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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金宗瑞]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설치하다

1383년(우왕 9) ~ 1453년(단종 1)

김종서 대표 이미지

김종서 장군 묘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출생과 가문의 배경

김종서의 자는 국경(國卿), 호 절재(節齋), 본관은 순천이며 1383년(고려 우왕 9년) 출생하였다. 그의 조부는 김태영(金台泳), 아버지는 김추(金陲)이며 어머니는 배규(裵規)의 딸이다. 조부와 부은 실록 상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없어 관력이 자세하지 않으나, 그의 외조부인 배규는 태조대 사간원장무를 역임하였다. 김종서에게는 양주부사 등을 지낸김종흥(金宗興)이란 형제가 있었지만 그가 출사하기 이전까지는 특별히 명망 있는 집안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유년 시절 생장과정이나 교유관계, 학통 등에 대해서는 기록을 통해 확인하기 어려운데, 그가 좌의정을 역임하였으나 역모의 죄명으로 살해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졸기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생애와 업적

김종서는 1405년(태종 5년) 22살의 나이로 식년시 문과에 23등으로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급제 이후 제수 받은 관직은 자세하지 않으나 1415년(태종 15년)에는 상서원직장에 제수되었고, 1418년(태종 18년)에는 죽산현감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세종이 즉위하자 김종서는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고, 강원도관찰사의 손실답험이 정확한지 여부를 살피기 위하여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다음해인 1419년(세종 1년)에는 감찰로 충청도에 파견되어 가뭄에 따른 진휼의 진상을 확인하는 업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1419년(세종 1년) 10월 사간원의 우정언에 제수되었다. 1420년(세종 2년)에는 광주판관에 제수되었고, 1423년(세종 5년)에는 봉상시판관직을 수행하면서 의주삭주도에 경차관으로 파견되어 진휼 업무를 수행하였다.

1423년(세종 5년) 5월, 사헌부의 우헌납에 제수되었다. 이후 김종서는 서울에서 대간 및 육조, 의정부의 주요직을 거치면서 성공적인 관직생활을 이어 나가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고, 1425년(세종 7년)에는 이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427년(세종 9년)에는 의정부사인에 제수되었다. 한편 그는 서울의 요직을 역임하는 동안 국왕의 특별한 신임을 얻어, 지방의 실상을 파악하거나 특별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자주 경차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조정랑으로 재직 시에는 왜구를 토벌한 전라도 수군처치사 박실(朴實)에게 상을 내리고 논공행상을 위하여 전라도로 파견되었고, 의정부사인으로 있던 시기에는 황해도의 진휼을 위하여 황해도에 경차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1427년(세종 9년)에는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다. 다시 언관직을 맡게 된 그는 여러 방면에서 언론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가 사헌부집의로 있던 기간 중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처벌과 관련된 사안이 불거졌다. 태종은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위한 이후 서울출입을 금하고 지방에서 지내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폐세자 된 이후에도 음주와 사냥, 엽색 행각을 그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조정 관료들은 그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게다가 태종이 사망한 이후 세종은 형제의 정을 명분으로 몇 차례 양녕대군을 서울로 불러 만나보고, 강무 등 사냥을 나갈 때에는 동행시키기도 하였다. 당시 대간들은 양녕대군에 대한 세종의 비호에 대해 강력히 규탄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대간들 전체가 사직하는데 이르렀고, 김종서 역시 이 사안으로 전농윤으로 좌천되기에 이르렀다.

전농윤으로 좌천된 김종서는, 과거 사헌부 재직 시절 업무 과실이 드러나 파직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김종서에 대한 세종의 신임은 여전하여 파직 다음해인 1429년(세종 11년) 승정원의 우부대언에 제수하기에 이르렀다. 대언은 이후 승지로 이름이 바뀐 국왕의 비서기관으로, 국왕의 신임이 두터운 관료들만이 임명될 수 있는 자리였다. 이후 김종서는 약 5년간 승정원의 대언으로 활동하면서 국왕의 측근에서 활동하였다.

1430년(세종 12년)에는 여악의 폐지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여악이란 국가의 공식 의례에서 사용하는 음악을 여자들이 연주하는 것을 말하는데, 본래 유학에서는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에서 음악 연주는 남자가 맡는 것을 예에 적합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당시까지 음악 연주는 모두 여자가 담당하고 있었다. 이에 김종서 등이 조선의 여악을 남악으로 바꾸자는 건의를 올린 것이다. 이에 세종은 조정에서 쓰는 음악은 남악으로 바꾸자는 의견을 개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악 전통은 조선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시기마다 여악을 폐지하자는 건의가 꾸준히 제기되기도 하였다.

한편 김종서는 유교적인 결혼식인 친영례를 도입하자는 건의를 하기도 하였다. 친영이란 혼인시에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르고 신부를 데리고 다시 본인의 집으로 돌아오는 혼인형태를 말한다. 반면 당시까지 조선에서는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사는 남귀여가혼이 성행하고 있었다. 이에 세종은 김종서에게 우리나라에서 친영례를 도입하기 어려운 이유를 물었다. 김종서는 친영례로 혼인을 할 경우, 여자 집에서 혼인 일체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세종은 김종서와의 문답에서 왕실이 손수 친영례를 행하여 사대부에 모범을 보이기로 결정하였다.

그가 대언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에 대한 세종의 신임은 매우 각별한 것이었다. 당시 대언(=승지)은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각기 이, 호, 예, 병, 형, 공 6조의 사무를 하나씩 전담하여 맡아보고 있었다. 그중 서열이 가장 앞서는 지신사(=도승지)가 이조의 사무를 맡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세종은 당시 서열 2위였던 좌대언 김종서에게 이조의 사무를 맡아 인선을 담당하도록 조치하였다. 이것은 당시 관례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조치로서, 김종서에 대한 세종의 신임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김종서는 문과급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고, 언관과 요직을 역임하였다. 또한 강직한 언론 활동을 전개하고 여악의 폐지, 친영 도입을 건의 하는 등, 그의 관직생활 초중반은 전형적인 문인관료였다. 그러던 그가 북방전문가가 된 계기는 1433년(세종 15년) 12월 이조우참판겸 함길도관찰사에 제수된 이후부터였다. 특히 그가 함길도관찰사에 제수된 시점은 평안도의 4군과 함길도의 6진 지역에 대한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으로, 특히 그는 6진 개척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함길도에 도착한 그는 방어체제와 관련된 모든 분야의 업무를 총괄하면서 국경 방어의 최일선에서 지휘하였다. 1434년(세종 16년)에는 함길도 지역에 사민 입거할 민호의 수를 정하고 그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각종 지원책을 마련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특히 당시는 흉년이므로 호수를 많이 정하지 않는 대신 군역을 바로 초정할 수 있는 가호를 뽑아 입거시키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정하였다. 이에 세종은 김종서의 보고 내용을 근거로 간단한 조정의 토의를 거친 후 최종 시행안을 결정하였다.

또 그는 함길도의 여진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간첩을 양성, 여진 부락에 파견할 것을 적극 주장하여 시행하기도 하였다. 당시 함길도도절제사였던 김종서는 함길도감사 정흠지(鄭欽之), 회령부사 이징옥(李澄玉) 등과 더불어 야인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간첩을 파견할 것을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세종은 이 일을 김종서와 이징옥이 맡아 시행하도록 하였다. 특히 간첩을 파견하는 목적은 여진 추장 이만주(李滿住)의 동태를 살피는 일이었는데, 이만주는 이후 세조대까지 조선 조정에 골칫거리가 된 인물이었고 명나라와도 무력 충돌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김종서는 북방 방어에서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줄 알았던 지휘관이었다.

6진 개척이 한창이던 1437년(세종 19년)에는 당시까지의 북방개척의 성과와 방어체제, 앞으로의 과제 등을 정리한 보고를 올리기도 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북방 개척에 대한 찬반양론이 분분하였고, 해당 지역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파악 없이 주장하는 논의들도 많았다. 이에 세종은 김종서에게 그러한 사실을 전하고 자신이 가진 북방 개척의 의지를 전달하며 이후 해야 할 과제에 대해 묻는 글을 보냈다. 이에 대한 답신으로 김종서는 현재 북방 지역의 사무와 앞으로 진행해야 할 일을 논하면서 세종의 북방개척 의지에 전격적으로 동의한다는 의견을 함께 피력하였다. 또한 세종에게 일을 빨리 진행할 생각보다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진행해야 할 것임을 주장하였다. 세종은 이 답신을 보고 ‘북방에 대한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라고 환관 엄자치(嚴自治)에게 말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세종의 전폭적인 신임아래 6진 개척의 선봉에 있던 김종서였지만, 억울한 일로 파직 직전에 몰린 일이 발생하였다. 박호문(朴好問)이란 사람이 김종서가 동북면의 여진인들을 대할 때 위협적으로 대하여 여진인들의 반감을 키우고 있으며, 이 때문에 조선이 기획하는 동북면 개척 작업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참소를 한 것이다. 박호문은 최윤덕(崔潤德)이 천거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는데, 때문에 박호문의 참소는 조정에서 상당히 반향을 일으켰고 세종 역시 이에 대한 실상조사에 착수하였다. 결론적으로 박호문의 발언은 상당부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고, 그 결과 김종서는 파직의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1441년(세종 23년) 형조판서에 임명되면서 김종서는 약 10년간의 함길도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북방에서의 공로로 중앙 정계 복귀 이후 관직 승진도 순조로웠다. 같은 해 예조에 발령되어 약 2년간 판서를 역임하였다. 김종서는 예조판서로 재직하면서도 북방에서 조정에 보고되는 사안에 빠짐없이 참여하였다.

1445년(세종 27년)에는 충청전라경상도도순찰사가 되어 삼남지방에 목장을 설치할 곳을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조선에서는 국가에서 목장을 설치하고 목장마다 규정된 수의 말을 기르도록 되어 있었다. 김종서는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지역에 목장을 설치할 만한 곳을 조사하여 보고하였는데, 세종은 이 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전국 수십 개의 목장을 신설 또는 이동하여 설치하였다. 국가의 말을 관리하는 관서는 사복시였는데, 이후 김종서는 사망할 때까지 사복시 제조로 활동하면서 국가의 마정 일체에 깊숙이 간여하였다.

이듬해인 1446년(세종 28년)에는 의정부우찬성 겸 판예조사로 임명되어 1품 벼슬에 올랐다. 또 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좌빈객을 겸임하였고, 새로운 세금 제도인 공법 도입의 실무를 맡은 전제상정소의 제조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김종서는 북방 문제 뿐 아니라 의례, 조세, 외교 등 다방면에서 조정 현안에 참여하면서 관료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었다. 1449년(세종 31년)에는 우찬성 겸 판병조사로 임명되어 병조의 일을 전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449년(세종 31년) 옛 원나라의 후예인 오이라트가 흥기하고, 명나라 황제가 이들을 정벌하러 나섰다가 포로로 사로잡힌 토목의 변이 발생하였고 때문에 조선도 북방의 방어 문제가 다시 현안이 되자 김종서는 평안도도절제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영의정 하연은 평안도 방어의 적임자로 박종우(朴從愚)와 이징옥, 그리고 김종서를 천거하였는데, 김종서는 평안도도절제사로, 박종우는 함길도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오이라트의 침입 예상지로는 평안도가 가장 유력하였는데 김종서가 평안도도절제사에 임명된 것은 당시 북방의 변장 중에서도 가장 세종의 신뢰가 두터운 것이 김종서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변방이 안정되자 1450년(세종 32년) 김종서는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그가 평안도에서 서울로 상경하는 동안 세종이 사망하였다. 조정에 복귀한 김종서는 다시 우찬성에 임명되었고, 곧 좌찬성으로 승진하였다. 동시에 지경연사로 임명되어 문종의 경연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문종의 경연 첫 교재인 『근사록』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근사록』은 주자가 직접 저술한 성리학서로 유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시 되던 저술이었는데, 김종서는 문종에게 이 『근사록』을 강의하면서 불교 교리에 대한 비판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비록 북방의 변장으로 십 년 넘게 복무하였지만 본래 그가 문인으로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다시 한 번 평안도도체찰사로 임명되어 평안도 방어를 점검하고 이듬해 돌아왔다. 이후 그는 문종이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던 화차 제작에도 간여하였고, 조선군의 창검 제작 의논에도 참여하였다. 또 문종이 추진하였던 새로운 진법 제작에도 간여하였는데, 이 작업은 수양대군 및 김종서, 정인지(鄭麟趾)가 참여한 것이었다. 당시까지 조선군 전술의 근간이 되는 진법은 세종대 변계량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진법은 군대 편성, 군의 신호체계, 진의 종류, 진을 만드는 방식, 군사 훈련 방식 등을 포함하는 군과 관련된 종합적인 교범이었다. 문종의 새로운 진법 고안은 이후 새로운 군대편제로 이어졌고, 훗날 세조대 오위 편성으로까지 계승되었다.

한편 세종대부터 편찬 작업을 진행해오던 『고려사』의 편찬 작업도 이즈음 마무리되었다. 고려사 편찬 작업은 국초부터 꾸준히 이루어졌는데 번번이 문제가 발생하여 다시 편찬하기를 몇 차례 반복하였다. 이에 세종은 김종서와 정인지에게 공정한 편찬을 명하였다. 그 결과 세종 사후 문종 원년에 세가 46권, 지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으로 이루어진 현재 전하는 『고려사』 가 완성되었다. 이 작업을 마친 후 김종서와 정인지 등은 곧바로 편년체로 체재를 바꾸고 내용을 요약한 『고려사절요』 편수 작업에 착수하였고, 이 역시 1년만인 1452년(문종 2년) 결실을 맺게 되었다.

1451년(문종 1년) 김종서는 우의정에 제수되면서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예전에 겸임했던 사복시의 제조직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이듬해인 1452년(문종 2년) 문종이 왕위에 오른지 2년 만에 사망하자, 어린 임금인 단종이 즉위하였다. 당시 단종의 나이는 불과 13세였으며 왕실에는 왕을 대신할 대비도 없던 상황이었다. 이러자 황보인(皇甫仁), 김종서를 중심으로 한 의정부가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의정부의 권한이 얼마나 막강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바로 ‘황표정사’ 라는 인사방식이었다. 본래 인사가 있으면 이조와 의정부에서 대상자를 의논 하여 후보자 3명을 왕에게 추천하여 올리도록 하였는데, 이것을 삼망이라 하였다. 왕이 이를 열람한 후 맘에 드는 대상자에게 점을 찍어 의정부에 내렸는데, 이를 낙점이라고 하였다. 한데 당시 의정부에서는 단종이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감안하여, 세 명의 후보자 중에서 낙점될 사람을 미리 정하여 그 사람 밑에 노란 표를 붙여 올려보냈다. 단종은 이 노란 표에 붓으로 낙점하면 모든 인사가 결정되는 방식이었다. 이를 당시 황표정사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인사 방식에 대해 조정 안팎에서는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단종의 재위 기간 동안 강화된 의정부 권력은 조정 관료들에게 많은 반감을 샀다. 특히 수양대군을 위시한 일부 종친세력은 그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다. 당시 의정부는 황보인과 김종서, 정분(鄭苯) 등이 중심이었는데, 황보인은 1450년(문종 즉위년) 영의정에 오른 후 계속 수상직을 맡고 있었고, 김종서 역시 우의정을 거쳐 1452년(단종 2년)에 좌의정에 올랐고 같은 해 정분이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표면상 정부 수상은 황보인이었으나 실제 권력은 좌의정이었던 김종서가 가지고 있었는데, 실록 상에는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특히 황보인은 국가의 중대업무의 결정을 모두 김종서에게 미루었다는 기사는 당시 의정부 세력의 중심이 김종서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1453년(단종 1년) 의정부의 권력 비대화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수양대군과 그 일파가 일으킨 계유정난은 황보인과 김종서의 의정부 권력을 와해시킨 사건이었다. 사료에 의하면 김종서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연합하여 왕위를 찬탈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이를 사전에 알고 미리 거사를 도모하여 김종서를 제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승리자의 입장에서 사후에 정리된 것이어서 그대로 신빙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계유정난으로 김종서와 황보인등은 거사 당일 사망하였고, 이후에는 김종서, 황보인 등의 측근 인물들이 모두 숙청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수양대군은 영의정의 지위에 올랐고, 두 해 뒤 왕위에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3 사후 평가와 가계의 계승

김종서는 정승의 반열에 올랐으나 역신으로 몰려 사망하였기 때문에 시호도 받지 못하였고, 묘지도 조성하지 못하였다. 조선후기 숙종대 이르러 단종에 대한 신원이 복원되고 난 이후 수양대군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신하들 역시 점차적으로 복권되었다.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이개(李塏), 성승(成勝), 박중림(朴仲林), 김문기(金文起) 등 사육신 및 관련 인물들을 비롯하여 안평대군, 금성대군(錦城大君), 송현수(宋玹壽), 권자신(權自愼), 권완(權完)등 왕실의 종친과 단종의 외척들 역시 역신의 굴레에서 벋어났다. 황보인과 김종서를 비롯하여 정분, 민신(閔伸), 조극관(趙克寬), 이보흠(李甫欽), 허후(許詡), 정효전(鄭孝全) 등의 관료들도 모두 신원이 복권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과 연좌되었던 가족 및 친척들의 신원도 모두 복원되었으며, 이들의 신위는 모두 단종의 무덤인 장릉의 배식단에 위패로 모셔졌다. 김종서는 영조 22년 그의 묘역이 조성되면서 영조로부터 ‘충신정려’ 라는 현판을 사여 받았다.

김종서는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인 김승규(金承珪)는 사헌부지평, 형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453년(단종 원년)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계유정난 당시 아버지인 김종서를 지키다가 사망하였다. 작은 아들인 김승벽(金承璧)은 문과 급제 후 충훈부녹사를 역임하였는데 계유정난 이후 공주의 농장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었다. 김승규와 김승벽은 김종서가 신원이 복원된 이후 영조대에 이르러 신원이 복원되기에 이르렀다.

김종서는 당대 뛰어난 관료였고 북방에서 큰 공로를 쌓았지만, 실제로는 체구가 작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단종대 초반 의정부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시점에는 특유의 과단성과 기민함으로 인해 사람들이 ‘큰 호랑이’라고 호칭하기도 하였다. 북방의 군사지휘관에서 역사서 편찬자까지, 김종서는 말 그대로 문무를 겸비했던 관료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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