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김종직

김종직[金宗直]

사림의 맥을 잇다

1431년(세종 13) ~ 1492년(성종 23)

김종직 대표 이미지

김종직 초상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사림의 스승

김종직(金宗直)은 야은(冶隱) 길재(吉再)로부터 이어지는 사림의 맥을 이은 영남 사림파의 영수로 알려져 있으며, 최초의 사화(士禍)인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단서를 제공한 인물로 유명하다. 무오사화로 인해 관에서 다시 끄집어내어져 죽은 몸이 다시 찢기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벌을 당한 그의 이미지는 동시대인들에게도 현대인들에게도 매우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또한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이후 조선 정계의 핵심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는 사림파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라 평가받기도 한다. 이러한 이미지와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김종직은 세조대 이후 조정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뛰어난 관료이자 동료들에게 널리 인정받은 유려한 문장가이기도 했다.

2 성리학의 가문

김종직은 1431년(세종 13) 밀양에서 김숙자(金叔滋)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숙자는 고려 후기의 성리학자 길재의 제자로 학식이 뛰어나고 『소학(小學)』의 실천을 중요시하여 성리학의 학맥을 이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419년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과거의 행적이 문제가 되어 한직을 전전할 뿐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김숙자는 한씨와 혼인하여 자녀까지 두었다가, 그 가문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한씨를 내치고 재혼하였던 것이다. 이후 김종직은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고 변명하였지만, 조강지처를 내쳤다는 사실은 김숙자의 관직생활 끝까지 발목을 잡게 되었다.

스스로 중앙정계에서 쓴 맛을 본 김숙자는 자식들이라도 성공시켜야 한다는 마음을 강하게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성리학을 이은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김종직에게 공부가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이나, 김숙자는 김종직에게 성균관의 책제(策題)를 공부하게 하는 등 각별히 신경을 썼던 것을 보면 김숙자가 자식들이 현달하기를 기대하였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은거와 도학(道學)에의 정진 등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림파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리학과 사림의 명맥을 이었다고 평가되는 김숙자에게서는 일반적인 사림파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 보인다. 행적 문제와 벼슬길에 대한 열망 등이 그것이다. 이는 기존에 구축되어 왔던 사림파에 대한 견해가 재고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김숙자가 고려 말의 성리학자 길재의 학통을 이어 사림파의 형성에 이바지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3 중앙정계에서의 성공

김종직은 여섯 살 때부터 사서오경과 역사서 등을 골고루 배우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비록 스물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이르러서야 문과에 급제하게 되지만, 김종직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문재(文才)를 자랑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명나라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던 김수온(金守溫)은 김종직이 16세 때 처음 과거를 보았다가 낙방하였을 때 지은 글을 보고 이후 문형(文衡)을 맡을 솜씨라고 감탄하여 임금에게 천거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 합격 여부와 상관없이 김종직의 재능은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과거에 합격한 후 김종직은 출세가도를 걷기 시작했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인정받았던 그의 글 솜씨가 빛을 발하였다. 그는 관직 초기 승문원(承文院)의 직책을 담당하면서 애책문(哀冊文)과 옥책문(玉冊文) 등을 작성하였으며, 예종(睿宗) 승하 당시에는 교지를 받들어 시책문(諡冊文)과 만사(挽詞)를 지어 올리는 등, 특유의 글 솜씨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 외에도 김종직은 사헌부(司憲府)와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의 직책을 두루 거치며 당대의 엘리트들에게 주어지는 관직을 역임하였다.

관직 생활 초기 김종직은 당시의 관료들과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고, 기존 정치세력으로부터 배척을 받은 일도 없었다. 세조에게 잡학(雜學)은 유학자의 일이 아니라고 간언하다가 파직당한 일이 있지만, 1년 정도 후 다시 등용되었던 것에도 알 수 있듯이 그다지 큰일은 아니었다.

4 지방에서의 강학 활동

중앙정계에서 승승장구했던 김종직의 관직 생활 초기 모습은 우리가 흔히 김종직에 대해 연상하게 되는 일종의 순교자와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김종직의 모습은 대부분 그가 함양군수로 재직하였던 시절부터 쌓아온 것이다. 그는 40세 이후로는 연로하신 모친의 봉양을 이유로 함양, 선산 등의 지방관을 맡았다. 중앙정계에 있을 때보다는 보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그는 평소 생각해왔던 학문의 진흥을 위한 방안을 실행하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인재들을 길러내는 강학활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세조에게 파직당한 후 1년 정도를 쉬면서 이미 여러 인재들을 가르친 바 있던 김종직이었다. 함양에 도착하여 지방관의 업무에 매진하면서도, 여가 때에 함양의 총명한 아이들을 선발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김종직의 강학 활동이 차츰 알려지면서부터는 다른 지방의 인재들도 찾아와서 김종직에게 수학하였다. 대표적인 김종직의 제자이자 무오사화 당시 피해를 입었던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도 이때부터 김종직을 찾아와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친구 사이였던 두 인재를 맞이하여 김종직은 그들의 출중한 재주에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다. 김종직은 옛사람들이 글을 배웠던 순서에 따라서 먼저 『소학』과 『대학(大學)』을 읽힌 후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읽게 하였다고 한다. 이는 강령(綱領)과 지취(旨趣)를 알고 나서는 도의(道義)를 연구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었다.

강학활동에 매진하였다고 해서 김종직이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관의 임무를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다. 김종직이 함양에 부임하였을 때 조정에서는 함양 백성들에게 차(茶)를 공물(貢物)로 바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함양에는 차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군민들은 공물로 바칠 차를 구하기 위해 전라도까지 가야만 했다. 차를 직접 재배하는 것도 아니고, 멀리까지 가서 구매한 후 다시 공물로 상납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 번거로움과 폐단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백성들의 고통을 본 김종직은 이를 덜어주기 위해 관에서 직접 차를 구하여 공물을 상납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만으로도 백성들의 번거로움은 상당히 덜어준 것이었지만, 김종직의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삼국사(三國史)』를 읽던 중 신라시대에 당나라로부터 차의 종자를 얻어다가 지리산에 심었다는 대목을 발견하였다. 함양은 지리산 바로 옆에 있으므로 차의 종자가 분명히 전해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김종직은 그 지역을 수색하게 하여 차의 종자를 찾아내었다. 그 지역을 관전(官田)으로 사들여 차를 재배하게 하자 몇 년 후에는 충분히 공물로 올릴 정도의 생산량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백성들의 편안함을 위한 김종직의 노력은 중앙정부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그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하는 한편 다시 승문원(承文院)의 관직에 임명되어 중앙정계로 복귀할 기회를 얻었다.

김종직은 다시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그를 아꼈던 성종(成宗)의 배려로 본관인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임명되어 노모를 봉양할 수 있었다. 그는 함양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정을 펼쳤으며, 향음주례(鄕飮酒禮), 양로례(養老禮) 등을 시기별로 설행하도록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성리학의 예법을 따르도록 권장하였다. 또한 밀양의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지방 교육과 향교 역할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비록 성리학이 지방사회 곳곳에 스며들기 까지는 김종직 사후에도 오래 시간이 필요하였지만, 그는 성리학의 이념이 지방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이다.

5 무오사화

김종직의 지방관 재임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함양에 막 내려갔을 때의 일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세조의 총신인 유자광(柳子光)이 함양군에 와서 놀다가 쓴 시가 판에 새겨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유자광이 어떤 자이길래 감히 현판을 걸었단 말이냐’하며 진노해서는 현판을 내려 불태워버렸던 것이다. 이로 인해 유자광과의 악연이 시작되었으며, 또한 이는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한 사건이기도 했다.

김종직은 중앙정계에 복귀하여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말년에는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가 다시 강학활동에 매진하다가 병이 중해져 1492년(성종 23) 8월 세상을 떠났다. 성종은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도록 하였으며, 결국 김종직이 죽자 이틀 동안 조회를 정지하기도 하였다.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무난한 관직 생활을 한 김종직의 생애는 당시로서 매우 순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죽은 뒤에 모진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수난의 발단은 바로 관직에 등용되기 전에 썼던 『조의제문』이었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꿈속에서 항우(項羽)에게 살해당한 의제(義帝)를 만난 후 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쓴 글이다. 글을 썼을 때만 하더라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나, 문제는 김종직의 사후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이 글을 『성종실록』 편찬을 위한 사초(史草)에 기록한 것이었다.

당시 실록청 당상관이던 이극돈(李克墩)은 김일손과 좋지 않은 사이였다. 그는 김일손이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그대로 사초에 실은 것을 보고 이를 고쳐주기를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이에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에 실린 세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문제 삼아, 유자광과 논의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재직할 때 자신의 시를 불태운 것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유자광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노사신(盧思愼) 등과 논의한 뒤, 연산군(燕山君)에게 고발하였다. 진노한 연산군은 김일손을 붙잡아 문초를 시작하였고, 불똥은 김종직에게까지 튀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세조가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그를 죽인 것을 항우와 의제에 빗대어 비난한 것이라 지목당한 것이었다.

결국 사건의 주인공 김일손은 온몸이 찢기는 능지처참을 당하고 김굉필과 정여창은 유배를 가는 등, 김종직의 제자들이 큰 화를 당하였다. 『조의제문』을 써서 단초를 제공한 김종직도 죽은 몸이라 해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분노한 연산군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시신을 꺼내 온몸을 찢도록 명하였고, 김종직의 문집은 모두 불태워졌다. 그는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후에야 다시 복권될 수 있었다.

6 엇갈리는 평가

무오사화로 인해 김종직이 관에서 다시 끄집어내어져 온몸이 찢기는 형벌을 당한 사건은 그를 영남 사림의 영수로 추앙하도록 만들었다. 중종 재위 당시 정치개혁을 이끌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와의 관계 또한 김종직의 이름을 사림파를 이끈 인물들의 계보에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 사림파는 자신들의 뿌리를 조광조로부터 찾곤 하였는데, 조광조는 바로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로부터 학문을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김종직에 대한 상반된 평가도 존재한다. 그는 비록 문과에 급제하기 전 『조의제문』을 쓰긴 하였으나,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이끄는 조정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세조와 그의 왕위 찬탈을 도운 공신들을 위해 수차례 글을 쓰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는 사림이 중요시하는 도의(道義)를 저버린 행위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황(李滉)과 같은 인물들은 김종직을 단지 글 쓰는 데에 재주를 가진 문사(文士)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송시열(宋時烈)이 인정하였듯이, 김종직은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학통을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 이어주는 큰 공헌을 하였다는 데에서 그 중요한 역할을 찾을 수 있다. 비록 그의 행적 자체가 온전히 도학자의 그것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훗날 조선의 전성기를 이끈 성리학자들이 스스로 구축해나간 정체성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는 데에서 김종직의 역할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