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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국[金安國]

온건한 성리학자, 향약을 통한 점진적 개혁을 이루다

1478년(성종 9) ~ 1543년(중종 37)

김안국 대표 이미지

정속언해(목판본, 18세기 추정)

e뮤지엄(국립한글박물관)

1 머리말

김안국은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김굉필(金宏弼)의 도학(道學)을 전수받아 이후 조선사회의 주류로 성장한 성리학자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조광조가 기성정치세력과 대결하는 방식의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여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크게 화를 입었던 것과 달리 향약을 보급하는 등 비교적 온건한 방법을 통해 지역공동체가 성리학적 사회로 뿌리내리는데 공헌하였다.

2 김안국의 어린 시절과 관직 진출

김안국의 본관은 경상도 의성(義城), 호(號)는 모재(慕齋)이며, 자(字)는 국경(國卿)이다. 김안국은 1478년(성종 9) 8월 6일에 출생하였다. 김안국이 출생한 시기는 조선왕조가 성리학적인 사회로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 성종대 공론정치가 활성화되면서 성리학적 소양을 갖춘 많은 유학자들이 대거 언관(言官)에 진출했으며,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김안국과 같은 명민한 인재가 자신의 학문 방향을 성리학으로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던 김안국은 7세 때 이미 소학(小學)을 익혔고, 12세에 경사(經史)를 읽고 대의(大義)에 통달했다고 한다. 20세가 되기 전에 돌아가신 부모를 추모하여 ‘慕(모)’자로 호를 지었고, 출입 시에는 반드시 돌아가신 부모의 영(靈)에 고하는 등 부모의 생전에 못다 한 효성을 하는 한편 동문 종친들과는 친목을 도모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김안국은 젊은 시절 성리학에 심취하여 학문에 몰두하던 중에 김굉필의 가르침을 듣고 도학(道學)의 기초를 배웠고, 주자를 표준으로 삼았다. 또한 천문‧지리‧음양(陰陽)‧의학‧불서(佛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의 책까지도 그 이치를 깊이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501년(연산군 7년) 24세가 되었을 때 진사에 1등으로, 생원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1503년(연산군 9) 2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연산군(燕山君)이 폐위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연산군 때 파행적으로 운영되던 정치가 막을 내리고 개혁정치를 위한 길이 열렸다. 중종 즉위 이후 김안국은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등을 역임했다.

3 향약의 보급과 확대

김안국은 1516년(중종 11)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승진하였으며, 1517년(중종 12) 경상도관찰사에 재임하면서 향약(鄕約)을 보급하였다. 경상도관찰사로 풍속을 교화시키는 데에 기여한 김안국은 이듬해인 1518년(중종 13)년 임기를 마쳤고, 1519년(중종 14) 여름에 경상도관찰사 재임 기간 동안의 성과를 인정받아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김안국이 보급하고자 했던 향약은 ‘사(士)’를 중심으로 정치질서를 개편하여 지역의 자율성을 추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군주의 직접적인 행정력으로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士)’가 정치의 주체가 되어 백성들을 도덕적으로 교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성리학적 개혁에 가장 앞장섰던 이가 바로 김안국이다.

사신(史臣)은 『중종실록』에서 김안국이 1년간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교화에 치중하여 유생(儒生)들에게 먼저『소학(小學)』을 강독하도록 이끌었고,『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을 인출(印出) 배포하여 고을 사람들에게 권장하고 충신과 효자의 후손을 찾아내어 예로 우대하였으며, 모든 일을 자세히 밝히고 옥송(獄訟)을 분명하게 심리하되, 밤을 새워 아침까지 하면서 지칠 줄 모르니 수령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방자한 짓을 못했다고 논평하였다. 김안국은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선산부사(善山府使) 이희보(李希輔)의 도움을 받아 『여씨향약언해』를 간행하여 일반 백성들까지 향약을 널리 전파시키고자 하였다. 김안국은 이듬해 4월, 중종에게 자신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경상도 내에서 『여씨향약언해』를 인쇄 반포한 사실에 대해 상세히 밝혔다. 경상도의 풍속을 변화시키고자 『성리대전(性理大典)』에 실려 있으나 일반 백성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여씨향약』에 대한 언해본을 만들어 반포했다고 설명하자 중종은 여씨향약언해를 인쇄하여 전국에 반포하여 풍속의 교화를 증진시킬 것을 지시하였다. 김안국의 여씨향약언해 간행은 향약이 보급‧시행되는 출발점이자 중요한 계기였다. 이후 향약은 충청도까지 전파되어 시행되었고, 김안국이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전라도까지 확산되었다.

이렇게 빠르게 향약이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는 김안국의 인적 관계망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김굉필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인물들로 김안국 동생인 김정국(金正國), 이장곤(李長坤), 성세창(成世昌), 최충성(崔忠成) 등이 있으며, 성균관사성으로 재직하던 시절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조광조, 한충(韓忠), 김구(金絿), 윤자임(尹自任), 박훈(朴薰), 김식(金湜), 임권(任權) 등과 횡적 유대를 확대하기도 하였다. 이들과의 긴밀한 관계망으로 통해 김안국은 성리학에 대한 관심을 키울 수 있었고, 이들과의 만남이 향후 중앙과 지방의 개혁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4 기묘사화 이후의 은거생활

중종조의 개혁정치는 조광조가 1515년(중종 10)에 출사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 이전에 이미 출사해 있던 김안국은 조광조를 축으로 하는 ‘기묘인(己卯人)’들과 궤를 같이 하면서 그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그러나 모든 개혁안에 대해 같은 방식과 같은 강도로 대응한 것은 아니었고 사안과 상황에 따라 조금씩 입장을 달리하면서 유연히 대응하였다. 목표와 의지에 있어서는 동일했지만 접근방법과 추진강도에 있어서는 다소 입장을 달리하였기 때문에 훈구파에게는 같은 ‘기묘인’으로 인식되었으나, 사화(士禍) 과정에서는 수준을 달리하는 가벼운 처분을 받았다. 김안국은 훈구파가 지목한 사림파의 핵심인물 중 한 명으로 포함되었으며, 기묘사화 직후인 1519년(중종 14) 12월 치죄(治罪) 대상자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늘 개혁의 중심에 위치했음에도 파직(罷職) 수준의 가벼운 처분을 받게 된 것은 그의 개혁이 늘 온건한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조광조의 개혁성향은 급진적이어서 낡은 인습‧구제도를 혁파하여 새로운 통치체제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에 기성 정치인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반면 김안국은 온건적 개혁 성향으로 주로 성리학의 보급, 향약과 향교 교육을 통한 향촌 교화 등 새로운 가치질서 확립에 주력했기 때문에 상대 세력의 이해와 직접 충돌하는 사례가 적어서 비교적 가벼운 처분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개혁성향으로 인해 김안국은 조광조 계열을 넘어서는 넓은 교우범주를 가질 수 있기도 했다.

김안국은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519년(중종 14) 12월 중순 안당(安瑭)‧유운(柳雲) 등과 함께 파직되어 이천의 주촌(注村)과 여주의 폐천녕현(廢川寧縣) 별서(別墅) 및 이호(梨湖)에 은거하였다.

김안국은 기묘사화로 화를 입었지만 다만 파직, 낙향하여 향리에 은거한 것이어서 한양에 출입하는 것 역시 법적으로 규제된 상태는 아니었다. 김안국은 2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친 은거생활 속에서 그의 향리와 그 주변의 재지사족, 수령, 그의 문하에 모인 문생, 향리의 기층민, 현직 관리, 함께 화를 입은 동류들은 물론이고, 현실대응을 전혀 달리했던 보수성향의 인물들까지 넓은 교류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안국의 학문적 열정은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하던 시절 도내의 모든 향교를 순회하며 그 지역의 학문적 연원을 내세워 교생들을 고무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런 교육적 열정은 은거생활 중에 후진 교육과 향촌 교화를 통해 계속해서 이어졌다.

5 조정에 다시 돌아와 죽음을 맞다

1537년(중종 32) 훈구파의 권신인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사형에 처해지면서 김안국은 20년 만에 상호군겸동지성균관사(上護軍同兼知成均館事)로 다시 임명되어 조정에 돌아왔는데, 그의 나이는 이미 60세였다.

만년에 다시 돌아온 조정에서도 김안국은 예조판서, 예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병조판서, 예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등을 지냈다. 1542년(중종 37)에는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세자에게 경전을 가르치기도 했다. 같은 해 여름에 일본에서 사신이 오자 예조판서로 그들을 접대하였고, 겨울에 병이 위독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올릴 표전(表箋)을 직접 쓰면서 병은 더욱 위독해졌다. 결국 이듬해 1월 4일 죽음을 맞았다.

김안국은 김굉필의 도학(道學)을 이은 조광조와 더불어 당시의 성리학의 주류를 이룬 유학자였다. 중종이 즉위한 후 성리학적 이념에 따른 사회 개혁을 주도하였으며, 성리학을 발전시키고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백성의 교화를 위해 많은 언해본을 간행하였는데, 『여씨향약언해』를 제외하더라도 『정속언해(正俗諺解)』‧『농서언해(農書諺解)』‧『잠서언해(蠶書諺解)』‧『이륜행실도언해(二倫行實圖諺解)』등의 언해본 간행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경학(經學) 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많은 글을 남기고, 중국‧일본과의 외교문서 작성을 맡기도 하였다. 죽음 이후 그 공적을 인정받아 인종(仁宗)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기묘사화 이후 은거생활을 이어갔던 여주와 이천에 소재한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설봉서원(雪峰書院), 김안국의 본관인 의성에 있는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김안국의 문집인 『모재집(慕齋集)』은 1547년(선조 7)에 간행되었는데, 그 자세한 간행 경위는 유희춘(柳希春)의 서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희춘은 김안국의 문인으로 전라도관찰사를 지낼 때 김안국의 글들이 상자에 쌓인 채 간행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여 인출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실행하지 못하였고 그 후임 관찰사 김계휘(金繼輝)가 일을 주관하여 문집 편찬을 완성했다고 한다.

덕행과 문장, 넓은 인적 교류를 통해 많은 유생들이 그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특히 김인후(金麟厚), 송인수(宋麟壽), 유희춘, 정지운(鄭之雲) 등과 같은 학자들을 배출하여 조선의 성리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이유로 박세채는 김안국에 대해 “기묘사화로 단절될 뻔 했던 유학의 근본을 선생이 유지시켰다.”고 평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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