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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金時習]

최초의 한문 소설을 쓴 불운한 천재

1435년(세종 17) ~ 1493년(성종 24)

김시습 대표 이미지

김시습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자유로웠으나 자유롭지 못했던 희대의 천재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은 당대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세조[조선](世祖)의 왕위 찬탈을 불의라 여기고 단종[조선](端宗)에 대한 의리를 지켜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세상에 실망한 그는 평생 떠돌이 생활을 하며 많은 일화를 남기고 그만큼 많은 작품을 남겼다.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 역시 그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그 몸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웠지만, 시대의 아픔을 목도한 채 그 정신마저 자유롭지는 못했던 한 지식인의 삶을 김시습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2 평온과 혼란이 공존한 시대

김시습이 태어난 때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世宗)의 통치가 계속되던 시기였다. 세종은 이전 국왕들이 지속적으로 추진한 문물 제도의 정비라는 중요한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집현전(集賢殿)을 통해 뛰어난 인재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각종 의례 정비, 공법(貢法) 개혁 등을 통해 왕조 국가의 기틀을 단단히 다졌다.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 편찬,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 과학기술의 발달, 각종 서적의 편찬 등 문화적 성과 또한 실로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농법 개량, 무기 개발, 국토 개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뚜렷한 성취를 보인 시기이기도 하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조선](文宗) 또한 학문을 사랑하는 군주였다. 그는 아버지 세종이 이루어낸 각종 성취에 깊게 관여한 인물이기도 하였으며, 1445년(세종 27)부터는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각종 서무를 처리를 인계받았을 만큼 세종의 신임을 얻기도 했다. 이미 정치 수업을 수년 동안 받은 때문인지, 문종 시대의 정치 또한 안정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의 편찬도 주목할 만 한 성과였다. 그러나 문종은 몸이 허약하였고 세자 또한 나이가 어렸다는 점은 앞으로 찾아올 혼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1452년(문종 2) 문종이 재위 2년 4개월 만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자, 그의 아들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정치적 안정이 계속되던 시기, 단종에게 시간이 조금 더 허용되었더라면 우리는 다른 역사를 배우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단종이 재위하였을 당시에는 왕궁의 법도를 바로 잡아줄 대비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단종은 너무 어렸고, 단종의 숙부들은 너무 재능이 뛰어났다.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首陽大君),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 등 단종의 숙부들은 하나같이 그 재능이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그 중 수양대군은 야심마저 매우 컸다.

결국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 1) 10월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였다. 문종의 유지를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을 척살하였고, 이어 안평대군, 금성대군(錦城大君) 등 자신의 형제들을 차례로 유배 보낸 후 사사(賜死)하였다.

마침내 1455년(단종 3) 윤6월 11일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선위를 받아 조선의 제 7대 국왕으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김시습이 태어난 시기는 세종대 이후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번영이 계속되었으나, 계유정난과 함께 평온 속에 잠복해 있던 혼란이 분출된 시기였다.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 당시 인물들에게는 인생을 건 정치적 선택이 중요했다. 김시습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3 성군도 인정한 재주

김시습은 1435년(세종 17) 서울 성균관 근처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江陵)으로 신라 김주원(金周元)을 시조로 한다.

김주원은 명주 일대를 식읍으로 하였으며, 신라 왕위 계승의 후보자였을 정도로 세력가였다. 그 둘째 아들 김헌창(金憲昌)은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것을 불만으로 여겨 난을 일으켰다가 전사하였으나, 그의 가문 전체가 처벌받지는 않았고 이후로도 세력을 유지하였다. 김주원의 증손 김양(金陽)은 신라 민애왕(閔哀王) 대에 왕실에 내분이 있자 청해진에서 거병하여 신무왕(神武王)을 옹립하였다. 김시습의 가문은 신라, 고려대의 명문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김시습의 7대조 김칠초(金七貂)부터는 무반직을 주로 맡아, 김시습의 할아버지 김원간(金元侃)은 오위부장(五衛部將)을 지내고 아버지 김일성(金日省)은 음보(蔭補)로 충순위(忠順衛)에 봉해지는 데에 그쳤다.

무반직을 지내면서 점차 한미해진 집안에 비해 김시습이 타고난 재능은 매우 뛰어났다. 시습이라는 이름은 이웃에 살던 최치운(崔致雲)이 지어준 것인데, 『논어(論語)』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구절에서 따 온 것이다. 김시습의 탄생과 관련하여서도 반궁리에서 공자가 태어나는 꿈을 꾸었다는 등 유학의 성인 공자와 관련된 일화가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자질이 공자와 비견될 정도로 대단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태어난 지 여덟 달 만에 글을 알았다. 두 살에 불과하였을 때, 이미 외할아버지에게서 시(詩)를 배우기 시작했고, 세 살이 되자 직접 시구를 짓기에 이르렀다. 김시습은 다섯 살 때에 이색(李穡)의 후손 이계전(李季甸)에게서 『중용(中庸)』, 『대학(大學)』 등 성리학의 기본 경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또한 시문으로 이름난 조수(趙須)에게서도 글을 배웠다.

김시습의 뛰어난 재주는 서울 저자거리에 널리 퍼졌으며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급기야 1439년(세종 21) 정승 허조(許稠)가 김시습을 찾아오기에 이른다. 70세의 노정승이 다섯 살의 신동을 시험하러 찾아온 것이다. 허조가 ‘늙을 노(老)자’를 이용해 시를 지어달라고 하자, 김시습은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은 것이다(老木開花心不老)’라는 시구를 읊어보였다. 허조는 어린 김시습의 당돌한 재주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어린 김시습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마침내 국왕 세종도 그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이에 승정원으로 하여금 시험해보도록 한 후 매우 감탄하여 비단을 선사하니, 어린 김시습이 비단 50필을 풀어 서로 엮은 뒤 허리춤에 묶고 끌고 나갔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태어나서 살아온 곳이 성균관 근처이기에 김시습의 이웃에는 당대의 이름난 학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열세 살이 되기까지 김시습은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김반(金泮), 겸사성(兼司成) 윤상(尹祥)에게서 성리학 경전을 배웠다. 순탄해보였던 김시습의 일생에 불행은 별안간 찾아왔다.

4 방랑길에 오르다.

1449년(세종 31) 김시습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의 모친 울진 장씨가 세상을 떠났다. 김시습은 이후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으나, 이를 마치기도 전에 그를 돌봐주던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이를 짧은 시간 동안 연속으로 잃은 슬픔은 매우 컸다. 아버지의 재혼 문제도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 게다가 새로 들어온 계모는 그에게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 때 김시습은 송광사(松廣寺)에 머물며 불교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한 때 출가하기도 하는 등 불교와 깊은 인연을 쌓았는데, 그 인연이 바로 이 때 시작한 것이다.

점차 마음의 안정을 찾은 김시습은 과거 공부에 매진하는 한편,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그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때는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한 해, 그는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해 마침내 계유정난이 일어나 수양대군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김시습의 스승 이계전은 수양대군의 거사에 적극 참여하여 일등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결국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선위를 받아 국왕의 지위에 올랐다.

이 때 김시습은 북한산(北漢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과거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는 크게 충격을 받아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사흘 동안이나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그는 책을 불사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때의 출발이 평생 동안의 방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단종의 밑에서 벼슬살이 한 번 하지 않았건만, 김시습은 마음으로 단종을 국왕으로 모신 채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 살았다.

정국은 계속 흉흉했다. 1456년(세조 2) 6월에는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지방에 머물던 김시습은 이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서울로 달려와 그들의 충절을 지킨 채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였다. 이들 사육신(死六臣)은 온 몸이 토막나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져 죽었으나, 분노한 세조를 두려워 한 나머지 아무도 나서서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거리에 나뒹굴던 이들의 시신이 사라졌다.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바로 김시습이었다. 그는 사육신의 충의를 추모하여 그들의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수습하여 노량진에 매장하였으니, 현재의 사육신묘(死六臣墓)가 바로 김시습이 이들의 시신을 매장한 곳이다.

김시습의 몸은 비록 자유롭게 방랑하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만은 사육신과 함께하였다. 김시습을 비롯해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켜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이들을 생육신(生六臣)이라 부른다.

사육신 사건의 여파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 또한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자신의 처사가 너무 가혹했음을 뉘우친 세조는 이듬해 계룡산(鷄龍山) 동학사(東鶴寺)에 초혼각을 세워 단종을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동학사로 가서 단종의 제사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5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다.

단종을 제사지낸 후, 김시습은 승려 차림을 한 채 각 지방을 유람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발길은 관서 지방을 거쳐 관동, 호서, 호남 등 전국 각지로 이어졌다. 그는 유람의 감회를 시로 읊었는데, 이 때 지어진 수많은 시가 아직도 그의 문집에 전하고 있다. 평생의 방랑길에 나선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김시습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만일 도(道)를 행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자기 한 몸만을 깨끗이 한다는 핑계로 인륜을 어지럽히는 것이 부끄러운 행위이지만, 만일 도를 행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자기 한 몸만을 선하게 하는 것도 용납할 수 있다.

숙부가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유학의 도를 행할 수 없는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행위란 없다는 사실을 김시습은 깨달았다. 이 난세에서 오로지 자기 한 몸만이라도 깨끗이 하며 방랑하는 것 또한 시대를 염려하는 지식인의 한 행동이 될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자신의 몸은 자유롭게 하였으나, 정신만은 시대로부터 한 번도 자유롭지 못했던 김시습의 일생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방랑을 계속하던 김시습은 1463년(세조 9) 책을 사기 위해 서울에 잠시 올라왔다가, 왕실의 어른이자 불교에 심취하였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추천으로 내불당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언해 사업에 잠시 참여하였다. 이후 김시습은 경주로 내려가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거주하다가, 효령대군의 요청으로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여하여 세조에게서 비로소 도첩(度牒)을 받았다. 명실상부한 승려가 된 것이다. 그러나 세조와의 인연은 이것 뿐, 도성 밖으로 떠나가는 김시습을 세조가 명을 내려 불러 세웠으나 그는 사양하고 도성 밖으로 기어이 떠나고야 말았다. 그의 절개를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김시습의 단종에 대한 절개는 어린 시절 세종에게서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금오산실에서 기거하면서 김시습은 문학 활동에 주력하였다.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은 것도 이 무렵이다. 은거하기를 수년, 세상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468년(세조 14)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조선](睿宗)이 즉위하였으나, 한 해만에 예종이 다시 승하, 성종[조선](成宗)이 즉위한 것이다. 세상의 변화는 김시습 일상의 변화로 이어졌다. 1472년(성종 3) 금오산에서의 은거를 끝내고 서울로 옮겨온 것이다.

서울에서도 김시습은 수년 동안 문학 활동에 주력하였으며, 도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1481년(성종 12)에는 돌연 환속하여 조부와 부친의 제사를 지낸 후, 안씨를 아내로 맞아 다시 가정을 꾸렸다.

이 시기 그는 성리학 연구에도 마음을 쏟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상이 변화하자 다시 유학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조정에 이바지하겠다는 마음을 잠시 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1483년(성종 14) 49세 때에 재혼한 안씨와 사별하였으며, 폐비 윤씨 사건으로 인해 다시 세상이 혼란스러워지자 두타(頭陀)의 행색으로 다시 방랑길에 오른 것이다. 만년에 그는 양양에 잠시 머무르다 1491년(성종24) 부여에 있는 무량사로 거처를 옮겼다. 그 해 3월 김시습은 무량사에서 방랑으로 점철된 한 생을 마치고 만다.

6 후대의 추모

김시습은 평생 처사로 방랑하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킨 그의 충정은 후대에 널리 인정받아 생육신으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김시습의 수많은 작품은 이세인(李世仁), 이자(李耔), 윤춘년(尹春年) 등의 노력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으며, 1582년(선조 15)에는 마침내 왕명으로 그의 유고를 정리하고 이이(李珥)가 전기를 지은 매월당집(梅月堂集)이 간행되었다. ‘유학에 마음을 두었으나 불교를 실천하였다’는 이이의 평가나, ‘유학을 실천하면서 불교의 자취를 남겼다’는 평가처럼 출가하여 승려로 살았던 김시습의 행적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김시습의 지조와 절개를 높이 평가하며 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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