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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南九萬]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1629년(인조 7) ~ 1711년(숙종 37)

남구만 대표 이미지

남구만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론으로서 정치적 입지를 굳히다.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태어나 활동했던 시기는 양란을 겪은 후 그로 인한 타격을 국가 차원에서 수습하고, 민생의 안정과 통치 질서의 강화 등 전란의 피해 복구와 재정비를 도모하던 때였다. 정치적으로도 서인과 남인의 연합정국에서 국왕은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환국의 방식을 채택하여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하다가 최종적으로 서인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서인 내에서도 자체 분열을 하여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지는데, 남구만은 소론계열의 대표적 인물로서 명망 있는 학자·문장가이면서 고위 관직을 수차례 역임한 관료이기도 하였다. 사후 그의 정치 관료로서의 역할을 인정받아 이후 숙종[조선](肅宗)의 묘정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2 숙종대 전란의 피해 복구를 통해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다.

남구만이 태어난 17세기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국왕이 된 인조[조선](仁祖)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후, 그로 인한 타격을 국가 차원에서 수습하고, 민생의 안정과 통치 질서의 강화 등 전란의 피해 복구와 국가 재정비 사업을 도모하였던 때였다.

특히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孝宗)은 봉림대군(鳳林大君) 시절에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수모를 되갚기 위해 적극적으로 북벌론(北伐論)을 계획하였다. 어영청(御營廳)을 2만 명으로 확대하거나, 친청파 대신인 김자점(金自點) 을 몰아내고, 청에 대한 복수를 지지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김집(金集), 권시(權諰), 이유태(李惟泰) 등 서인으로써 재야에서 학문을 하던 젊은 산림인사를 대거 등용하여 북벌에 박차를 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으로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이 가져온 조총의 기술을 도입하여 서양식 무기를 제조한 것도 모두 북벌의 일환이었다.

효종이 사망한 이후 북벌운동은 좌절되었고, 이후 조선은 내적인 방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북벌을 대체하였다. 1694년(숙종 20) 숙종(肅宗)은 강화(江華)에 성을 쌓고,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쌓는 등 수도방위를 강화하였다. 1712년(숙종 38) 조선은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건립함으로써 조선 측의 영토 확장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였다. 이 외에도 북한산성(北漢山城), 평양성(平壤城), 안주성(安州城) 등이 잇달아 축조되면서 방위 체계가 훨씬 강화되었다. 한편, 1696년(숙종 22) 수군(水軍) 출신의 안용복(安龍福)이 울릉도와 우산도(于山島)에 출몰하는 왜인을 쫒아내고 일본 당국과 담판하여 우리의 영토임을 승인받는 등 해방(海防) 정책이 강화되기도 하였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1651년(효종 2)에는 김육(金堉)의 건의로 시행되었던 대동법(大同法)을 충청도, 전라도까지, 1708년(숙종 34)에는 황해도 지방까지 확대하였고, 삼남지방에서는 양전 사업이 완료되어 토지 66만 7800결을 새롭게 얻고 전국의 인구도 680만 명으로 늘어나서 전란의 복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양상을 보인다.

정치적으로 서인이 인조반정을 주도하고, 효종의 북벌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우세한 입장을 지닌 가운데, 남인과 연합정국을 구성하였다. 숙종은 45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서인과 남인의 연립 방식 대신에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환국(換局) 방식을 채택하였다. 숙종 초에서 1694년(숙종 20) 까지는 주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하였으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해 남인이 재기 불능의 상태로 전락하면서 부터는 서인 내에서 갈라진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이 번갈아 집권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처럼 17세기 조선은 치열한 정책 대결 속에서 국가 발전이 가속화되었고, 민생의 안정을 위한 경제 정책, 전란의 피해 복구 등의 노력을 통해 국가재정비사업이 마무리되면서 중흥의 기틀이 다져진 시기였다.

3 소론의 정체성을 지닌 학자 관료의 삶을 살다.

남구만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서인 그 중에서도 소론의 정체성을 지닌 채, 명망 있는 문학가 문장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의 본관은 의녕(宜寧)으로, 조선전기 개공 공신인남재(南在), 남지(南智)의 후손이다. 그의 조부는 남식(南烒), 아버지는 현령 남일성(南一星), 어머니는 권박(權瞨)의 딸이다. 이외에도 남구만과 지속적인 교류를 가졌던 인물의 하나인 박세당(朴世堂)은 그의 매제이며, 남구만의 고모부는 병자호란 당시 순절한 오달제(吳達濟)이다. 그의 아내는 동래 정씨(東萊 鄭氏) 봉사(奉事) 정수(鄭脩)의 딸이다.

그가 살았던 지역에 대해 살펴보면, 남구만의 가문은 “남재 이후 세력을 떨치지 못하여 호서의 결성(結城)에 우거(寓居)하였다”는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가문이 기울면서 충청도의 결성 지역에 우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성(結城)은 현재 충청도 홍성지역으로, 저자의 외가였다. 이후 남구만은 1646년(인조 24) 관례를 치른 후 서울로 올라와 거주하였으며, 사직하거나, 유배 후 방환되었을 경우에는 결성에 머물렀으며, 이 외에 충청도의 진천(鎭川)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벼슬을 그만둔 이후에는 용인(龍仁) 비파담(琵琶潭)에 거주하여 말년을 보냈으며, 그의 사후 후손들은 양주(楊州)의 화접동(花蝶洞)에 그를 매장하였다.

남구만의 사생(師生) 관계를 보면, ‘어려서는 (남구만) 아버지의 동생에게 학문을 배웠다.’는 기록을 통해 보더라도 어려서 아버지와 숙부인 남이성(南二星) 등 가학을 통해 학문을 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례 이후에는 관직을 맡게 되면서 새로운 사생관계가 성립되었다. 남구만은 1657년(효종 8) 병조좌랑 겸 중학교수(中學敎授)가 되어 경연에 참여하였는데, 그 때 송준길과 권시(權諰)는 강관(講官)으로 남구만을 극찬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남구만은 송준길의 문하에 학업을 청하여 문인 사우와 더불어 종유하여 명망이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그는 특히 김익희(金益熙)와 이민적(李敏迪) 등과 교유가 깊었다. 서울에 유학하여 김익희에게 의탁하였는데, 그가 아껴서 그의 자제, 조카 등과 함께 공부하도록 하였으며, 이민적 형제와도 사귀며 즐겼다. 두 집안이 서로 칭찬하여 추천하고 좋은 평판을 널리 퍼뜨리니 저절로 유림의 우두머리에 있게 되어 명성이 이미 알려졌다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두 집안과의 좋은 유대로 남구만의 명망이 더욱 확고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민적의 동생 이민서(李敏敍)는 딸을 남구만의 장남인 남학명(南鶴鳴)과 혼인을 시킴으로써, 남구만과 이민적 집안은 교유관계를 넘어서 친인척 관계로 진전되었다. 이 외에도 남구만은 매제인 박세당을 비롯하여, 이단상(李端相), 민정중(閔鼎重), 박세채(朴世采), 윤지완(尹趾完), 신익상(申翼相), 서문중(徐文重), 최석정(崔錫鼎) 등 명망 있는 학자들과 서간을 통해 교유하였는데, 특히 서인 소론계열과의 교분이 두드려져 보인다.

4 환국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정치적 부침을 겪다.

남구만의 정치 입문은 1651년(효종 2) 사마시(司馬試), 1656년(효종 7)에 별시(別試)로 합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남구만은 처음에 한미하고 소원한 집에서 출세하여 재학(才學)과 풍절(風節)로 임금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고 벼슬을 취하였다. 능력으로 명성이 드러나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추증되었고, 삼사의 지위에 40년이나 있었다는 평가를 통해서 보듯이 남구만은 한미한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재주와 강직한 성품으로 청요직에 선발되면서 명성을 쌓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붕당간의 정치적 대립이 첨예하던 시절에 고위 관직을 지냈던 만큼 정치적 쟁점의 가운데 있었고, 그 결과 정치적 행보에 부침이 심하였다. 1679년(숙종 5)에는 서인으로서 남인의 윤휴(尹鑴)·허견(許堅)의 죄를 청하다가 자신이 공격을 받아 유배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고, 허적(許積), 윤휴(尹鑴)와 허견(許堅) 등 남인이 축출되면서 다시 도승지로 소환되었다. 서인들은 이러한 남구만의 행보에 대해 ‘청의(淸議)를 도와 훈척(勳戚)을 내쫓으니, 더욱 사류(士流)들의 우러르는 바가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발발 이후 남인이 재집권하자 남구만은 다시 강릉에 중도부처(中途付處) 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다시 영의정의 직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남구만은 장희재(張希載)나 장희빈(張禧嬪)에 대해 중형을 주장하는 노론 김춘택(金春澤), 한중혁(韓重赫) 등의 견해에 반대하며 사건의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소론 측에서 제시한 남구만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동궁(東宮)의 처지가 지극히 외롭고 위태하였기 때문에 역적을 두호한다는 비방을 당하면서도 동궁을 위하여 죽기를 원하는 뜻을 보여서 임금의 마음을 굳히고 역절(逆節)을 막음으로써 난국을 미연에 없애려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평가를 받을 만큼 남구만은 이 사안의 확산을 막고자 하였고, 이로 인해 노론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733년(숙종 33)에는 치사(致仕)를 허락받아 봉조하가 되었고, 용인 비파담으로 돌아간 후 사망하였다. 이처럼 남구만은 환국(換局)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부침을 심하게 겪었고, 그 과정에서 서인, 소론으로서 정체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이 외에도 남구만은 북방의 영토정비와 해방에 지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1671년(현종 12) 4년 동안 유학과 무술을 장려하고, 무산부(茂山府)와 자성(慈城)을 신설하고, 갑산(甲山)과 길주(吉州) 사이에 도로를 개통하여 폐지했던 4郡의 복설을 청하였다. 이것은 숙종 말년에 성과를 얻어 일부 회복이 되어 압록강 연안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안용복이 일본에 가서 울릉도가 우리 영토임을 주장하고 돌아온 사안에 대해 조정에서 국가의 허락도 없이 국제분쟁을 일으켰다고 사형이 논의되었지만, 남구만은 ‘대마도의 왜인이 울릉도를 죽도(竹島)라 거짓 칭하고, 강호의 명이라 거짓으로 핑계대어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울릉도에 왕래하는 것을 금지하게 하려고 중간에서 속여 농간을 부린 정상이 이제 안용복 때문에 죄다 드러났으니, 이것은 또한 하나의 쾌사(快事)입니다’라고 만류함으로써 사형의 극형을 면하게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구만은 1663년(현종 4) 호남지역의 대동법 실시를 헌의하였고, 1670년(현종 11) 청주목사(淸州牧使)가 되어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한 치적을 인정받기도 하였으며, 1671년(현종 12)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북변을 순행하고 각 읍의 民役을 감해주기를 청하는 등 민생의 회복에 주력하였다.

이 외에도 남구만은 명경과(明經科)를 개선하여 구독만으로 인재를 선발할 것이 아니라 경전의 의미를 해석하는 능력을 고려하였다.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어서는 사습(士習)의 시정을 위해 학제를 정비하고 스승과 제자의 매월 3차례의 강회를 정례화하여 학풍 진작에 힘을 기울였다.

5 사후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다.

남구만은 사람됨이 단아하고 정연하며 몸가짐에 절도(節度)가 있었으며, 문사(文辭)가 법도 있고 아름다웠으며, 필획(筆畫) 또한 예스럽고 힘찼다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문장가로서의 재주는 유림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아 명성이 알려졌다. 남구만의 수려한 문장력으로 인해, 현종이 승하하자 그의 시책문(諡冊文) 서사관(書寫官)으로 임명되었으며, 현종의 행장(行狀)을 짓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후대 사관은 임금의 서찰(書札)과 시장(詩章)에 기여한 뜻이 정중하므로 물고기와 물[魚水]의 만남처럼 서로 친밀한 만남이었다고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일컫는다고 평가하였다.

이외에도 젊어서부터 문재(文才)가 있었고, 필법(筆法)도 또한 공교하고 아름다웠다는 평가 역시 그의 문장가로서의 재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숙종은 남구만에 대한 예우를 융숭하게 하였는데, 남구만의 병이 위독함을 듣고 특별히 두 어의를 보내어 간병하게 하고, 자주 내국의 약(藥)을 내려 주었고, 이어 사망한 후에는 3년간 녹봉(祿俸)을 줄 것을 명하였다.

경종은 남구만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윤지완, 최석정 등과 함께 숙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약천집(藥泉集)』이 있다. 이 문집은 그의 아들 남학명과 남극관(南克寬)이 보관 정리하였으나 간행되지 못하다가 1723년(경종 3) 소론 정권이 들어선 이후 남처관(南處寬)에 의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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