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김시민

김시민[金時敏]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 전투의 주역

1554년(명종 9) ~ 1592년(선조 25)

김시민 대표 이미지

김시민 선무공신 교서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문무 겸비 집안에서 태어나다

김시민은 1554(명종 9) 을사명현의 한 사람인 김충갑(金忠甲)과 참봉 이성춘(李成春)의 딸 창평이씨 사이에서 6남 2녀 중 3남으로 충청도 목천현 백전촌에서 태어났다. 목천은 지금의 천안이다. 김시민의 집안 안동김씨가 천안에 정착하게 된 연유는 목천읍지인 『대록지(大麓誌)』에 밝혀져 있다. 김시민의 부친 김충갑이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20여 년간 이곳 천안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부인 창평이씨를 만나 혼인하고 김시민도 이곳에서 낳은 것이었다.

김시민의 가계를 살펴보면 문무를 겸비한 명문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김시민은 고려시대 충렬공 김방경(金方慶) 장군의 12대손이다. 김시민의 조부 김석은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기묘사화로 관직을 떠났다. 부친 김충갑 역시 성리학을 수학하여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형제 효갑, 우갑, 제갑, 인갑과 함께 ‘오갑’이라 불리었다. 또 김시민, 김시양(金時讓), 김치(金緻), 김소, 김휘(金徽) 등 김시민 집안 다섯 사람이 도원수로 활동하였다. 김시민의 양자 김치는 광해군 때 근신하다가 인조반정 후 재기용되었고, 손자 김득신(金得臣)은 조선 팔대 문장으로 지목되는 문장가이다.

2 상무기질이 넘쳤던 소년

김시민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였고 기골이 장대하였다. 병정놀이를 좋아하였는데 언제나 대장이 되어 아이들을 지휘하였다. 김시민이 8세 때 길가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원님(천안군수) 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고 하자, “한 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할 수 있느냐?” 고 당당하게 호령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김시민의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고는 관속들에게 “이곳을 피해서 가라! 이 아이는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다.” 라며 길을 비켜 지나갔다고 한다.

또 김시민이 9세 때 백전촌 앞 냇가 큰 바위의 굴 속에 이무기가 살면서 수시로 출몰하여 사람이나 가축을 해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김시민은 그 뱀의 퇴치를 궁리하다가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냇가로 가서 바위 위에 올라가게 하여 그림자를 물에 비추며 어른거리게 하여 뱀을 나타나게 유도한 후 재빠르게 손수 만든 화살로 쏘아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 곳은 김시민이 뱀을 쏘아 죽인 곳이라 하여 ‘사사처(射蛇處’)라 명명하여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일화들은 충무공의 상무정신과 용맹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3 진주성 전투에 앞서 세운 무공

김시민은 1578(선조 11)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에 임명되었다. 당시 무너진 군기와 방치되어 녹슨 병기를 보고 군정이 문란함에 대하여 분개하며 대책을 강구할 것을 병조판서에게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가 태평성대에 군기를 보수하고 훈련을 강화하라는 것은 백성들을 두려움 속에 몰아넣는 망언이라고 질책만 받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어려서부터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김시민은 관직에 나가서도 권력에 영합하거나 권력의 힘을 빌려 출세를 도모하지 않았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는 끝까지 관철시키려는 강직함을 보여주었다.

1583(선조 16) 조선 초에 귀화한 여진인 니탕개가 난을 일으키자 황해도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이순신, 신립(申砬), 이억기(李億祺) 등과 함께 출정하여 무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으로 김시민은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1591(선조 24) 동인인 정언신과 서인인 조헌으로부터 동시에 천거 받아 진주판관으로 부임하였다. 당파의 이해관계를 넘어 재능 있는 장수로 인정받은 것이었다. 진주는 본래부터 호족이 많아서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그가 부임한 후 공명정대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고 덕의를 베풀어 위엄을 세우니 수하의 장병과 관속 및 백성들이 모두 감동하여 따랐다고 한다. 김시민은 진주판관으로 재임시 사천현감 정득열(鄭得說) 등과 함께 사천, 고성, 진해의 적을 무찔러 여러 고을을 지키는 등 무공도 세웠다. 이와 같이 김시민은 진주판관으로서 진주의 주민을 안정시키고 진주를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진주목사로 승진하였다. 또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잡은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4 진주성 전투에서 빛난 김시민의 전술과 전략

제1차 진주성 전투는 1592년(선조 25) 10월에 있었다.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천여 명의 조선군은 3만여 명의 왜군을 맞아 승리하였다. 진주대첩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의 전략과 전술은 크게 빛이 났다. 미리 화약 500여 근을 준비하고 총 70여 자루를 제작하여 사용법을 훈련시켜 두고, 의병과 관군 등 성 밖의 구원병들과 긴밀히 연락하여 협공체제를 유지하는가 하면, 심야에는 악공에게 거문고를 타고 퉁소를 불게 하여 아군은 안정시키고 적군에게는 향수를 일으켜 동요시키는 고도의 심리전도 사용하였다. 비격진천뢰, 현자총통, 질려포 등의 신식무기는 공격의 효율을 최대로 끌어올려 적에게 치명상을 입혔고, 돌을 던지거나 화약을 짚으로 싸서 던지고 물을 끓여 적에게 붓는 등 재래의 전투방법도 적절히 활용하였다. 또 노약자와 부녀자에게 남장을 시켜 군사로 보이도록 위장하고, 적에게 잡혔다가 탈출한 자들을 통해 파악한 정보로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첩보전을 펼쳤으며, 허수아비를 만들어 적을 기만하였을 뿐만 아니라 허수아비에 쏜 적의 화살을 힘들이지 않고 얻는 등 다채로운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였다.

왜군은 총공격을 감행하면서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를 대고 성벽을 기어올랐고 3층 높이의 산대를 만들어 바퀴를 달아 밀고 들어오면서 조총과 화살을 성안으로 퍼부어 댔다. 이때 현자총통으로 산대를 붕괴시켰다. 또 소나무 가지를 높이 쌓아 올린 언덕을 보고 해자를 메우려는 왜군의 계책임을 간파한 후에는 화약 봉지에 불을 붙여 소나무 가지 더미를 모두 태워 버렸다.

한편 왜적들이 진주를 포위하며 육박하는 과정에서 패배하여 철수하던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이 진주성으로 진입하려고 하였을 때 김시민은 위급한 시기에 갑자기 명령체계가 바뀌면 전열이 흐트러질 수 있다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목사(정3품)가 상급 지휘관인 병사(종2품)의 입성을 거부한 것이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수성장의 고유 권한으로 인정되었다고는 하나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 일을 두고 곽재우는 감탄하면서 “김시민의 계책이 성을 지키기에 충분하니 진주 사람들의 복이다.” 라고 하였다 한다.

김시민은 수하의 군사들을 지휘할 뿐만 아니라 아내와 함께 직접 먹을 것을 가지고 성을 돌아다니며 먹이고 밤낮없이 분투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죽기로 싸웠다고 한다.

이처럼 김시민의 다양한 전략 전술의 구사를 통한 효율적인 전쟁 수행 능력과 솔선수범하여 헌신하는 리더십은 전투력의 극대화를 이끌어냈다.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은 당시 진주성 전투에 대하여 임금께 보고하며 진주목사 김시민은 군사와 백성들에게 인심을 얻었으므로 성을 수호하고 적을 물리친 것이 모두 그의 공로라고 치하하였다.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가 마무리될 즈음 성 안 적군의 시신을 돌아보던 김시민 장군은 시신들 틈에 숨어 있던 왜군이 쏜 유탄을 이마에 맞고 승리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패전을 받아들인 왜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나 수성장이 쓰러진 진주성은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이 대신 지휘관이 되어 분전하였다. 김시민 장군이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자 슬픔에 잠긴 진주성에는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곡하는 소리가 들렸고 진주성의 군민들은 1년이 넘도록 소찬을 먹었다고 한다. 김시민 장군에 대한 진주 사람들의 경애가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 있다.

5 진주성 전투 평가와 김시민 장군에 대한 추모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경상우도의 여러 고을과 곡창지대인 호남, 호서지방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고, 파죽지세로 몰고 오던 왜군의 기세를 꺾어 임진왜란의 양상을 바꿀 수 있었다. 진주성을 뚫어서 호남의 곡창을 군량 보급지로 삼아 육로로 공격하려던 적의 전략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왜군은 진주성 전투의 패배로 전략의 차질과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뒤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전투 패배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기어이 2차 진주성 전투를 감행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왜군에게 진주성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매우 잘 보여준다.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 승리이자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영호남 연결 교두보를 지킨 승리로서 김시민 장군이 일군 진주성 전투의 승리는 임진왜란의 전황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진주대첩의 성공은 김시민 장군에 의해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되었던 공성전의 결과로서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과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의 성공에 결코 못지않다.

1604(선조 37) 서울에서 의주까지 어가를 모신 사람을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왜적을 정벌한 장수들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하여 공신을 책봉할 때 김시민은 선무공신 2등에 올랐다. 당시 선무공신 1등은 이순신, 권율, 원균, 2등은 김시민 외에 신점(申點), 권응수(權應銖), 이정암(李廷馣), 이억기(李億祺), 3등은 정기원(鄭期遠), 권협(權悏), 유충원(柳忠瑗), 고언백(高彦伯), 이광악(李光岳), 조경(趙儆), 권준(權俊), 이순신(李純信), 기효근(奇孝謹), 이운룡(李雲龍) 등 총 18인이다.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중 김시민의 공이 가장 큰데 선무공신 2등에 책봉하는 것은 정론이 아니다.” 라고 하였고, 하담 김시양은 “진주대첩이 이충무공의 한산도대첩보다 큰 승리” 라고 주장하였으나 채택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실록에서 김시민의 졸기는 “김시민을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삼았는데, 얼마 뒤에 졸하였다.”고 간단히 한 줄로 처리되었다.

반면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는 김시민 장군에 대한 기록이 아주 상세하게 남아 있다. 『해동명장전』은 홍양호(洪良浩)가 1794년(정조 18)에 삼국시대부터 조선 인조대까지의 애국명장을 전기로 엮은 책인데 5권에 김시민 장군 기록이 있다. 김시민 장군에 대한 기록은 그의 사촌 동생 김시양이 종형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서술한 『하담잡기(荷潭雜記)』에도 남아 있다.

김시민은 1709년 (숙종 35)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1711(숙종 37)에는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위태로운 몸을 임금을 위해 바쳤으니 충(忠), 공격해온 적을 치고 치욕을 막았으니 무(武)’라는 뜻이었다. 충무공 시호를 받은 사람은 김시민 외에도 이순신, 남이(南怡), 정충신(鄭忠信) 등이 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유적으로는 김시민전성각적비(金時敏全城卻敵碑)가 있다. 일명 김시민장군전공비이다. 이 비는 김시민 장군이 공신 교서를 받은 후 15년 만인 1619년(광해군 11)에 진주목사로 부임한 남이흥(南以興)이 세웠다. 여기에는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의 활약과 그의 순절을 비통해하는 글이 새겨져있다.

김시민에 대한 제향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하여 1607년(선조 40) 사액을 받은 진주의 창렬사와 1824년(순조 24) 목천 유림들의 발의로 창건된 천안의 충렬사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밖에 1735년(영조 11) 실록 기사에 어사 박문수의 청으로 동래의 송상현(宋象賢) 사당에 김시민을 제사지내도록 하는 내용이 보인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