화하였으나 곧이어 이에 대한 반동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고 중종 후반기~명종대까지 척신정치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사림세력의 성장은 계속되어 드디어 명종[조선](明宗)의 사망과 선조[조선](宣祖)의 즉위를 계기로 정국을 장악, 사림정치를 본격적으로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조선성리학의 유종으로 높은 추임을 받고 있던 이황(李滉)도 선조 즉위후 출사하여 새로운 기대를 표하였으며 문하의 많은 인물들도 다투어 출사하였다. 이황의 문파는 학문적으로 주리론(主理論), 정치적으로 동인(東人)-남인(南人)으로 활약, 이 시기 개화한 사림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에 학봉 김성일이 있다. 그는 이황의 아낌을 받던 수제자로서 학문 보다는 실천에 강점을 보였고 출사후 실천적 행의 면에서 두드러진 행적을 보였다. 일본 통신사행에 참여한 후 왜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보고를 하여 물의를 빚기도 하였지만 경상도 일원에서 의병을 독려하고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이황 사후 이황문파의 학문적 정치적 성장에 큰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2 가계와 퇴계학파의 학통

김성일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다. 안동에 세거하던 사족 출신으로 고조 김한계(金漢啓)는 문종~단종대 부지승문원사를 지내다가 계유정난을 당해 귀향하였으며 증조 만근(萬謹)은 성균관 진사를 지냈고 할아버지는 예범(禮範)이다. 아버지 진(璡)은 1525년(중종 20) 사마시에 급제한 뒤 성균관에 유학하여 김인후 등과 교유하기도 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귀향하였다. 여흥 민씨(驪興 閔氏)와의 사이에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김명일(金明一), 김성일, 김복일(金復一) 다섯 아들을 두었다. 김성일은 1538년(중종 33) 안동 임하현(臨河縣) 천전리(川前里) 고택에서 태어났으며 권덕황(權德凰)의 딸 안동 권씨를 맞아 그 사이에 집(潗), 역(湙), 굉(浤) 3남과 3녀를 두었다.

김성일은 1556년(명종 11) 아우 김복일과 함께 풍기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공부하다가 당시 최고의 유종(儒宗)으로 큰 명성을 얻고 있던 이황에게 나아가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이황은 1501년생(연산군 7)으로 부친대의 연배였는데 명종 즉위초 을사사화를 겪으면서 뜻을 접고 귀향을 결심, 병약함을 구실로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로 은거하였다. 1548년(명종 3) 잠시 외직인 경상도 풍기군수로 나아갔는데 이때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었으니 소수서원이다. 이후 곧 풍기군수에서 퇴임하였고 계속되는 명종의 소환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1560년(명종 15)에는 고향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이처럼 김성일·김복일 형제가 성리학 공부를 시작할 즈음 안동 일대에서 이황의 명성이 더없이 높은 상태였기에 이들 형제의 배움에 대한 열의는 이황에게로 쏠려가게 되었다. 1556년(명종 11) 두 형제가 취학한 풍기 소수서원은 이황에 의해 중창된 곳으로 이곳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이황과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이황 문하에 입문한 이후 김성일은 스승의 큰 기대를 모으게 된다.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어 성균관으로 올라가서 공부하기도 하였으나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였으니 그의 스승에 대한 심복 정도를 짐작해보게 된다. 또한 이때 스승은 김성일에게 요순 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屛銘)’을 내려주었으니 이황의 도통이 김성일에게로 이어졌음을 알게 된다. 김성일의 생애는 스승 이황과 같은 학자적 면모 보다는 도학적 실천과 절의적 삶에 초점이 맞추어졌는데 이러한 면모가 오히려 이황의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체로 이황의 수제자로 김성일·유성룡(柳成龍)·조목(趙穆) 3인이 들어지는데, 이들은 학문적으로 이황의 주리론을 계승하였으며 스승의 사후 방대한 퇴계문파를 함께 이끌었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김성일과 유성룡은 비슷한 시기 출사하여 크게 입신하였는데 평생 학문·정치적 입장을 같이 하는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김성일은 더없이 강직하고 올곧은 성품이었는데, 이러한 성품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일화가 남아 전한다. 이황에게 나아가 배우던 시절인 1562년(명종 17) 무렵은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치성하던 때였는데, 문정왕후가 중종릉인 희릉(禧陵)을 이장하려 한 문제를 지적하였다. 원래 중종과 중종비 장경왕후는 희릉에 함께 안장되어 있었는데,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사후 자신이 중종과 함께 묻히기 위해 보우(普雨)의 말을 핑계하여 문정왕후와 보우의 세력권이던 봉은사 근방의 정릉(靖陵)으로 중종릉만을 따로 떼어내어 이장하려 하였다. 당시 문정왕후의 위세에 눌려 아무도 이를 문제삼지 못하였는데 김성일은 일개 유생으로서 상소를 초하되 ‘문정왕후의 개인적 욕심을 위해 오랫동안 합장되어온 희릉을 분리하는 문제,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는 문제, 요승의 사특한 말 때문에 경솔하게 국가의 대사를 그르치는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였다. 비록 부친의 반대로 상소를 올리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곧은 성품을 알게 된다.

그의 성품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다. 실록 중의 “성일은 강의(剛毅)·독실하여 풍도가 엄숙하고 단정하였으며 너무 곧아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으나 대절(大節)이 드높아 사람들의 이의가 없었다”라는 기록이나, “젊어서부터 격앙하고 강개하여 기절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조정에 있을 때에는 기탄없이 탄핵하였으므로 사대부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는 평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성품이 그의 출사 이후의 행로에 한결같이 반영됨으로써 많은 사단을 만들어내게 된다.

3 선조초 사림정치와 출사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김성일은 1568년(선조 1) 증광문과를 통해 출사하게 된다. 그의 출사는 명종의 죽음과 신왕 선조의 즉위라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탄 것이었다.

중종전반기 기묘사림의 개혁정치로 사림정치가 일시 개화하기도 하였지만 곧 이에 대한 반동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이후 중종 후반기부터 명종대까지는 척신정치가 계속되었다. 특히 명종대에는 왕의 모후인 문정왕후와 왕의 외숙인 윤원형에 의해 정치가 농단되면서 척신정치는 파행적인 형태로 흘러가게 되는데, 그 시작이 바로 명종 즉위 직후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였다. 기묘사화 이후 다시 대규모의 사화가 불어닥친 것으로 중종후반기 이래 점진적으로 성장해왔던 사림들이 다시 한번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김성일의 스승 이황도 이때 은거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대 20여년 계속된 척신정치는 명종의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아들이 없었던 명종은 족질인 하성군(河城君)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니 곧 선조이다. 하성군은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소생으로 중종의 일곱째 아들이 되는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이다. 하성군은 애초 왕위계승 서열에서 한참 먼 존재였기에 주변에 척신세력이 없었고 어린시절 궐밖에서 성장한 탓에 성리학과 사림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이러한 성향의 선조가 즉위함으로써 사림세력이 새롭게 정국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점차 오랜 척신정치의 잔재가 사라져가게 된다.

이처럼 상황이 달라지게 되자 명종대 굳이 은거를 고집하던 김성일의 스승 이황도 선조가 즉위한 다음달인 7월에 예조판서겸지경연사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왔고 선조에게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바침으로써 사림들의 높은 기대를 대변하였다. 이황의 수제자인 김성일의 출사는 이러한 스승의 판단과 행로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김성일은 1568년(선조 1) 문과 합격을 통해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초임된 이래 이듬해 예문관검열·대교, 이조·병조의 좌랑 등을 거쳤으며 1576년(선조 9)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77년(선조 10)에는 종계변무(宗系辨誣 : 조선 건국초 이래 명의 기록에 잘못되어 있는 태조 이성계의 가계 수정을 요청한 일)를 위한 명나라 사행에 서장관으로 참여하기도 하는 등 관료로서 착실한 성장을 하였다. 이처럼 김성일은 깊은 학문적 소양에다 실무적 능력도 겸비한 중진 관료로서 착실한 성장을 하기도 했지만 그의 관직 생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강개한 언론이다.

먼저 1572년(선조 5) 예문관봉교로서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 단종릉)으로 봉축할 것,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채용할 것을 진언하였다. 이는 사림들의 오랜 공의였는데, 김성일이 이황의 수제자로서 사림들의 공의를 대변하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후 김성일의 언론은 더욱 원칙적이고 과격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가령 1573년(선조 6) 형조좌랑·예조좌랑·사간원정언을 지냈는데 이때 경연에서 선조에게 요순과 같은 임금이라고 아부하는 논의가 나오자 김성일은 ‘요순이 될 수도 있고 걸주가 될 수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선조가 그 의미를 묻자 김성일은 ‘선조가 요순의 자질이 있지만 신하들의 간언을 거부하는 병통은 걸주가 망한 까닭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극언을 하였고 사태는 동석한 유성룡에 의해 겨우 수습되었다.

1574년(선조 7)에는 사간원정언으로서 우의정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한 자리에서 그가 변방의 장수에게 초피덧저고리(貂裘)를 받은 잘못을 탄핵하였다. 김성일은 평소에 노수신과 친하였는데도 이렇듯 직언을 하므로 노수신이 김성일로 인해 ‘고도(古道)가 다시 오늘날에 보인다’며 되려 칭찬을 해주었다고 한다.

1579(선조 12) 사헌부장령이 되었을 때에는 임금의 면전에서 과감하게 간언하고 탄핵하여 사람들이 그를 ‘조정의 호랑이(殿上虎)’라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 기록은 김성일의 강직한 성품에 대한 일화 정도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 사림정치가 진전되어가고 있던 시대상황과 관련해서 본다면 국왕의 면전에서 유교 왕정의 이상인 요순지치를 강력하게 요구하거나 성리학의 도학적 기준에 철저한 비판이나 탄핵 행위를 통해 도학정치의 당위성을 피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곧 이처럼 과격한 언론을 행사한 김성일이 ‘조정의 호랑이(殿上虎)’라는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조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이즈음 사림정치가 크게 진전되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성일은 당시 쟁쟁한 많은 사림인사들과 함께 사림정치로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선두주자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또한 나주목사 재직시 나주 금성산(錦城山) 기슭에 터를 잡은 다음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창건하였는데, 규모와 학령은 일체 주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예를 따랐으며 여기에 사우를 세워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였다.

이는 스승 이황이 소수서원을 키워낸 사례를 전적으로 따른 것이었다. 특히 이곳에 당시 사림들에게 조선성리학의 조종으로 평가받던 4현(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에다 스승인 이황을 더하여 5현을 종향하였던 점은 더욱 의미가 깊다. 김성일의 의도대로 향후 조선성리학의 조종으로 5현이 자리잡게 되었고 이러한 논의는 공론화의 과정을 거쳐 결국 1610년(광해군 2) 5현의 문묘종향으로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1586년(선조 19) 나주 사직단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여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스승의 유고인 『퇴계집』 정리·편찬을 주도하였다. 당시 퇴계 문집의 원고가 모이기는 하였으나 미처 탈고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1588년(선조 21) 김성일이 주관하여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그의 생애 전반이 스승 이황의 학문을 실천하고 드러내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음을 알게 된다.

4 동·서·남·북 분당과 동인의 당색

선조대 사림정치가 진전되고 사림세력이 성장하면서 그 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게 사림세력 내에서의 세력 분기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선조대 점진적으로 진행된 동·서·남·북 분당이 그러한데 그 시작은 동·서의 분당이다.

1575년(선조 8년) 무렵 이즈음 크게 성장한 사림세력 내에서 척신정치 척결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는데, 구체적으로는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대결 구도로 드러났다.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인 심의겸은 명종대 척신정치의 분위기속에서 성장하였고 김효원은 이황과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새롭게 등장한 사류였기에 이들의 대립은 자연스럽게 척신정치 척결에 대한 입장 차이로 전화하게 되었다. 심의겸을 지지하는 측은 서인으로 불리었는데 상대적으로 노성한 부류였고 학통적으로는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들이 많았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측은 동인으로 불리었는데, 상대적으로 연소한 부류였고 학통적으로는 서경덕(徐敬德), 이황, 조식의 문인들이 많았다. 이때 이황의 수제자로서 조정에 출사해있던 유성룡과 김성일은 자연스럽게 동인에 참여하게 된다.

동인은 학통 면에서 서경덕, 조식, 이황 등 상대적으로 여러 계열이 뒤섞여 있었기에 그 안에서 학문적 정치적 입장 차이가 적지 않았다. 특히 동인의 영수 역할을 하던 이발(李潑)은 서경덕학파 민순(閔純)의 문인으로 조식에게 배우기도 했다. 이에 조식의 수제자인 정인홍(鄭仁弘), 최영경(崔永慶) 등 조식 계열과는 친밀하였으나 유성룡을 위시하여 이황 계열과는 거리가 있었다. ‘일찍이 유성룡과 이발이 틈이 있었는데, 유성룡 일파 이하 김성일·이성중(李誠中)·이덕형(李德馨) 등이고 이발 일파는 이발 이하 정여립(鄭汝立)·최영경·정인홍 등으로 서로 배척하였지만 형적은 드러나지 않았다’는 기록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동·서의 대립과 갈등은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로 폭발하게 된다. 동인 중에서도 이발계였던 정여립은 중앙에서 서인과 불화하다가 귀향한 후 대동계(大同契)라는 조직을 만들어 세력을 전국적으로 확장하였는데, 서인들은 이를 역모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옥사를 벌였다. 강경 서인인 정철(鄭澈)이 위관이 되어 옥사를 엄히 다스려 기축옥사 이후 3년간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또는 동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자가 무려 1천여인에 이르게 되었다.

김성일은 동인 중에서도 이황학파 유성룡계였기에 직접적으로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처벌되지는 않았으나 옥사가 과하게 확대되는 부분을 문제삼고 억울하게 연루된 동인계 인사 최영경을 비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한다. 곧 기축옥사 이듬해인 1590년(선조 23) 서인들은 정여립 일당의 공술에서 나왔던 길삼봉(吉三峯)이라는 인물이 곧 동인 최영경이라고 무고하였다.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동인계의 중망을 모으고 있던 진주의 최영경이 기축옥의 실제 모주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최영경은 옥사하였는데, 당시 정적 정철과의 사이가 특히 좋지 않아 그의 사주로 인해 죽은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무고에 대한 정황이 분명하였으나 대신 이하 어떠한 사람도 선조에게 이러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였는데 김성일이 나서서 억울하게 무함당한 상황을 일일이 진달하였다. 결국 이듬해 이 사건이 무고임이 밝혀졌고 1591년(선조 24)에는 최영경이 신원되었다.

기축옥사를 통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발계, 곧 서경덕·조식계에서는 이후 서인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고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이황계에서는 서인에 대한 입장도 상대적으로 유화적이었는데 이러한 입장 차이로 인해 서경덕·조식계는 북인(北人), 이황계는 남인으로 재차 당색이 나뉘게 되었다. 김성일은 유성룡과 함께 동인에 속해 있었으나 기축옥사 이후 동인내 남·북 분당이 일어날 때 남인을 이루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당시는 남북간의 대립이 그다지 심하지 않고 또 사건으로 드러나지도 않았다.

이처럼 아직 당쟁이 본격화하기 이전이기도 하였지만 김성일의 성품 또한 강직한 성리학적 원칙주의자로서 당색을 내세우는 것을 꺼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조정에 이미 남인·북인의 설이 있어 서인을 치우치게 배척하는 것을 북인이라 하고 피차를 참용하는 것을 남인이라 하였다. 김성일은 강직 개결한 사람이어서 혹 치우치게 배척하는 논의를 주장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 들어와서는 ‘자기와 의논이 다른 사람이라도 반드시 다 소인은 아니고 자기와 의논이 같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다 군자는 아니다. 피차를 논하지 말고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불초한 사람을 버리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는 기록은 이러한 그의 입지를 잘 보여준다.

5 통신사행과 임진왜란시의 전역

조선 개국후 오랜 평화기를 지나 선조대 무렵 동아시아 일원은 새로운 격동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특히 일본 열도로 부터 풍신수길의 집권 이후 심상찮은 분위기가 계속 감지되었기에 조선 조정에서는 1590년(선조 22)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게 된다. 이때 김성일은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을 수행하는 부사(副使)로서 사행에 참여하였다. 왜사들은 사행 기간 내내 황윤길 일단에게 매우 무례한 행동을 하였는데 김성일은 그대로 넘어가는 법이 없이 조목 조목 오류를 지적하여 바로 잡았다. 특히 풍신수길의 서계(書契)에서 전하(殿下) 대신 합하(閤下), 예폐(禮幣) 대신 방물(方物)이라 하며 또 ‘곧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갈 것이니 귀국은 앞서 입조(入朝)하라’는 등의 말이 있었다. 김성일은 서계를 고칠 것을 강력히 요구하여 사태를 원만히 해결하고자 하는 황윤길 등과 대립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1591년(선조 23) 귀국한 황윤길 일행은 일본의 정세를 선조에게 보고하게 되는데, 정사 황윤길은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반면 부사 김성일은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미가 없다며 상반된 견해를 밝히게 되는데 이처럼 잘못된 판단은 그에게 큰 실패를 안겨주게 된다. 1592년(선조 25) 김성일은 형조참의를 거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임진왜란을 맞게 된다. 불의의 침공에 깜짝 놀란 조선 조정에서는 우선 김성일의 잘못된 보고를 문제삼아 그를 파직, 국문하게 하였다. 김성일이 서울로 소환되고 있던 중, 유성룡이 김성일이 경상도의 민심을 수습할 수 있는 적임이기 때문에 과거의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김성일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직산에서 다시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어 경상도로 돌아가게 된다.

김성일은 가장 먼저 의령 지역에서 분기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였으며 함양·산음·단성·삼가·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고령의 전좌랑 김면(金沔), 합천의 전장령 정인홍, 현풍의 전군수 곽율(郭慄) 등이 호응해 옴으로써 경상도 일원의 의병활동은 크게 고무되었다. 또한 흩어진 관군들을 수습하여 의병과 조화시킴으로써 전투력을 강화하는데도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경상좌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과 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이때 왜군이 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진주성을 집중 공략하기로 하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하여 진주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9월말이 되자 왜군 2만여명은 창원과 함안을 거쳐 2갈래로 나누어 진주를 향해 공격하였는데 당시 진주에는 관군 3천여 명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이에 김성일은 각지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10월 5일 왜군 선봉대가 진주에 이르자 진주의 남녀노소 주민들까지 무장시킨 후 관군과 의병의 합동작전을 통해 일사분란하게 전쟁을 수행, 승전을 이끌어 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1차 진주성전투(진주대첩)으로 임난시의 3대첩중 하나로 이름이 높다.

진주성에서의 승리로 인해 김성일은 ‘평소 군대와 관련한 일은 잘 알지 못했으나 지성으로 군중을 효유하고 관군과 의병을 잘 조화시켜 통솔함으로써 경상도 지역을 1년 넘게 보전시킬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계속된 병란으로 기근이 계속되고 전염병까지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 와중에서 김성일은 밤낮으로 수고하다가 자신도 병에 전염되어 사망하고 만다. 임종 당시 아들 김혁(金㴒)도 함께 병에 걸려 옆방에 있었으나 한 번도 그에 대해 묻지 않고 오직 군정에 대해서만 말하였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이후 경상우도 지역의 군대 통솔에 동요가 생기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6 녹훈과 후대의 평가

왜란이 끝난 후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을 녹훈하였는데, 이때 김성일이 제외되었으며 이듬해인 1605년(선조 38)에 신하들이 아뢰어 원종(原從) 1등공신이 되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는 김성일이 임진왜란의 전역을 수행하다 사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통신사행시 정세를 잘못 보고한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사정을 보여준다.

1607년(선조 40)에 김성일의 고향인 임하현 천전리(川前里)에 그를 모신 존현사(尊賢祠) 및 임천서원(臨川書院)이 건립되었다. 이는 1618년(광해 10)에 사액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08년에 이르러 복원되었다.

그의 글은 전란통에 거의 일실되었으며 『해사록(海槎錄)』과 『상례고증(喪禮考證)』정도만이 남게 되었다. 『해사록』은 일본 사행시에 지은 시문집이며 『상례고증』은 부친상을 경험하면서 정리한 상례서로서 1581년(선조 14)에 완성되었는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기준으로 『두씨통전(杜氏通典)』·『구씨의절(丘氏儀節)』·『향교예집(鄕校禮輯)』등을 두루 참고, 퇴계학파의 예학적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1649년(인조 27) 일실된 그의 글들이 수습되어 『학봉집』이 발간된 이래 1851년(철종 2)에 원집·속집·부록 및 남은 글들이 재차 수습되어 임천서원에서 완본 『학봉전집(鶴峯全集)』이 발간되었다. 1664년(현종 5)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1679년(숙종 5)에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이황의 적통으로서 김성일의 학통은 대체로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져 퇴계학파의 주축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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