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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金馹孫]

사화의 불꽃으로 스러져 역사에 이름을 남기다

1464년(세조 9) ~ 1498년(연산군 4)

김일손 대표 이미지

김일손 서간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최초 사화의 장본인

김일손(金馹孫)은 최초의 사화인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불씨를 제공한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것으로 평가되는 스승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싣는가 하면, 당시 기득권을 쥐고 있던 훈구파에 대한 비판까지도 그대로 사초에 실어 당대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려 하였다. 결국 분노한 연산군(燕山君)에 의해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지만, 그의 꼿꼿한 직필(直筆)의 정신은 이후 사림들의 떠받드는 바가 되었다.

2 훈구와 사림

김일손의 행적이 가진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가 살다간 시기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세조는 조카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였기 때문에, 즉위 초기부터 사육신 사건 등 많은 저항에 부딪혔다. 따라서 그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조선의 정치 시스템을 그대로 이용하지 않고, 자신이 구축한 세력을 통하여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세조는 측근들을 고위직에 임명하고 그들에게 공신의 칭호를 수차례 내리기도 하였는데, 세조 사후에도 이들은 조정 내에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문치(文治)를 강조한 성종(成宗)의 재위 기간 동안 조정은 새로운 기풍으로 물들고 있었다. 흔히 ‘영남 사림파’라고 알려진 김종직의 문인들이 언관(言官) 등의 위치에 포진하여 조정의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김일손 또한 그 중 하나였다.

3 용마(龍馬)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다

김일손의 자(字)는 계운(季雲)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청도에서 살아왔다. 증조부 김서(金湑)는 현감(縣監) 벼슬을 지냈으며, 조부 김극일(金克一)은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으나, 어버이의 상(喪)을 당하여 무덤의 움막에 거처할 때에 그 정성이 맹수를 감동시킬 정도여서, 주변 사람들이 그를 효절(孝節) 선생이라 불렀다고 한다. 부친 김맹(金孟)은 벼슬이 집의(執義)에까지 이르렀는데, 용마(龍馬)가 나오는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이름에 말[馬] 글자를 넣어서 각각 준손(駿孫), 기손(驥孫), 일손(馹孫)이라 하였다.

김일손 삼형제는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가문의 문명(文名)을 드날렸는데, 그 중에서도 김일손의 실력이 특히 뛰어났던 것 같다. 김일손은 경상좌도(慶尙左道)의 향시(鄕試)에는 매번 장원을 차지했던 뛰어난 인재였음에도, 두 형들을 급제시키기 위해 자신의 합격을 미룰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두 형 김준손과 김기손은 김일손의 힘을 빌어 함께 초시에 합격하였고, 전시를 치르는 날이 되자 김일손은 두 형의 책문(策文)을 대신 지어주고 자기 것은 짓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부정행위에 속하는 만큼 전해지는 이야기를 모두 믿을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져 전해질 정도로 김일손의 실력은 형제들 사이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모양이다. 또한 형들에 대한 김일손의 깊은 우애를 반영하여 만들어진 일화로 생각된다.

4 김종직과의 만남

김일손은 8세 때부터 집안에서 『소학(小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때 부친 김맹이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로 부임하여 고향 청도에서 용인으로 이사하였다. 15세인 1478년(성종 9) 성균관(成均館)에서 독서하였으며, 그 해 우씨(禹氏)와 혼인하기도 했다. 초시에 합격한 것은 바로 이듬해이다. 1480년(성종 11)에는 양친을 따라 다시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는데, 이 해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된다. 밀양에 내려와 거상(居喪) 중이던 김종직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기 시작한 것이었다.

김종직은 당시 이미 조정에서 문명(文名)을 날리고 있던 학자였으며, 사방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들어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이에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도학자(道學者)들이 모두 그에게서 배출될 정도였다. 김종직에게서 수학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남효온(南孝溫) 등은 하나같이 당대의 뛰어난 문신‧학자들이었다.

김종직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옛사람들이 글을 배웠던 순서에 따라서 먼저 『소학』과 『대학(大學)』을 읽힌 후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읽게 하였다고 한다. 이는 강령(綱領)과 지취(旨趣)를 알고 나서는 도의(道義)를 연구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학습 방식이 김종직의 제자들에게 특별한 사상이나 정치 운동을 불러일으켰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당시 김일손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하나의 정치적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같이하며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 사건이었다.

김일손의 동문 남효온은 김일손이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해, 아직 관직에 오르지 않은 유학(幼學)의 신분으로 소릉(昭陵)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소릉은 바로 단종의 어머니이자 문종(文宗)의 비(妃)인 현덕왕후(顯德王后)를 뜻한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후 3일 후 승하하였으나, 1457년(세조 3) 친정 인물들이 참여한 단종 복위 사건으로 아들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자 따라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던 바 있다. 소릉 복위란 곧 서인으로 강등되었던 현덕왕후를 다시 왕후로 복위시키자는 것으로, 성종의 조부 세조의 정당성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이에 남효온은 조정 중신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고, 평생 벼슬에 오르지 않아 "생육신(生六臣)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였다.

5 갓끈을 씻으리라

김일손의 호는 탁영(濯纓), ‘갓끈을 씻는다’는 뜻이다. 이는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쓴 어부사(漁父詞)에서 따온 문구이다. 어부사의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창랑의 물이 맑다면 (滄浪之水淸兮)
내 갓끈을 씻고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흐리다면 (滄浪之水濁兮)
내 발을 씻으리라 (可以濯吾足)

이 구절은 초나라 조정에서 쫓겨난 굴원이 어찌 결백한 몸으로 세상의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냐고 하자, 어부가 빙그레 웃으며 읊조리고 간 부분이다. 이는 곧 세상의 청탁에 따라서 몸가짐을 달리하라는 뜻으로, 세상이 흐리다면 조정에 출사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책이라는 뜻으로 자주 인용되었다.

그러나 김일손이 ‘탁영’을 호로 삼은 이유는 바로 자신이 갓끈을 씻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조정의 혼탁함을 바로잡아 자신이 몸담을 만 한 곳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반영이었던 것이다. 실로 원대한 포부가 담겨 있으나, 조정에서 결국 그가 겪을 고난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김일손은 1486년(성종 17) 문과에서 2등을 하고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어 벼슬길에 나섰다. 그는 이후 홍문관, 승정원, 사간원, 사헌부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이는 조선시대 엘리트 관원들이 역임하는 청요직(淸要職)이었다. 그는 주로 언관 활동에 종사하면서 여러 시책들을 제시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 한 것은 1495년(연산군 1) 충청도도사로 있을 당시 시폐(時弊)를 논하면서 현덕왕후의 복위를 요청하였던 사실이다. 이전부터 김시습(金時習), 남효온 등 세조의 왕위 찬탈에 비판적이었던 인물들과 교유하였던 김일손은 현덕왕후 복위를 주장하며 세조의 왕위 찬탈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세조의 왕위 찬탈, 그리고 세조 대 공신들의 기득권 장악 등에 비판적이었던 김일손과 그 동료들의 태도는 결국 무오사화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불러오게 된다.

6 사초(史草)와 사화(士禍)

무오사화의 발단은 바로 김일손이 성종 재위시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썼던 사초(史草)에서 비롯되었다. 사초란 바로 조선왕조실록의 기초가 되는 자료들로, 한 왕의 재위 시절에 써두었던 사초들을 그 왕 사후에 모아서 정리하여 실록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성종실록을 편수하는 실록청(實錄廳)의 당상이 김일손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극돈(李克墩)이었던 것이었다.

김일손은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있을 때에 이극돈에 대해 비판하여 이미 이극돈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된 바 있었다. 그런데 이극돈이 실록청의 당상이 되어 사초를 살펴보니, 김일손이 쓴 사초에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평가가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정희왕후(貞熹王后)의 국상 당시 장흥의 관기(官妓)와 가까이 했던 사건, 뇌물을 받은 사건, 세조 앞에서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는 평가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극돈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천세만세 남을 역사서에 실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경실색하였다. 이에 염치불구하고 김일손에게 사초를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역사관이 분명한 김일손이 고쳐줄 리가 없었다.

이에 이극돈은 세조의 총신이었던 유자광(柳子光)과 사초 문제를 논의했다. 유자광은 당시의 훈구 대신들과 이 문제를 논의한 후, 다시 이를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연산군은 국왕이 사초를 보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사초를 들여오라 명하였다. 이극돈은 사초 자체를 들이는 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면서도 김일손의 사초 일부를 절취하여 연산군에게 올렸다. 사초를 본 연산군은 진노하여 김일손을 붙잡아오도록 명했다. 세조 대의 일을 함부로 사초에 썼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예를 들어, 덕종의 후궁인 권귀인을 세조가 불렀으나 권씨가 분부를 받들지 않았다는 내용의 사초가 있었는데, 덕종은 바로 세조의 아들이므로 이 사초가 혹시라도 실록에 실리게 된다면 인륜을 저버리는 큰 문제가 될 것이었다. 마침 김일손은 소릉 복위를 청하였던 전력이 있었으므로, 연산군은 김일손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김일손은 당시 모친의 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풍질을 앓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사초 문제로 붙잡혀 가는 것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국문이 계속되면서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 또한 문제가 되었다. 조의제문은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글’이라는 뜻으로, 김종직이 꿈속에서 항우(項羽)에게 살해당한 의제(義帝)를 만난 후 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쓴 글이다. 결국 모진 형신 끝에 김일손은 온몸이 찢기는 형벌에 처해졌고, 스승 김종직은 무덤에서 꺼내어져 시신의 목이 잘리는 형벌을 당하였다. 김일손의 동료들도 대거 화를 입었다. 김일손이 형벌을 당할 때, 그의 고향에 있는 냇물이 별안간 붉게 물들어 3일 동안이나 되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그 냇물은 붉은 시내라는 뜻의 자계(紫溪)라 불리게 되었다.

김일손은 역사 서술을 통해 당대 집권 세력에 비판을 가하려 하였으며, 나아가 국왕의 정통성과 관계된 문제까지도 거리낌 없이 서술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직필(直筆)을 중시한 김일손의 역사관은 형신 과정에서의 문답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김일손은 병중에 잡혀 와서 몸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초의 일을 캐묻는 연산군에게 꼿꼿한 기개로 답하였다. “전하여 들은 일은 사관(史官)이 모두 기록하게 되었기 때문에 신 역시 쓴 것입니다. 그 들은 곳을 하문하심은 부당한 듯하옵니다.” “사관이 들은 곳을 꼭 물으신다면 아마도 『실록』이 폐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에서 사관을 설치한 것은 역사의 일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므로, 신이 직무에 이바지하고자 감히 쓴 것입니다.” 역사적 평가를 담당하는 사관의 중요성을 확신한 김일손은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자신의 소견을 굽히지 않았다.

김일손은 연산군을 물러나게 한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에나 복권될 수 있었다. 이후 그를 기리기 위해 고향 청도에 세워진 서원은 냇물의 이름을 따 ‘자계서원’이라 명명되었다. 만세에 남는 ‘역사’라는 수단을 통해 당대 현실을 비판하고자 했던 김일손. 그는 비록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이름은 조선 중앙 정계를 이끈 ‘사림(士林)’의 명맥 속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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