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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金正浩]

조선의 지리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다

미상 ~ 1866년(고종 3)

김정호 대표 이미지

김정호 표준영정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머리말 - 청구도와 대동여지도에 담긴 김정호의 꿈

김정호는 19세기에 조선의 국토정보를 집대성하고 체계화하여 지도와 지지에 담아낸 인물이다. 그는 지도와 지지를 아울러 종합적으로 지리지식을 정리한 지리학자이자 훌륭한 판각기술까지 보유한 지도제작자였다. 그는 지리정보의 대중화를 위해서 정확하면서도 이용하기 편리한 지도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의 천재적 재능과 탐구의 열정과 부단한 노력의 산물로서 만들어낸 작품들은 『청구도(靑邱圖)』, 『동여도(東輿圖)』,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 등 3대 지도와 『동여도지(東輿圖地)』, 『여도비지(輿圖備誌)』,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3대 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김정호의 본관은 청도(淸道)로 추정한다. 황해도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생년은 그와 친교가 깊은 최한기(崔漢綺)(1803~1877)와 비슷한 연배로 추정하고, 몰년은 대동지지에서 발견된 마지막 역사적 사실의 연대를 기준으로 하여 추정한다. 생몰 연도, 고향, 주요 활동지, 본관, 가계 어느 것도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김정호의 자는 백원(伯元), 호는 스스로 고산자(古山子)라고 칭했다.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인 이하의 신분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향견문록』에는 김정호가 지도학에 관심이 깊어서 일찍이 지구도를 제작하였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상세하고 정밀함이 고금에 없으며, 『동국여지고(東國輿地攷)』를 미처 탈고하기 전에 세상을 떴으니 애석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김정호와 관련된 기록은 많지 않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흥선대원군 집정 때에 나라의 기밀을 누설시킬 우려가 있다는 혐의를 씌워 판목을 압수, 소각하고 그도 옥에 가두어 마침내 옥사하였다고도 하고, 세 차례 전국을 답사하고 백두산에도 7~8회 올라갔다고 하는데 이러한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최한기와의 친교와 신헌(申櫶)으로부터 받은 후원은 그의 지도제작에 큰 힘이 되었다. 최한기와 같은 학자와의 교류를 통해 그는 동서양의 다양한 지리지식을 접할 수 있었고 세계지도를 목판으로 새기는 기회도 얻었다. 또 신헌과 같은 관리의 도움으로 규장각이나 비변사에 소장된 뛰어난 관찬 지도들을 열람하고 가르침에 힘입어 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다.

군사전략가로서 민보론을 주장하기도 했던 신헌은 누구보다 지도의 효용을 깊이 인식했을 것이다. 따라서 김정호에 대한 그의 신뢰와 후원은 김정호의 지도 제작 작업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한 중앙집권국가로서 전국 각 지역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의 지리지와 조선 전기 양성지의 『동국지도(東國地圖)』, 조선 후기 정상기의 『동국지도[영조](東國地圖)』 등 전국지도, 그리고 고을 내부의 세세한 정보까지 담고 있는 그림식 고을지도책 등이 제작되었다.

김정호는 이와 같은 축적된 조선지도학의 성과에 힘입어 지도제작과 지지편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기존의 지도와 지리지를 기초로 하여 보충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종합하고 집대성하였다. 최한기는 「청구도제」에서 김정호는 성인이 될 때쯤부터 지도와 지리지에 깊이 뜻을 두고 오랫동안 찾아 열람하여 여러 방법의 장점과 단점을 자세히 살폈다고 하였다. 김정호가 직접 작성한 『청구도』 범례에서는 여러 지리지와 지도들 사이의 모순, 지도에 기록된 것과 지방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의 차이 등을 조사하여 확인된 사실에 대해서는 교정하고 확인이 안 되면 옛 것을 그대로 따르되 후고를 기다린다고 밝혔다. 이처럼 그는 여러 지리지와 지도 등의 자료를 확보하여 꼼꼼하게 비교 검토하여 지도를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고 백두산에 오르고 하여 지도를 제작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만든 첫 전국지도인 『청구도』는 바로 기존의 지도들을 살펴서 그 문제점을 찾고 개선하기 위하여 만든 지도였다.

2 완벽한 지도를 향한 길 1 - 청구도를 중심으로

김정호의 첫 전국지도인 『청구도』는 기존 지도에 대한 비판의식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기존 지도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기를, 지도 위에 방안선을 그리다 보니 강을 자르고 산을 끊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여러 고을을 나누어 흩어 놓으니 표를 살펴도 경계를 알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1834년(순조 34)에 필사본 전국지도로 만들어진 『청구도』는 분첩식으로 제작된 기존의 조선전도들과 차별화하여 보통의 책과 같은 장정을 선택하였다. 또 전국을 동서 22판, 남북 29층으로 나누어서 홀수 층의 지도를 제1책에 담고 짝수층의 지도는 제2책에 담았다. 두 책을 상하로 붙여 펼칠 경우에는 서로 인접한 두 층의 지도를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다. 또 일종의 색인지도에 해당하는 본조팔도주현도총목을 두어 보고자 하는 지역의 지도를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

내용적으로는 지도와 지지의 장점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도에 역사지리정보를 기입하는 발상을 하였다. 즉 모든 고을마다 호구 수, 토지 면적, 군사의 총수,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의 총량, 한성까지의 거리 등을 기록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곳에는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규경(李圭景)은 『청구도』에 대해서 말하기를, 각 면마다 하나의 지도로 만들어 책에 넣었는데 번호를 따라 취해 보면 눈앞에 나열되어 손바닥을 보듯 하니 헷갈림이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 생각하는 바가 앞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고 정밀함이 평범함을 넘어섰다고 평가하였다.

김정호는 『조선지도』나 『팔도군현지도』와 같이 신경준(申景濬)이 주도하여 제작한 고을지도책 계통의 지도와 『해동여지도』를 참고하여 그 지도들에 수록된 고을 지도를 동일한 축척으로 확대·축소하여 『청구도』를 편찬하였다. 그리고 이후 3차에 걸친 개정판을 간행하면서 계속 보완하였다.

『청구도』를 제작한 즈음 『동여도지』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서문에서 ‘지도로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리지로 역대 왕조의 역사를 알 수 있으니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틀이다.’ 라고 밝힌 바와 같이 『동여도지』는 지도와 지지를 함께 엮은 지리지를 추구하였다. 이규경은 『동여도지』에 대해서 말하기를, “『동국여지승람』을 취해 잘못된 것을 고치고 시문을 삭제하여 없는 것의 소략함을 보충했으니 매우 해박하다”고 하였다.

1853년(철종 4)~1856년(철종 7) 경에는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여도비지』를 제작하였다. 『여도비지』란 이름 역시 지도와 지지를 결합한 지리지란 뜻이지만 전도, 도별도, 도성도만 있을 뿐 고을의 지도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동여도지』나 『여도비지』 모두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의 편찬을 시도한 것 같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후에는 지지적 속성이 강한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의 제작에 각각 집중하였다.

한편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가 청나라 사람 장정부의 『지구전후도』 탑본을 입수하여 김정호에게 새기게 하였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지구를 목판에 새겨 지도로 만든 것은 없었다.

『지구전후도』가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대중적 영향력이다. 휴대와 열람에 편리한 소규모첩의 형식으로 목판 인쇄됨으로써 이전 시기 큰 병풍으로 제작되었던 『곤여만국전도』나 『곤여전도』에 비해 대중성과 보급성을 획득했다. 김정호는 『지구전후도』 판각 경험을 토대로 1848년(헌종 14) 이후에 또 한 번 목판본 세계지도인 『여지전도』를 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1840년대(1846~1849 추정)에 『수선전도(首善全圖)』를 제작하였다. 『수선전도』는 서울지도라는 의미인데 서울의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궁궐, 종묘와 사직, 관서 등이 밀집된 도성 안에는 대축척을 사용하였고 상대적으로 정보가 희박한 도성 밖에는 소축척을 적용하여 그렸다. 수록된 내용이나 표현 기법으로 볼 때 목판본 도성도 가운데에서 수작으로 평가되며, 판화로서의 예술적 가치도 높은 것으로 인정되었다. 이렇게 『수선전도』를 만들었던 경험은 『대동여지도』에서 도성도를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그는 효과적으로 지리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지도와 지지를 결합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의도는 『청구도』에 반영되었다고 보인다. 또 그는 완벽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안하고 노력하였는데 3차 개정을 거친 『청구도』의 변화 과정에서 그러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청구도의 큰 장점 중 하나인 찾아보기 기능이 점점 강화되었고, 거기에 이어보기 기능이 보완되었으며, 수요가 많은 지도인 한양지도가 첨부되었다. 『청구도』는 휴대와 이용의 편리라는 측면에서 큰 진전이 있었던 지도라고 할 수 있다.

3 완벽한 지도를 향한 길 2 - 대동여지도를 중심으로

지도와 지지의 결합을 추구했던 『청구도』와는 달리 그는 이번에는 지리지의 내용을 배제하고 자연지형과 지리정보만으로 구성되는 전국지도를 구상하였다. 또 산줄기를 아예 그리지 않았던 『청구도』와는 다르게 국토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는 유기체적 국토관에 입각하여 크고 작은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뻗어 나오도록 구성하였다. 형식적으로도 색인지도를 두어 찾아보기 기능이 강했던 청구도와 달리 이어보기 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병풍식의 첩 형태를 취하였다.

1853년(철종 4)~1856년(철종 7) 경 제작한 동여, 필사본 『대동여지도』 14첩, 필사본 『대동여지도』 18첩과 1861년(철종 12) 제작한 목판본 『대동여지도』 22첩 등이 모두 이어보기 기능을 강화한 지도이다. 병풍식의 첩 형식은 부피가 많아져 상대적으로 휴대에 불편한 반면 책 형식의 『청구도』에서 구현할 수 없었던 남북과 동서의 자유로운 이어보기가 가능해졌다.

1856년(철종 7)~1857년(철종 8) 경 제작한 『동여도』 23첩은 내용적인 면에서도 『청구도』와 차이가 많다. 지리지와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앞서 제작된 『동여도지』나 『여도비지』와는 다르고 1861년(철종 12) 이후 편찬된 『대동지지』의 내용과는 합치한다. 이것은 김정호가 『청구도』를 만들 당시와 비교하여 내용을 많이 수정하고 보완해나갔다는 뜻이다.

1861년(철종 12) 제작한 목판본 『대동여지도』 22첩은 형식과 내용 모두 보완하여 제작하였다. 『청구도』의 색인지도인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대신에 각 첩에 수록된 고을의 이름을 표지에 적어 찾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찾아보기 기능을 보완하였고, 12개의 기호를 사용하였던 『청구도』에 비해 22개의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지도적 속성을 더욱 강화하였다. 내용적으로도 『청구도』가 기본정보에 대해 『해동여지도』 계통의 것을 거의 그대로 따른 반면에 목판본 『대동여지도』는 『동여도』와 마찬가지로 교정된 내용을 많이 반영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보급성을 고려하였다.

또 『대동여지도』에는 두 점의 서울지도를 수록함으로써 수도지역의 지도를 특화시켰다. 「경조오부도」는 조선의 수도를 관장하는 한성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역의 서울지도이고, 「도성도」는 왕궁과 각종 관청 등 국가 중요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한성 성곽 내부의 시가지를 상세히 그린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큰 축척으로 제작되어 수도 지역의 상세한 지리정보를 전하고 있다.

『대동여지도』 서문에 해당하는 지도유설에서는 지도 제작의 목적과 효용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국방상의 요충지를 잘 알아야 하고, 재물과 세금이 나오는 곳과 군사를 모을 수 있는 원천을 잘 알아야 하며, 여행과 왕래를 위해 지리를 잘 알아야 하므로 지도를 제작한다고 하였다. 또 세상이 어지러우면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사나운 무리들을 제거하는 데 지도가 쓰이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지도가 소용된다고 하였다.

한편 목판본 『대동여지도』 22첩을 모두 연결하면 남북 약 6.6m에 이르는 거대한 조선전도가 되어 조선 전체를 한 눈에 보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점을 개선하기 위해 김정호는 남북 115.2cm, 동서 76.4cm로 축소하여 조선전도를 제작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목판본 『대동여지전도』이다.

『청구도』에서는 지지 정보를 함께 수록하였던 반면에 목판본 『대동여지도』에서는 지지 정보를 따로 정리하였다. 그리하여 『대동여지도』가 제작된 이후에 『대동지지』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앞서의 지리지인 『동여도지』와 『여도비지』가 이름에서부터 지도와 지지의 결합을 보여준 것에 비해 『대동지지』는 이름에서부터 지지로 특화되어 있다. 또 『대동지지』의 구성을 보면 도별로 소속 군현의 지리지를 수록하고 후반부에 산수고, 변방고, 정리고, 방여총지 등을 수록하여 종합적 지리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대동지지』는 미완성이지만 당시의 지지를 집대성한 지리지 편찬 작업의 결정판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그는 이어보기에 편한 지도와 대량으로 보급할 수 있는 목판본 지도를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앞서 『청구도』나 『동여도지』, 『여도비지』 등에서 지도와 지지의 결합을 시도했던 것에 비해 대동여지도 계열의 지도에서는 지도와 지지를 분리하였다. 대신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를 함께 만들어서 지도와 지지의 보완 관계를 설정하였다.

4 김정호의 지도제작과 지지편찬의 의의

김정호가 제작한 지도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린 전도(全圖)로서 전국지도·도별지도와 군현지도를 결합하여 군현지도 수준의 상세함을 갖춘 대축척 전국지도이다. 김정호는 『청구도』를 만들 때 지도와 지지의 결합을 추구하여 지도 위에 역사지리정보를 기입하였으며, 휴대의 간편함과 이용의 편리함을 위해 책의 형태를 취하고 색인지도를 첨부하였다. 『동여도』와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에는 이어볼 수 있도록 병풍식의 첩 형태를 취하였고, 지도와 지지를 분리함으로써 지도적 속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는 지도의 정확성과 함께 이용자의 편의를 고려하여 지도와 지지의 결합, 찾아보기 기능, 이어보기 기능 등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하였다. 따라서 그가 제작한 지도 간에 우열을 따지기 보다는 각각의 특징을 그의 의도대로 파악하는 것이 그의 지도를 올바로 이해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또 그는 지도를 만드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도의 대중성, 보급성까지도 생각하여 궁극적으로는 목판본 지도를 지향하였고 한 눈에 보기 쉽게 축소된 『대동여지도』 즉 『대동여지전도』까지 따로 만드는 섬세함을 보여주었다.

김정호가 편찬한 지지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동여도지』와 『여도비지』의 제작을 거치면서 지도와 지지의 결합이 어렵다는 점을 알고 지지만을 특화시켜 풍부한 내용을 담은 지리지인 『대동지지』를 만들어내었다. 『대동지지』는 전국을 대상으로 하여 서술한 전국지리지로서 지역 단위로 지역의 특성을 기술하는 지역별 지리지와 강역·도로·국방·산천 등의 주제별 지리학을 결합시켜 종합적으로 구성된 지리지였다. 이전의 전국 지리지나 읍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이다. 동국여지승람 편찬 이후 제작된 가장 훌륭한 사찬 전국지리지로 평가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가 생각한 완벽한 지도는 『대동여지도』, 『대동지지』, 『대동여지전도』 3종을 한 묶음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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