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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金正喜]

세한도와 추사체를 남긴 고증학자

1786년(정조 10) ~ 1856년(철종 7)

김정희 대표 이미지

김정희 종가 유물(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머리말 -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김정희는 추사체로 대표되는 추사(秋史) 김정희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과 예술을 둘러보면 문사철을 두루 갖추고 시서화를 섭렵한 총체적 지식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추사체는 비문의 글씨를 통하여 고금의 필법을 두루 연구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일법을 이룬 것이다. 거기에다가 조형성을 더하여 독창성의 면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확보하며 서예의 새 경지를 개척하였다. 유최진(柳最鎭)은 김정희를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글씨의 묘를 깨달은 서예가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여러 서체의 장점을 두루 섭렵하면서 무한한 단련을 통해 이러한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하였으므로 추사체라고 알려진 김정희의 글씨는 독창성 속에 품격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24세 때 연경에 가서 중국의 학계와 예원을 둘러보게 된 경험은 그의 안목을 높이고 학문과 사상과 예술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담계 옹방강과 운대 완원으로부터 금석학의 기본과 서법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옹방강의 ‘옛 경전을 즐긴다’ 와 완원의 ‘남이 그렇다고 말해도 나 또한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그의 평생을 대변한다고 하였다.

경학의 근본에 대해서는 한·송의 한계를 나눌 필요가 없다는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을 따랐고, 방법론으로는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따랐다.

김정희의 예술관은 시·서·화 일치의 문인 취향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글씨와 그림에 깃든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강조하였다. 난 치는 법도 예서를 쓰는 법에 견주어서 말하였다.

중국학자들은 그를 일컬어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라고 칭송하였다. 또 『철종실록』에는 그를 소동파에 비교하는 항간의 평가를 곁들이며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였으며 책을 널리 읽고 금석문과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당세의 대가가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김정희는 종종 자신의 신세를 소동파에게 비기곤 하였는데 그의 애제자 소치 허련은 이러한 스승을 위해 〈완당선생해천일립상(阮堂先生海天一笠像)〉이라는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제주유배시절의 김정희를 구현한 이 초상화와 함께 말년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표현한 자화상에서 우리는 김정희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 제주유배 이전의 행적과 평가

김정희의 본관은 경주이다. 경주 김씨 월성위[김한신](月城尉(金漢藎)) 집안으로 왕의 종친과 외척을 아우르며 안팎으로 왕실과 관련되어 있다. 외가는 노론 명문으로서 함경도관찰사를 지낸 유한소(兪漢蕭)는 외증조부이고, 문장과 서예로 유명한 유한준(兪漢雋), 유한지(兪漢芝)는 그의 4촌, 6촌 형제이다. 지수재 유척기(兪拓基) 역시 당대의 명상으로 이 집안의 대표적 인물이다.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김노경(金魯敬)과 기계유씨 유준주(兪駿柱)의 딸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후에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의 아버지는 6조의 판서, 예문관 제학, 홍문관 제학, 성균관 대사성, 경상감사, 평안감사 등 요직만을 20여 년간 지냈고 두 번이나 사행으로 연경에 다녀왔다.

김정희가 어릴 때 쓴 입춘첩을 보고 박제가(朴齊家)가 그의 스승을 자처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박제가가 연경에 갔을 때 그곳의 학자에게 김정희를 자신의 제자라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박제가의 문집에는 김정희에게 보내는 편지도 수록되어 있다.

1809년(순조 9, 24세)에는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 자격을 얻었고, 사행 가는 친부 김노경의 자제군관으로 중국 연경에 가게 되었다. 그는 연경에서 학계와 예원의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78세의 옹방강과 48세의 완원을 만나게 된 것은 중요한 수확이었다. 당시 김정희는 이 두 문인을 통해 여러 금석문을 보았고 필담도 나누며 연경학계의 분위기를 느꼈다. 또 많은 책과 글씨, 탁본 등을 선물로 받았고, 완원에게는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얻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조강, 서송, 이정원, 주학년 등 많은 연경의 문인들과 교류하였는데 이와 같은 연행의 경험은 이후 김정희가 자신의 학문의 토대를 금석학과 고증학에 두게 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연경학계로부터 학문적 세례를 받고 온 김정희는 역관 우선 이상적(李尙迪), 추재 조수삼(趙秀三), 역매 오경석(吳慶錫) 등의 도움으로 계속 연경학계와 교류하였고, 또 자하 신위(申緯), 운석 조인영(趙寅永), 이재 권돈인(權敦仁) 등이 뒤이어 연경을 다녀오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리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학풍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김정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학풍의 바탕은 고증학이었다. 특히 독립적인 학문 분야로 진전을 보이고 있던 금석학과 결합시킨 금석고증학 연구는 독보적이었다. 그의 학문의 목표는 고증학과 금석학의 토착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금석문자료를 찾고 연구하는 데 힘을 쏟았다. 1816년(순조 16, 31세)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의 발견과 고증은 그가 추구했던 고증학의 토착화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이라는 뛰어난 고증학 논문을 탄생시켰다.

1819년(순조 19, 34세) 대과에 합격하였다. 순조는 왕실의 친척이 과거에 급제하였음을 알리며 특별히 축하해주기도 하였다.

이후 50세까지 김정희는 출세기를 맞는다. 규장각 대교, 충청우도 암행어사, 예조참의, 규장각검교·대교 겸 시강원 보덕 등을 거쳐 성균관대사성,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출세기를 지내는 한편으로 청나라와의 학예교류도 꾸준히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등석여, 이병수와 건륭 4대가 즉, 담계 옹방강, 석암 유용, 산주 양동서, 몽루 왕문치 등의 서체를 본받으며 글씨 연마를 해 나갔고, 이재 권돈인, 자하 신위, 눌인 조광진(曺匡振) 등에게 영향을 주며 일파를 이루어갔다. 그 일파 아래에 점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당 조면호(趙冕鎬), 위당 신헌(申櫶), 유재 남병길(南秉吉) 등의 양반출신과 우선 이상적, 역매 오경석, 소당 김석준(金奭準) 등의 역관들, 그리고 우봉 조희룡(趙熙龍), 소치 허련(許鍊), 고람 전기(田琦), 희원 이한철(李漢喆) 등 중인 출신 서화가들이 그들이다.

김정희가 그의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는 『예림갑을록(藝林甲乙綠)』이 잘 보여주고 있다. 예림갑을록은 김정희가 글씨 8인, 그림 8인의 제자들의 서화작품에 대해 일일이 품평하여 각 제자의 장단점과 각 작품의 등급을 논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김정희의 지도 아래 문인화풍의 그림과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서체를 추구하였다.

이와 같이 일파를 형성해나가면서 김정희는 자신의 글씨와 서예론을 확립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원교 이광사(李匡師)를 비판하였는데 「서원교필결후(書圓嶠筆訣後)」가 바로 그것이다. 서예의 역사와 이론을 정리한 이광사의 저술 「필결(筆訣)」에 김정희가 신랄한 비판으로 후기를 달았다.

이광사는 왕희지 글씨를 바탕으로 조선화한 서체를 개발하여 공재 윤두서(尹斗緖), 백하 윤순(尹淳)으로 이어지는 동국진체를 완성한 사람이다. 그는 진경산수화의 겸재 정선(鄭敾)과 진경시의 사천 이병연(李秉淵)등과 함께 이른바 진경문화라는 문화사조를 풍미했던 인물이었다. 조선성리학을 이념기반으로 하는 조선 고유의 국풍에 대해서 못마땅한 태도를 보였던 김정희로서는 국풍화한 이광사의 서체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처럼 20대 중반에 연경에 다녀온 후 연경학계와 예원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하여 탄탄한 자신만의 학예관을 확립해나가면서 비판의 칼날도 서슴없이 들이대던 김정희에게 생애를 구분지을 만한 일대 계기가 닥쳐왔다. 김정희의 출세가도에 제동이 걸렸다.

3 제주유배 이후의 행적과 평가

1830년(순조 30) 그의 생부 김노경은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를 받고 고금도에 유배되었었다. 그런데 10년 후 새삼스레 다시 윤상도의 옥사가 거론되면서 이번에는 김정희가 연루되었다. 이 일로 그는 제주도에 유배되어 약 9년간의 유배생활을 겪어야 했다.

김정희에게 제주유배기간은 전 생애를 놓고 볼 때 시련기임에는 틀림없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과정이었고 추사체의 성립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의 학예와 사상이 일보 진전을 보았다는 점에서 도약의 계기가 되었다.

제주에 있는 동안 소치 허련을 비롯한 제자들이 건너와 벗을 해주었다. 특히 소치는 여러 차례 찾아와 주었는데 그때의 심정과 상황을 적어 회고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오진사라는 제주인은 가르침을 청하는 편지를 보내와 대화의 상대가 되어주었다.

이질적인 풍토와 환경에서 입맛도 맞지 않고 질병은 이어지고 외로움까지 더해진 열악한 상황 속에서 이들은 하나의 구원이었다.

그는 유배기간 중에 아내를 잃기도 했다. 15세 때 한산이씨와 결혼했다가 20세 때 사별하고 3년 후에 재혼한 예안이씨였다. 귀양살이 뒷바라지를 해 주던 아내의 죽음에 그는 「부인 예안이씨 애서문(夫人禮安李氏哀逝文)」을 지으며 통곡했다.

실의에 빠진 김정희를 위로해주기 위해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으니 초의(草衣)스님이었다. 일찍이 불교에 관심이 있었던 김정희는 백파(白坡)와 초의 등 당대의 고승들과 친교를 맺었고,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당시 해동의 유마거사라고 불릴 정도로 불교 교리에 밝았다. 초의는 제주에서 반년 동안 김정희와 함께 지내며 시를 주고받는 등 말이 통하는 벗으로서 적적한 유배생활의 큰 기쁨이 되어 주었다.

김정희의 제주유배생활 중 또 하나의 구원은 편지였다. 김정희는 유배기간에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편지를 통하여 안부와 소식을 전하고, 학예 교류를 지속 할 수 있었다.

김정희의 학예 교류에 대한 열정은 편지로 그치지 않아 동생 김명희(金命喜)를 통해서 집에 있는 책과 법첩을 가져다 보았다. 또 신간서적을 입수해서 새로운 동향까지 파악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그의 욕구를 채워주는 역할은 충실한 제자 우선 이상적이었다. 〈세한도(歲寒圖)〉의 아름다운 제작 동기는 여기서 연유한다.

1844년(헌종 10, 59세) 김정희가 제주에 유배 온 지 5년 즈음 〈세한도〉가 만들어졌다. 누구든 이의 없이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꼽는 〈세한도〉는 사의(寫意)를 위주로 한 문인화풍의 김정희 회화 특성을 잘 드러내주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늘 푸른 소나무같이 변함없는 사제지간의 정을 담아낸 발문 때문에 그 빛을 더하는 작품이다. 후에 이상적은 그 〈세한도〉를 가지고 연경에 가서 반증위, 장악진, 장요손 등 청나라 학자 16인의 제찬을 받아왔으니 이것이 바로 〈세한도〉에 붙어 있는 청유십육가(淸儒十六家)의 제찬이다. 〈세한도〉와 거기에 담긴 그 뜻이 세계적 찬사를 받은 것이다.

〈세한도〉에서 김정희가 추구한 문인화의 절정을 발견한 것처럼 그의 글씨도 제주유배시기를 거치면서 변화를 통한 확립에 들어가게 되었다. 박규수(朴珪壽)는 김정희의 글씨가 제주유배 이후 남의 글씨에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없게 되었고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또 김정희의 글씨는 제주유배기간을 거치면서 특유의 조형미가 ‘괴(怪)’라는 미학적 특성으로 구현되었다고 평가되곤 한다. 울분과 불평을 토로하며 울적한 심사를 달래려고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덧 햇수로 9년, 만으로 8년 3개월만의 어느 날 김정희에게는 길고 길었을 제주유배가 끝이 났다.

해배된 후 그는 삼호에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만년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으나 생활이 열악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유배생활과는 또 다른 적막한 이 시절에 그는 소치 허련의 소개로 정약용(丁若鏞)의 아들들과 교유를 할 수 있었다. 초의스님 역시 이번에도 함께 2년을 지내주었다. 그 외에도 벗과 제자들이 찾아와 주어 그는 외롭지 않게 지내며 많은 글씨를 남김으로써 제주유배기간에 확립되기 시작한 추사체의 완성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에 그가 쓴 여러 작품들은 추사체의 특징을 최고의 수준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절도 잠시였다. 그는 또 다시 정쟁에 휘말리며 1851년(철종 2)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고, 1년여의 유배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해배된 후에는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마련해 둔 과천의 별서 과지초당으로 옮겼다. 이 시절에도 여전히 권돈인, 초의선사 등 가까운 벗과 제자들과의 교유는 계속되었다. 특히 동암 심희순(沈熙淳), 소당 김석준, 고람 전기 등의 제자들에게 심혈을 다하여 가르쳤다. 본인의 작품 활동도 활발했는데 이 시절 그의 작품이 추구했던 정신은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었다. 그의 마지막 예서체 대련 작품 〈대팽두부(大烹豆腐)〉는 내용면에서도 이러한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외유내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불교에 관심이 깊었던 그는 특히 말년에 스님들과의 만남이 많았고 봉은사에 기거하기도 하였는데, 그곳에서 화엄경 간행 작업을 보았고 경판전 현판 글씨인 판전을 썼다. 이 판전을 쓴 지 3일 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판전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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