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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金長生]

조선 중기 예학의 대가

1548년(명종 3) ~ 1631년(인조 8)

김장생 대표 이미지

김장생 초상

e뮤지엄(국립중앙박물관)

1 개요

조선중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이 발달하게 되었고 이는 다시 이기심성론의 발달에 기반한 사회윤리론인 예학의 발달을 초래하게 되었다. 특히나 이 시기 왜란과 호란의 양란을 거치면서 조선사회의 질서는 근원에서 크게 와해되었고 이러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예학의 현실적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 김장생은 기호학파 송익필(宋翼弼)·이이(李珥)의 적통을 계승한 서인계 사림학자로서 시대적 요청에 따라 성리예학을 기반으로 당시 조선사회의 시의성을 반영한 조선예학의 기초를 닦았다. 이러한 학문적 업적에 기반하여 서인계 산림의 지위에 올라 조선후기 서인-노론 학맥의 중추가 되었다.

2 가계 및 송익필·이이의 학통

김장생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5대조 광산부원군 김국광(金國光)은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원종공신이 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이 되었으며 좌의정에 까지 오른 세조의 총신이다. 고조 김극유(金克忸)는 사간원대사간, 증조 김종윤(金宗胤)은 진산군수, 조 김호(金鎬)는 지례현감을 지냈다. 부친 김계휘(金繼輝)는 명종대~선조초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는데 이이, 박순(朴淳), 기대승(奇大升) 등 서인계 인사들에게 높은 추임을 받았으며, 1575년(선조 8) 동서 분당 때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서인(西人)으로 지목되었으나, 청렴하고 관후한 덕이 있어 크게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한다.

김계휘는 우참찬 신영(申瑛)의 딸 평산 신씨(平山 申氏)와 혼인하여 1548(명종 3) 서울 황화방 정릉동(현 서울 중구 정동)에서 김장생을 낳았다. 김장생은 첨지중추부사 조대건(曺大乾)의 딸 창녕 조씨를 맞아 은(檃), 집(集), 반(槃)의 3남과 3녀를 두었다.

김장생은 1560년(명종 15) 12세의 나이로 송익필에게 나아가 사서와 『근사록』등을 배웠고, 1567년(명종 22) 19세의 나이로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배웠다. 1580년(선조 13)에는 33세의 나이로 성혼(成渾) 문하에도 나아갔다. 이로써 김장생은 기호학파의 핵심 학자이자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영수 역할을 하던 송익필, 이이, 성혼 세 선생에 학파·정파적 연원을 대게 된다.

김장생은 세 사람중에서도 송익필과 이이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송익필은 어려서 문장에도 출중하였고 재능이 뛰어나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지만 서출이라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후광으로 당대 최고의 문사, 관인들과 교류하게 되는데, 경기도 파주 감악산 자락에 은거하면서 막강한 학문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8문장가’중 일인으로 꼽혔으며 특히 예학 방면에 뛰어난 조예를 지녔다. 당시 기호학파의 핵심 인물들인 심의겸·이이·성혼·정철(鄭澈) 등과 교우하여 파주의 5인방으로 불리었는데, 특히 정치적 감각이 탁월하여 서인세력의 막후 실력자로서 군림하였으며 스스로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벼슬길에 나서지 않은 사림 처사로 자처하였다.

송익필에 의해 학문적 기초를 닦은 이후 김장생은 19세에 이이에게 나아가 배웠고 조헌(趙憲)·정엽·이귀(李貴) 등 이이의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수제자가 되었다. 따라서 그는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비판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塗說)을 적극 옹호하였으며 같은 선상에서 조선 도학(道學)의 연원에 대해서도 ‘조광조(趙光祖) 이래 퇴계 선생이 나와 사문(斯文)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고 후학에 길을 열은 공로는 크지만 성인의 종지를 얻어 도맥(道脈)을 이은 이는 오직 율곡 선생 한 분뿐이다’고 보았다.

김장생의 학문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소학』을 학자의 기본으로 삼아 깊이 믿고 힘써 실천하여 종신토록 준칙으로 삼았다. 또한 매일 밤마다 『중용』, 『대학』, 『심경』, 『근사록』 등의 책을 외우되, 돌려가면서 충분하게 읽어 마치 자기의 말을 외우듯이 하였다. 그러므로 선생은 처음에는 스스로 재질이 노둔하여 성취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와 같이 힘쓰기를 꾸준히 함에 미쳐서는 모든 이치가 환하게 풀렸다”는 내용을 통해 그가 노력형의 학자였음을 알게 된다.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사람을 정성으로 대하며 화기가 애애하였으나, 일의 시비를 논하고 사람의 선악을 분변할 때는 엄정한 말과 낯빛으로 굽히거나 흔들림이 없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방정하고 꼿꼿한 자세가 송익필·이이의 허여를 받아 차기 기호학파, 또 서인의 영수로 성장하게 하는 동인이 되어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3 선조대~광해군초 관직활동과 학문적 성숙

이처럼 김장생은 우월한 가문적 배경에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송익필·이이에게 배웠으며 무엇보다도 스승들이 수제자로 허여할 정도의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뜻밖에도 관직에 크게 뜻을 두지 않았다. 그는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으며 단지 학행으로 천거받아 비중이 없는 말단 경관직을 제수받거나 아니면 현감이나 군수 등 외직을 제수받았다. 그는 또한 수여된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지만 사정이 조금이라도 여의치 않으면 곧 사퇴하는 대단히 소극적인 방식으로 관직생활을 하였다. 당시 사림내의 분당과 잦은 역모사건, 연이은 왜란과 호란, 반정 등으로 특히 혼란스러웠던 조선중기 중앙 권력의 핵심부로 진출하기를 꺼렸던 것이다.

그는 1578년(선조 11) 30세의 나이로 이조판서 이후백(李後白)의 천거를 받아 창릉참봉을 제수받았으며 1581년(선조 14) 33세 때에는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중국에 다녀오기도 한다. 1584년(선조 17) 36세에 순릉참봉·평시서봉사, 1588년(선조 21) 40세에 동몽교관, 1590년(선조 23) 42세에 통례원인의, 1591년(선조 24) 43세에 정산현감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44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로 승진하였다. 1596년(선조 29) 48세에 향리인 연산(현 충남 논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익위의 관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7년(선조 30) 49세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호남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 첨정이 되었다. 1599년(선조 32) 51세에 안성군수, 1603년(선조 36) 58세에 익산군수가 되었다. 1605년(선조 38)에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내려갔다가 1609년(광해군 1) 61세로 회양부사, 1610년(광해군 2) 62세로 철원부사 등을 지냈다.

이처럼 김장생은 선조초부터 광해군초까지 약 30여년간 천거를 통해 비중이 낮은 경외의 여러 관직을 지냈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 현실에 무관심하였거나 또는 경세적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이 시기에 그가 부친을 모시고 중국사행에 참여하거나 또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시 군량을 모집하고 적극적으로 민심을 수습하는 등의 모습에서 이를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김장생은 이처럼 비중이 낮은 관직에 머묾으로서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는 1599년(선조 32) 임난으로 인한 혼란이 겨우 가라앉고 있던 시기에 그가 필생의 역작인 『가례집람(家禮輯覽)』을 내고 있었던 점에서 이러한 면면을 짐작해 보게 된다. 곧 김장생은 출사를 통한 현실 참여를 거부하였던 것은 아니지만 학문적 축적을 우선한 위에서 출사를 조절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선택의 결과 그는 고위 관직에는 오르지 못하였지만 학문적으로 큰 성취를 이루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었으며 결국은 제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학문을 정치적으로 펼칠 수도 있게 되었다.

4 광해군대~인조대 서인 산림으로의 역할

광해군 즉위초 김장생은 회양부사, 철원부사 등 외직을 지냈는데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그나마의 관직생활도 청산하고 정국에서 완전히 은퇴하게 된다.

선조 말엽부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광해군(光海君)을 지지하는 대북파(大北派)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는 소북파(小北派) 간의 암투가 심각하였다. 결국 광해군이 즉위하고 대북파가 집권하자 대북파는 영창대군과 소북파의 제거를 획책하게 되는데, 때마침 1613년 박응서(朴應犀)를 위시한 명가의 서얼 7인이 수백냥의 은을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허균(許筠), 김장생의 서제(庶弟)인 김경손(金慶孫) 등과 사귀면서 서얼금고(庶孼禁錮) 폐지를 주장하다가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불만을 품고 일을 저질렀던 것인데, 대북파는 이를 이용하여 박응서 등에게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대비의 수렴청정을 돕기 위해 거사 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며 그 주모자는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라고 거짓 고변하게 하였다. 이로써 옥사는 영창대군과 소북파 제거로 방향을 틀게 되었고 결국 김제남은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으며 인목대비까지도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또한 당시 영의정 이덕형(李德馨)과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을 비롯한 서인·남인(南人) 명사들은 유배 또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나 대북파는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장생의 서제인 김경손·김평손 등이 옥사에 연루되어 역률로 처단됨에 따라 김장생도 화를 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 마침 유사(有司)가 법제상 연좌시킬 수 없다고 하였고, 또 대신(大臣)의 건의가 있었으므로 일이 거기에서 그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소극적인 벼슬살이마저 청산하고 연산으로 낙향하여 두문불출하게 되는데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까지 10여 년간을 다시 학문에 몰두하게 된다. 이 사이에도 서인 내에서의 그의 명망은 더욱 높아만 갔다.

광해군대 대북파는 계축옥사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지만 계축옥사의 후유증 등으로 사림세력의 지지 기반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다. 결국 서인·남인 세력은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 김장생은 75세의 고령이었지만 서인세력의 상징적 존재인 산림(山林)으로서 정국에 재등장하게 된다. 인조[조선](仁祖)는 반정이 성공하자 김장생을 사헌부장령으로 소환하였다. 특히 성균관에 사업(司業)이라는 직책을 새롭게 만들어 김장생·장현광(張顯光)·박지계(朴知誡) 3인을 임명하였고 김장생으로 하여금 통솔하도록 하였다.

1624년(인조 2)에는 반정후의 논공행상 과정상의 문제로 인해 이괄의 난(李适-亂)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때 김장생은 76세의 노구로 공주로 파천한 국왕을 나아가 맞이했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으로 사업을 겸하였다. 이후 공조참의가 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인조 3)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한 뒤 이이·성혼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고, 같은 해 스승 송익필의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80세의 노구로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피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해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줄곧 연산에 머물면서 지내다가 1631년(인조 9) 8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처럼 그는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정국에 재등장하여 1631년 사망할 때까지 약 십여년간 서인의 상징적 존재인 산림으로서 국가의 끊임없는 부름과 예우를 받는 전성기를 누렸다. 실제로도 그는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물론 이 시기 그의 가장 큰 힘은 그의 둘째 아들인 김집(金集)을 위시하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같은 유명한 제자들로서 이들이 있었기에 정계와 학계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사상계와 정계에서 ‘산림’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이들은 급제나 관직 여부와 상관없이 뛰어난 학문적 업적과 문하에 양성한 수많은 제자들을 통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특히 김장생의 만년 활약상은 이러한 산림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조선예학의 비조

김장생은 관직에 연연해하지 않고 학문을 우선하여 끊임없는 학문적 연찬과 후학 양성에 주력하였고 그 결과 광해군~인조대 서인을 상징하는 산림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서인 산림으로서 김장생의 힘의 원천이 학문에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데, 그의 학문의 중심은 다름아닌 예학이었다.

조선중기에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성리학의 우주론인 이기론(理氣論)을 바탕으로 심성론(心性論)이 발달하게 되었다. 심성론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심성론에 기반한 사회윤리론인 예학의 발달을 유도하게 되었다. 곧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을 사회윤리론으로 구체화한 것이 예학이었던 것으로 성리학이 조선화해가는 과정에서 예학이 발달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16세기말 이황이나 이이와 같이 뛰어난 사림학자들이 등장하여 이기론에 기반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등 심성론 논쟁이 있었고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예학 또한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나 이 시기 왜란과 호란의 양란을 거치면서 조선사회의 질서는 근원에서 크게 와해되었고 이러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예학의 현실적 필요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김장생은 이러한 시대를 살아간 사림학자로서 조선적 예학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절감하였다. 물론 그의 첫 스승으로 예학에 조예가 깊었던 송익필의 영향 또한 있었겠지만 이즈음 예학은 조선성리학의 대세적인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장생은 경학과 예학을 함께 병행하는 학문적 태도를 보였다. 가령 그는 경학 방면에서는 『소학』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그 가르침을 종신토록 준칙으로 삼았다. 특히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선조 34)에 완성하여 발문을 달기도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의 『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곧 그가 학문을 가르치는 순서는 ‘처음에는 『소학』·『가례(家禮)』를, 다음에는 『심경』·『근사록』을 가르쳐 배우는 자들의 학문의 근본을 배양하게 하고 학문의 길을 열어 준 다음에 비로소 사서·오경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차서가 분명하고 단계가 매우 엄격한’ 방식이었다.

이처럼 그가 학문의 처음에 『소학』·『가례』로써 시작하였던 점은 그가 경학과 예학을 하나로 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의 경학 방면의 연구는 1598년(선조 31) 51세 때의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618년(광해군 10) 71세 때에 『경서변의(經書辨疑)』가 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예학에 있었고 저서도 예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편찬한 최초의 예서는 1583년(선조 16)에 나온 『상례비요(喪禮備要)』로서 이는 앞선 시기 신의경(申義慶)이 편집한 상례서를 보완·절충한 것이었다. 이어 1599년(선조 32) 52세에 그의 필생의 역작인 『가례집람』을 내었다. 『가례집람』에서는 성리예학의 대표서인 주자의 『가례』를 미완의 책자로 간주하고 여러 학설을 모아 조목별로 해석하여 보충하였다. 곧 김장생은 『가례』의 시간적·공간적 한계를 인정하고 조선사회의 현실에 적합한 새로운 예론을 정립하는데 목적을 두고 주자예학을 연구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사림들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고 이에 『가례』를 시대적 여건에 맞추어 수정하거나 보완하여 왔기에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예학의 창출은 시대적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김장생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나온 수많은 예설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여 『가례집람』을 만들었다.

『상례비요』나 『가례집람』이외에 그가 문인들 사이에 주고 받은 예설은 별도로 모아져 그가 사망한 이후 1646년(인조 24) 『의례문해(疑禮問解)』라는 이름의 예서로 송시열·송준길 등 문인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이는 문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문답 형식을 취하였으며 『가례』의 순서에 맞추어 편집되었다.

이처럼 그는 처음 사대부들의 예학, 곧 사례(士禮)를 주로 연구하였으나 점차 서인의 산림학자로서 위상이 높아지면서 왕실의 예학, 곧 왕례(王禮)의 연구에도 참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조반정후 인조의 사친(私親)인 정원군(定遠君)의 처우 문제에 대한 예설이다.

인조반정 이후 김장생은 서인 산림으로서 높은 추중을 받고 있었는데 1624년(인조 2) 인조는 이러한 김장생에게 사친 정원군에 대한 제사 축문의 문제를 자문해 왔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왕자인 정원군의 아들로서 선조의 둘째 아들이자 자신의 백부가 되는 광해군을 쫒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니 할아버지 선조의 대통을 이은 셈이었다. 인조는 반정후 정원군의 가묘(家廟)에서 반정사실을 고묘(告廟)하면서 축문에 정원군을 ‘아버지(考)’로 호칭하고자 하였다. 산림 박지계(朴知誡)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경우 생부를 아버지라 불러도 된다고 하여 인조의 내심에 호응하였고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박지계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반면 김장생은 인조는 선조의 손자지만 입승대통(入承大統)했으므로 선조를 ‘아버지(考)’로 불러야 하고 사친인 정원군은 ‘백숙부(伯叔父)’로 불러야 한다고 했다. 이는 많은 조신들이 호응을 받았으나 인조와 반정공신들로부터는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인조는 자신의 뜻대로 정원군을 정원대원군으로 봉해서 ‘아버지(고)’로 삼았으며 급기야는 1632년(인조 10년) 정원군을 원종[조선](元宗)으로 추존하고 1635년(인조 12년)에는 원종을 종묘에 부묘하여 ‘선조-원종-인조’로의 계통을 확립하였다. 이때 인조와 담당 예관들, 김장생 등이 주고받은 편지 모음은 『전례문답(典禮問答)』으로 남아 있다. 김장생은 인조의 노여움을 사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설을 고집하였고 이로 인해 인조는 김장생의 사후 그에게 시호를 내리자는 장유의 요청을 굳이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김장생의 예학은 사대부가의 예학에서 시작하여 왕실의 예학까지도 두루 포괄한 것으로 조선 예학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성리예학의 기본서인 『가례』를 중심으로 중국의 역대 전례를 방대하게 참고하여 조선의 시대적 상황에 맞는 합리적인 예학을 도출해 내었던 것이다.

6 사후 서인-노론의 상징적 인물화

1631년(인조 9) 김장생은 84세의 고령으로 연산에서 사망하여 연산 진금면 성북리에 안장되었다가 1641년(인조 19) 다시 고정리로 이장되었다. 당시 김장생의 위상은 장유가 신도비명을, 송시열이 행장을, 송준길이 시장을 지었다는 점, 또 그의 상에 1천여명이 모여들었다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그의 문인으로는 김집·송시열·송준길·이유태·강석기·장유·정홍명·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명사들이 즐비하였다. 이들 중에서도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은 가학을 이어받아 부친의 예학을 완성하고 부친의 사후에 그 제자들까지 계승했으니 문인들은 김장생을 ‘노선생’으로, 김집을 ‘선생’으로 불렀다.

또한 제자 송시열은 스승의 서인 산림으로서의 정통성을 계승, 이후 효종~숙종대 서인 정파의 학문적, 정치적 구심이 되었다. 특히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서인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분기가 일어나면서 송시열은 노론의 영수가 되는데 이로써 김장생 또한 서인-노론계 산림으로 비정되었다.

1657년(효종 8)에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원(文元)’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으며, 1687년(숙종 13)에는 왕명으로 방대한 분량의 문집 『사계전서(沙溪全書)』가 간행되었다. 1717년(숙종 43) 노론이 집권하면서 문묘에 종향되었으니 당시 김장생의 문묘 종향은 노론의 정치적·학문적 승리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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