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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金麟厚]

호남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1510년(중종 4) ~ 1560년(명종 15)

김인후 대표 이미지

필암서원 확연루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조선의 사림정치가 부침을 거듭하던 중종~명종대 전라도 장성 출신의 사림학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조선후기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호남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문묘에까지 종향된, 조선시대 호남의 대표적인 성리학인이다. 시문학에 탁월한 소양을 보였음은 물론 주리론(主理論)에 기반한 성리학적 소양을 겸비하였다. 더 나아가 중종말·인종대 사림정치에 대한 새로운 기대 속에서 기묘사림의 신원을 주장하며 명종대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자 더 이상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여 절의로도 이름을 얻었다. 곧 조선중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본격화되고 사림정치가 뿌리내려가던 시기 시문학·성리학·실천적 절의론을 두루 겸비한 인물로서 후대인들의 평가를 받아 정조대에 이르러 문묘에까지 올랐다.

2 가계와 시문학적 조예

김인후의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湛齋)이 다. 5대조 김온(金穩)은 태조대 밀양부사를 지냈고 서울에서 살았는데 세자 책봉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남은 가족들은 전라도 장성으로 이주하여 재지사족이 되었다. 증조 김의강(金義剛)은 사온서직장, 조부 김환(金丸)은 금구훈도(金溝訓導)를 지냈다. 부친 김령(金齡)은 의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어머니는 옥천(玉川) 조씨이다. 1510년(중종 6)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인은 윤임형의 딸 여흥(驪興) 윤씨로 그 사이에 종룡(從龍)·종호(從虎) 등 2남 4녀를 두었다.

어린 시절 김인후는 워낙 총명하였으며 특히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5~6세 무렵부터 전라도 일대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기묘사림 조원기, 기준(奇遵) 등의 아낌을 받았고 김안국(金安國), 박상, 송순, 최산두 등에게 도학과 문학을 배웠다. 특히 10세 되던 해인 1519년(중종 14) 전라도 감사로 부임한 김안국이 그를 보고 칭찬하면서 『소학』을 가르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는데 이때 9년 연상의 이황(李滉)을 만나 돈독한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이황의 『퇴계집』에서는 ‘성균관 유학 당시는 기묘사화를 거친 후라서 성리학에 몰두하면 비웃음을 사는 풍조가 있었는데 오로지 김인후 한 사람과 상종할 뿐이었다’고 하였다.

이즈음 그는 성리학 보다는 시문학 방면에서 더 큰 재주를 발휘, 주로 이 방면에서 명성을 얻었다. 성균관 과시에 칠석부(七夕賦)를 지어서 장원함으로써 큰 명성을 얻었다고 하며, 1539년(중종 34)에는 당시 중국사신이 시를 잘 짓자 예조에서는 제술관을 차출하였는데, 당시 김인후가 진사로서 관직이 없어 차출하기가 어려워지자 예조에서 별도로 그의 차출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한 기록도 있다.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술과 시를 좋아했고, 마음이 관대하여 남들과 다투지 아니했으며 그가 뜻을 둔 바는 예의와 법도를 실천하려는 것이었으므로 감히 태만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모르는 자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상물정에 어두워 보일 정도로 술과 시를 좋아하며 마음이 관대하여 사람들과 대립하지 않았던 점은 김인후에 대한 이황의 평가중 ‘그가 처음 들어간 곳이 대체로 노장(老莊)이었기 중년에 자못 시와 술로 몸가짐을 무너뜨린 점을 애석히 여겼다’는 말과도 통한다. 곧 그는 애초 정통 성리학 보다는 노장학에 조예가 깊었고 그 선상에서 특히 시문학에 더 큰 재능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3 중종말 출사와 사림 인사로의 성장

김인후는 1531년(중종 26) 성균관에 입학한 후 오랜 수학기를 거쳐 1540년(중종 35)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별시문과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게 된다. 당시의 정국을 살펴보면 그의 뒤늦은 출사가 이해된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정국은 훈구세력 위주로 재편되었는데 특히 중종후반기로 가면서 훈구세력 내에서 척신세력이 새롭게 등장하였고 이들에 의해 정치가 농단되는 혼란한 정국이 이어졌다. 기묘사화후 정국 운영에서 국왕권이 정점에 놓이게 된 결과 차기 왕위 계승자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척신정치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곧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 소생인 세자(후의 인종[조선](仁宗))와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소생인 경원대군(후의 명종[조선](明宗))의 왕위 계승 경쟁을 둘러싸고 양측의 척신세력이 등장하여 쟁투하기 시작하였으니,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을 중심으로 한 대윤(大尹) 세력과 경원대군의 외숙인 윤원로·윤원형(尹元衡)을 중심으로 한 소윤(小尹) 세력의 대립이 그러하다.

중종 후반기 대·소윤간의 대립은 대·소윤의 대립 구도를 권력 장악의 수단으로 이용한 김안로(金安老)와 같은 권신세력의 등장으로 더욱 혼탁해졌다. 김안로는 중종의 맏딸이자 세자의 누나인 효혜공주와 결혼한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의 아버지이다. 처음에 아들이 부마가 되자 벼슬이 뛰어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권력을 농단하다 심정(沈貞)·이행 등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는 아들로 인해 세자의 인척이 된 자신의 처지를 십분 활용하여 정계에 복귀할 계획을 세웠다. 곧 문정왕후나 여러 비빈들에게서 지위를 위협받고 있던 ‘세자의 보호’를 내세운 것으로 그 과정에서 1527년(중종 22) 작서의 변(灼鼠-變)을 조작, 정국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작서의 변은 세자의 탄일에 쥐를 죽여 세자를 저주한 사건으로 조사 과정에서 경빈(敬嬪) 박씨(朴氏)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박씨와 그 소생인 복성군(福城君) 미, 경빈과 친밀했던 좌의정 심정이 사사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다. 결과적으로 ‘세자의 보호’를 내세운 김안로의 계획은 주효하였다. 1531년(중종 26) 중종은 세자의 보호를 위해 김안로를 다시 불러들였고 이후 김안로는 최고의 권신이 되어 권력을 농단하였다. 이렇게 김안로가 권력을 전횡하게 되자 정광필(鄭光弼)·이언적(李彦迪)·나세찬(羅世纘)·이행(李荇)·최명창(崔命昌)·박소(朴紹) 등 사림계 인사들은 김안로를 비판하다가 오히려 그의 농간으로 유배되거나 사사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당시 사림의 영수격 역할을 하던 이언적도 김안로 일파에게 관직에서 쫒겨났고 김안로 일파가 몰락할 때까지 꼼짝없이 고향 경주에 칩거해야 할 정도였다. 김인후가 성균관 유생이 되었던 1531년(중종 26)은 김안로가 정국에 재등장하였던 해이며 이때부터 많은 사림들이 고초를 당하였기에 김인후 또한 출사를 미루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해보게 된다.

김안로는 수년간 최고의 권신으로서 권력을 농단하다가 종내 경원대군을 둘러싼 문정왕후 및 윤원형 등의 소윤계와 대립하였고, 결국 1537년(중종 32)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정국에서 몰려나 사사되었다. 김안로가 사사되자 정계에서 밀려났던 사림계 인사들이 중종의 부름을 받고 중앙에 재등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김인후도 오랜 성균관 수업기를 마감하고 정계에 입문하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인후는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임용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저작이 되어 청요직에 올랐다. 이후 그는 1543년(중종 38년) 중종에게 기묘사림의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려 신예 사림으로서 사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여기서 그는 기묘사림인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김정(金淨)·기준(奇遵)·윤자임(尹自任)·한충(韓忠) 등에 대해 ‘한때 잘못한 일은 있더라도 그 본심은 나라를 속이지 않은 자들’이라며 이들이 아직 신원되고 있지 못한 문제를 지적하고 더 나아가 그들에 의해 강조된 『소학』이나 『여씨향약』 등이 폐기되고 있는 문제도 지적하였다.

상소 이틀 후에도 경연에 참여하여 중종에게 꼭 같은 내용을 진달하였는데 자리에 함께 있던 이언적이 이를 지지하여 ‘사화를 겪고 난 후 사람들이 교화를 말하기를 꺼려 사습(士習)이 글러지고 풍속이 어두워졌으니 점차 교화를 밝혀갈 것’을 말하였다.

이언적은 김인후 보다 20세 정도 연상으로 중종초 기묘사화는 물론 사화 이후의 척신정치를 두루 거치면서 새롭게 사림의 핵심 인사로서 성장, 중종의 신뢰를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위상을 지닌 이언적과 함께 그 후배 사류 중에서 김인후가 대표격이 되어 당시 가장 예민하고도 조심스러운 정치사안이었던 기묘사림의 신원 문제를 꺼낸 것으로 이를 통해 당시 김인후가 사림세력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나 비중 정도를 가늠해 보게 된다.

4 중종말 세자(인종)과의 인연과 사림정치에 대한 기대

김인후는 기묘사림의 신원을 논하여 여론을 주목받던 그 해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세자(후의 인종)을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게 된다.

세자는 온화한 성품에다 성리학에도 뛰어난 조예를 보였으며 유관(柳灌), 이언적 등 사림 인사들을 신뢰하였는데, 특히 김인후가 세자시강원에 근무하게 되자 그 인품을 아껴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된다. 세자는 김인후가 숙직하는 방에 가서 조용히 강론하기도 하고 또 『주자대전』을 하사하였다. 이외에도 자신이 손수 그린 묵죽도(墨竹圖) 한 폭을 내려주어 김인후가 이에 대해 시로 응답한 일화가 있는데 군신관계의 모범으로서 후대에 이르기까지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

김인후는 1544년(중종 39) 부모 봉양을 이유로 고향 장성 근방의 옥과현감으로 물러나 있던 중 중종이 사망하고 세자가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친사림적 성향의 세자가 신왕 인종으로 즉위하게 되자 기묘사화 이후 약세를 면치못하던 사림세력의 기대감은 고조되었다. 실제로도 인종은 즉위후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을 통해 사림들을 수용, 사림세력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이러할 때 인종과 누구보다도 돈독한 관계를 맺어 왔던 김인후의 기대 또한 남달랐을 것임을 짐작해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림들의 여망을 뒤로 하고 인종은 즉위후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더니 재위 9개월도 채 못되는 시점인 1545년(인종 원년) 7월 사망하고 말았다. 인종이 승하하자 김인후는 극히 슬퍼하며 병을 핑계삼아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으며 이후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종의 급작스러운 죽음에는 중종 후반기 이래 대·소윤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는데 김인후는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또 인종 사후 펼쳐질 반사림적 정국 변화를 즉각적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이다.

5 명종초 을사사화·정미사화와 은거

1545년(인종 원년) 7월 인종이 사망하자 그의 이복동생이자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이 불과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문정왕후와 소윤계 척신세력의 오랜 소원이 이루어지게 된 것인데, 더군다나 신왕이 너무 어려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정치를 행하게 되자 권력은 문정왕후와 소윤계 세력으로 급격히 옮겨갔다. 윤원로가 윤원형과의 세력다툼으로 밀려나 사사된 이후 소윤계는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鄭蘭貞)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수렴정치가 시작되자마자 오랜 정적인 대윤파 제거에 나서게 된다. 윤원형은 대윤계의 영수인 윤임, 또 윤임 일파인 영의정 유관·유인숙과 그 주변에 포진된 사림을 제거하기 위해 평소 이들에게 원한을 가진 정순붕(鄭順朋),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 허자(許磁), 최보한(崔輔漢) 등을 심복으로 삼아 계책을 꾸며 대윤 일파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역모죄에 몰린 대윤계는 하루아침에 몰락하게 되어 윤임·유관·유인숙이 사사되며 더 나아가 이들과 연결된 사림 인사들도 대거 피해를 보게 되었다. 김인후의 예견대로 다시 사화가 몰아닥친 것으로 곧 을사사화이다.

을사사화를 계기로 문정왕후의 수렴정치와 이기 등의 농간을 비난하는 여론이 크게 일었고 이러한 여론은 이듬해인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폭발하게 된다. 곧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단하니 나라의 멸망을 서서 기다릴 만하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라는 내용의 익명으로 된 벽서가 나붙자 문정왕후나 윤원형·이기 등은 그 문서의 진위를 따지거나 작성자를 색출하는 대신 이 모든 사태는 오로지 이전의 역적을 엄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옥사를 일으켰다.

문정왕후의 수렴정치와 이기 등의 농간을 비난하는 여론에 대해 소윤계는 오히려 이를 역이용, 재차 대윤계 및 대윤계와 연결된 사림세력들을 토색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윤임의 인척인 송인수(宋麟壽)·이약빙(李若氷)이 사사되고 권벌(權撥)·이언적·정자(鄭滋)·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 등 대윤계 사림인사 20여 명이 유배되었으며 이들 외에도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희생된 사림계 인물들이 많아 이는 정미사화(丁未士禍)로도 불리었다.

김인후는 고향 장성에서 이러한 상황을 모두 지켜보면서 재출사에 대한 뜻을 완전히 접게 된다. 그는 귀향후 맥동마을 자택 근처에 백화정(百花亭)을 짓고 평생 제자를 키우며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맥동마을에서의 은거 생활에 대해서는 주로 인종에 대한 충절 관련 전승이 남아 전해진다. 곧 백화정 뜰에 서면 먼 오른편으로 나지막한 난산(卵山)이 내다보이는데 김인후는 매년 인종의 기일인 7월 1일마다 여기에 올라 종일토록 북망통곡했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이를 기리는 김인후난산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1호)와 망곡단까지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슬픔은 일차적으로 자신을 알아주었던 인종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 때문일 수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다시금 밀어 닥친 사화로 사림들의 이상을 펼칠 수 없게 되어버린 정치 현실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비록 벼슬을 버리고 떠나갔지만 당시 정국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와 명망은 대단히 높아 명종대 조정에서는 지속적으로 그를 소환하게 된다. 1555년(명종 10) 경연에서 참찬관 정유길(鄭惟吉)이 명종에게 ‘요즘 학술과 문장을 지닌 사람들이 조정에 서기를 바라지 않는 사태’를 문제로 지적하였는데, 이때 학술이 있으면서도 물러간 사람으로는 이황, 문장이 있으면서도 나오지 않는 사람으로 김인후를 지목하였다.

이황과 김인후에 대한 소환 요청은 참찬관 박민헌에 의해서도 재론되었으니 당시 양인이 사림의 대표인사로 지목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여러 차례 성균관전적, 홍문관교리 등으로 소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명종이 교리로 불러 수임길에 올랐는데 도중에 두어 섬 술을 싣고 가다가 마을 주막에 대나무와 꽃이 있으면 번번이 말에서 내려 술잔을 잡으니 이렇게 해서 10여 일 동안에 겨우 며칠 길을 가다가 술이 다 떨어지자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않았다”라는 기록은 그가 명종대 문정왕후와 윤원형에 의하여 파행으로 치닫고 있던 정국의 출사를 극히 완곡한 방식으로 거부하였음을 보여준다.

6 만년 은거기의 시문학 활동

당시 전라도 일대에는 많은 사림계 인사들이 담양의 소쇄원, 면앙정, 식영정, 또 광주 환벽당 등의 누정을 중심으로 시단을 형성, 활발한 시문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중에 서울에서 문명을 드날리던 김인후가 귀향함으로써 이곳의 누정문학 활동은 더욱 활성화된다. 그는 송순(宋純), 이황, 기대승(奇大升), 임제(林悌), 임억령, 정철(鄭澈) 등 호남의 많은 문사들과 교유, 호남시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특히 담양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와는 사돈관계를 맺어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의 〈소쇄원48영〉, 〈면앙정30영〉 등은 누정미학의 최고봉으로 널리 칭송받았으며 제자로 양산보의 아들이자 사위인 양자징을 위시하여 정철·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유경렴·남언기 등 많은 인물들을 키워내었다.

그의 시문학 관련 저술로는 『백련초해(百聯抄解)』가 저명하다. 이는 제자들에게 문장의 대련(對聯)을 가르치기 위하여 7언고시 중에서 연구(聯句) 100개를 뽑아 해석을 달아놓은 책으로 초학자를 위한 시학 입문서이다.

7 만년 은거기의 성리학 연구와 성리학설

은거 이전 김인후는 주로 시문학 방면으로 활동하였고 이 방면으로 이름을 얻었는데, 은거가 시작된 이후부터는 시간을 갖고 성리학에도 보다 깊은 천착을 하게 되었다. “(은거후) 만년 성리학을 좋아하여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였다”는 평가나 또 선배 사림 이황의 ‘(김인후가 처음에 노장에서 시작하였고 중년에 자못 시와 술로 몸가짐을 무너뜨린 것을 애석히 여겼으나) 만년 이학에 뜻을 둔 이후의 글을 보니 매우 정밀한데, 이는 한거하는 중에 터득한 것으로 매우 가상하다’는 평가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특히 은거가 길어지던 1558년(명종 13) 광주에 살고 있던 기대승(奇大升)과 태인에 살고 있던 이항(李恒) 사이에 행해진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 논쟁에 참여하였다. 이때 이항은 태극과 음양이 혼연일체로서 구분될 수 없는 하나라고 바라보는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주장하였고 기대승은 이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김인후는 이(理)와 기(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대승에 동조하였다.

또한 노수신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에 대해서도 논변하였다. 여기에서는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고, 마음이 몸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몸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정조대 김인후의 문묘 종향이 결정되는데 이때 그의 성리학설은 ‘이(理)와 기(氣)가 서로 발현한다는 변론은 대현(大賢 : 이황)의 학설을 절충한 것이었고, 도(道)와 기(氣)가 하나라고 주장하는 여러 사람들의(노수신 등) 잘못된 논의를 분석해 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곧 그의 성리설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주리론(主理論)적 입장이었으며 수행론 방면으로는 ‘경(敬)’을 강조하였다. 성리설과 관련한 저술로는 문집인 『하서전집』이외에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홍범설시작괘도(洪範揲蓍作卦圖)』이 있고 성리예서로는 『가례고오(家禮考誤)』가 있다.

8 정조대의 재평가와 문묘 종향

김인후는 장성에서 은거한 지 15년여 만인 1560년(명종 15) 5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 이후 그는 주로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충신으로 알려졌으니 현종대 무렵에도 ‘해마다 칠월이면 온 산중에 통곡소리(年年七月日 慟哭萬山中)라는 시구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되고 있었다.

현종대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비단 인종의 충신으로서 뿐아니라 문장·도학·절의 등 김인후의 전체적 면모에 대한 관심과 평가는 조선후기 정조대에 가서야 가능하였다. 곧 1796년(정조 20) 김인후의 문묘 종향이 결정되면서 그는 “학문과 문장이 당세에 우뚝하였고 시대의 급류에서 기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에 원우(元祐)의 난에서 온전할 수 있었으니, 그 절의의 큼과 출처의 바름은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다. 젊었을 때 인묘(仁廟)에게 인정을 받아 출중한 은혜를 받았고, 인묘께서 늘 그가 숙직하는 곳에 직접 가서 차분히 토론하였으며, 그가 올린 묵죽시는 지금 보아도 사람을 격앙시킨다. 심지어 천문·지리·의약·복서·음양·율력·명물도수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는 총체적인 평가를 받았다.

문묘 종향과 함께 영의정에 추존되고 문정(文正)으로 시호가 바뀌었으며 문집인 『하서집』도 왕명에 의해 중간되었다. 김인후의 문묘 종향은 호남인으로 유일한 경우라서 더욱 의미가 깊다. 선조대 정여립의 난 이후 전라도가 반역향으로 낙인찍히면서 이곳 출신 사림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어왔는데, 탕평군주 정조의 김인후 종향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배려의 측면도 있었다.

그를 모신 사액서원으로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이 있다. 이는 1590년(선조 23) 문인들에 의해 건립되었다가 정유재란때 소실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후 1659년(효종 10)에 ‘필암’으로 사액을 받았으며 1672년(현종 13)에 지금 자리로 이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필암서원 외에도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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