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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신[盧思愼]

강력한 왕권을 뒷받침하며 조선의 기반을 다지다

1427년(세종 9) ~ 1498년(연산군 4)

노사신 대표 이미지

동국통감 본문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1 조선의 기반을 다진 관료

노사신(盧思愼)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단종(端宗) 대에 관직에 올라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 연산군(燕山君) 등을 섬기며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노사신은 세조의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하였고 두 번이나 공신(功臣)의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세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니만큼 강력한 왕권을 구사한 왕으로 손꼽힌다. 그래서인지 세조의 신임을 받으며 성장한 노사신 또한 왕권의 강력함을 선호하였던 듯하다. 노사신의 이러한 성향은 연산군의 폭정과 수차례의 사화를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하기는 하였지만, 무오사화(戊午士禍) 당시 사화의 규모가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는 등 원칙은 지킨 인물이었다.

노사신은 단순히 왕권에 기생하여 승승장구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국왕들의 신임을 받은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는 조선의 통치규범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여러 역사서와 지리지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어질 조선왕조의 기반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

2 명문가의 뛰어난 아이

노사신은 1427년(세종 9) 노물재(盧物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조선 초기 명문가인 교하 노씨(交河 盧氏) 집안이었다. 노사신의 조부인 노한(盧閈)은 세종(世宗) 대에 우의정을 역임한 인물이다. 조모는 여흥부원군 민제(驪興府院君 閔霽)의 딸로, 조선의 제3대 국왕 태종(太宗)의 비(妃)이자 제4대 국왕 세종의 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의 동생이 된다. 노사신의 부친 노물재 또한 세종 대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냈으며, 모친 청송 심씨(靑松 沈氏)는 영의정을 지낸 청천부원군 심온(靑川府院君 沈溫)의 딸로, 세종의 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의 동생이다.

노사신 본인의 집안도 대대로 고위직에 오른 명문가였으며, 조모와 모친의 집안이 모두 국왕의 사돈 집안이었으므로 조선 초기 이름 높은 문벌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사신 본인은 부유하고 권세 있는 집안의 자식처럼 행동하지 않고 오히려 소탈하여 겉치레를 일삼지 않고 또한 재산을 증식하는 데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노사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그다지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성장한 후 국가의 중대사를 담당하였던 만큼 그의 총명함에 대한 일화는 확인할 수 있다. 노사신은 어렸을 때 친구 홍응(洪應)과 함께 홍응의 외숙 윤형(尹炯)에게 글을 배웠다. 홍응은 이후 노사신과 함께 조정 대신으로 활약한 인물이며, 윤형은 세종이 능력을 인정한 바 있던 명신(名臣)이다. 그러한 윤형이 자신에게 학문을 배우던 노사신을 보고 외조카 홍응에게 ‘노씨 집안의 이 아이는 참으로 큰 인물이다. 이후 명성과 벼슬이 너와 비슷할 것이다’라고 하니, 국가의 기둥이 될 인물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던 모양이다.

3 벼슬길

노사신은 1451년(문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53년(단종 1)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다. 바로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에 선임된 그는 집현전부수찬, 성균관직강, 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처음부터 순탄한 벼슬살이이기는 했지만, 노사신이 본격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것은 세조의 통치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세조는 특히 그를 신임하여 정5품 좌문학(左文學)에 재직 중이던 그를 발탁하여 정3품 당상관인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하였으며, 이어 우부승지(右副承旨)에서 도승지(都承旨)로까지 승진시켰는데, 실로 이례적인 특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조가 노사신을 신임한 것은 그의 탁월한 학문 능력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조선시대에는 경연(經筵)이라는 제도를 두어서, 학문이 뛰어난 신하들로 하여금 국왕에게 각종 경서와 사서를 강연하는 자리를 갖도록 했다. 국왕으로 하여금 정사를 올바르게 처리할 수 있는 소양을 갖도록 한 절차이지만, 국왕 입장에서는 솔직히 신하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귀찮기도 힘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노사신은 경서와 사서를 강론함에 있어 사리를 분별하여 대답하는데 전혀 막힘이 없어, 세조가 매번 밤중까지도 피곤함을 잊고 학문에 몰두했다고 한다. 국왕인 세조가 밤중까지도 책을 보니 경연을 하는 노사신 또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금중(禁中)에서 유숙하는 날이 많았다. 심지어는 휴가를 써서 쉬다가도 세조의 부름을 받고 들어왔다고 하니, 노사신에 대한 세조의 신임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세조는 일찍이 여러 신하들의 재주를 평론하면서 특히 노사신에게는 활달함이 제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으니, 학문이 뛰어난 노사신에게는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서 정리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사신의 능력을 인정한 것은 세조 뿐 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제9대 국왕 성종 또한 노사신의 학문 능력을 신임하였다. 하루는 성종이 경연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보려는데, 강연하는 신하가 구두(句讀)를 제대로 떼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자 성종은 노사신에게 명하여 구결(口訣)을 붙이게 하였으며, 이후 어려운 서적은 모두 노사신으로 하여금 풀이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4 나라의 기반을 다지다

노사신의 능력은 단순히 국왕의 신임을 사는 데 유효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능력은 실제 정치 현장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정에서 큰일을 논의할 때마다 그는 지나간 역사 속에서 살필 수 있는 고사(古事)를 인용하고 또한 이를 실제 현실과 대조하여 주석을 달아 제시하였는데, 그것들이 모두 시행할 만한 것들이어서 당시의 관료들 중에 노사신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노사신은 지방을 위무하는 데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1491년(성종 22) 1월 올적합(兀狄哈)의 여진족 1,000여 명이 영안북도의 조산보(造山堡)를 공격해 온 적이 있었다. 북방에서 여진족의 약탈은 조선의 계속된 골칫거리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수차례 여진 정벌이 논의된 바 있었고, 특히 이 해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마침내 성종은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을 토벌할 것을 결정하였다. 당시 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 허종(許琮)과 북도절도사(北道節度使) 성준(成俊) 등 영안도 지역의 병력이 대거 차출되어 영안도가 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노사신은 영안도도체찰사(永安道都體察使)로 임명되어, 북방의 백성들을 위무하고 다른 방면에서의 적의 침입을 방비하는 임무를 맡아 훌륭히 수행하였다. 이에 이듬해 노사신은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어 정승의 반열에 올라섰다.

특히 노사신의 능력이 발휘된 것은 제도와 문물 정비 분야였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법전 편찬에 착수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1397년(태조 6) 『경제육전(經濟六典)』이라는 조선 최초의 법전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후로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 등을 지속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하였고, 세조 때에 이르면 단순한 보완이나 수정만으로는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시 한 번 체계적인 법전의 편찬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사실 이는 법전을 하나 더 만들어내면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근 백년에 이르는 동안 새롭게 드러난 문제점과 변화된 상황을 고려하여 국가의 체계를 다시 한 번 확립하는 국가의 중대 사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조는 당시 조정을 이끌고 있던 엘리트 관료들에게 새로운 법전, 즉 『경국대전』을 만드는 일을 맡겼으며 노사신 또한 이 일에 동원된 인물 중 하나였다.

노사신은 『경국대전』 편찬의 총책임자 중 하나였으며, 특히 호조판서(戶曹判書)로서 육전 중 하나인 「호전(戶典)」의 편찬을 맡았다. 『경국대전』 의 육전(六典) 중에서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호전」은 호구(戶口), 토지제도(土地制度), 조세(租稅) 등 나라의 재정(財政)을 규정하는 부분이었으므로 국가의 근간을 정비한 노사신의 공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경국대전』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실정과 맞지 않는 부분이 드러나 여러 번 보완되고 수정되긴 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 개창의 이념이 『경국대전』에 온전히 담겨 있고 또한 구체적인 조목은 변천을 겪었어도 그 안에 담긴 이념은 면면히 계승되었다는 것을 볼 때, 노사신의 공은 실로 오백년 동안 이어진 조선왕조의 기반을 닦았다고 볼 수 있겠다.

노사신은 『경국대전』 편찬 외에도 나라의 문물 정비에 꾸준히 공을 세웠다. 1458년(세조 4)부터는 고대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동국통감』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당시의 역사서는 사실을 기록하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대의(大義)를 기준으로 하여 철저한 평가를 더하였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따라서 역사서의 편찬은 고금의 역사에 대해 해박할 뿐 아니라 성리학 경전들에도 정통하여 대의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를 통해 조선이라는 국가가 지향하는 모습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에, 역사서의 서술은 당대의 엘리트들이 주도할 수밖에 없었고 노사신은 그 중 하나였다. 그 외에 노사신은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리서의 편찬에도 참여하여 조선 왕조의 지방 통치에 큰 공을 세웠다.

5 강력한 왕권에 대한 신념과 그 그늘

노사신은 두 차례나 공신의 지위에 올랐는데,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의 역모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오른 것이 첫 번째이며, 1471년(성종 2) 성종을 잘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오른 것이 두 번째이다. 1482년에는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이는 노사신이 국왕을 보좌하는 데에 주력한 왕권친화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세조와 성종 등 국왕들의 큰 신임을 받으며 국가의 엘리트로 성장하였기 때문일까. 노사신은 강력한 왕권에 대한 신념을 지니게 되었고, 이러한 신념은 연산군이 즉위한 후 노사신의 행동을 규정하였다. 노사신은 이미 성종 연간에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 연산군의 즉위와 함께 영의정의 직위에 올랐다. 나라의 최고 대신 중 하나인 정승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가 국왕을 보좌하는 것이었으므로, 연산군 대에 정승의 반열에 있던 노사신은 언론을 담당하면서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삼사(三司)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는 평가도 있다.

노사신은 연산군 대에 왕권 행사에 문제제기를 하는 삼사에 수차례 강력하게 대응하였으며, 삼사의 비판을 월권행위라며 강력히 비판하였다. 대간을 처벌한 연산군의 결정을 단호하다며 칭송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따라서 삼사는 노사신을 표적으로 삼아 수차례 파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언론을 담당한 언관들과 서로 얼마나 으르렁거리는 사이였던지, 심지어 언관 중 하나였던 조순(趙舜)은 노사신의 고기를 씹어 먹고 싶다고까지 표현할 정도였다.

노사신은 왕권을 지나치게 비호한 나머지 연산군의 폭정을 막지 못하였다. 특히 최초의 사화인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의 발발에 있어 노사신은 미온적이나마 동조하였으므로, 사림이 정권을 잡은 후대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였다.

무오사화는 성종의 실록을 편찬할 당시, 김종직(金宗直)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쓴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발생하였다. 당시 실록청 당상이었던 이극돈(李克墩)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사초에 실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김일손에게 수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김일손은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극돈은 유자광(柳子光)과 사초 문제를 논의하였다. 유자광은 다시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노사신과 윤필상(尹弼商) 등과 모의한 후 김일손이 사초에 쓴 세조대의 일을 연산군에게 고발하였고, 사초의 내용을 확인한 연산군이 진노하여 일으킨 것이 바로 무오사화이다. 분노한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등은 능지처참((凌遲處斬)에 처하였다.

김종직과 김일손은 새로운 문풍(文風)을 흥기하기 위해 성종이 등용한 사림파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은 당시 집권 세력의 기득권을 비판하였고, 이들의 비판을 받고 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극돈, 유자광 등 세조의 공신들이었다. 따라서 이극돈, 유자광 등이 김일손의 사초를 빌미로 하여 사화를 일으킨 것은 당시 정치적 대립의 필연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비록 노사신은 무오사화의 발발에 일조하기는 하였지만, 이 기회를 틈타 사림 세력을 일소하고자 한 유자광의 견해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노사신은 김종직은 대역죄에 해당하지만 그 제자 김일손 등은 단지 김종직의 시문을 찬양한 것에 불과하므로 극형에 처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으며, 사화를 확대하려 하는 유자광의 의도를 경계하면서 나라에 바른 말을 하는 청류(淸流)의 선비들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자신의 고기를 씹어 먹고 싶다고 비판한 적이 있던 조순을 처벌하자는 유자광의 주장에 반대하기도 하였다.

6 사망과 평가

무오사화의 여진이 계속되던 음력 1498년 9월 6일 노사신은 자택에서 7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연산군은 내의(內醫)를 파견하여 치료하게 하였지만, 노사신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연산군은 승지를 보내 이후의 일에 대해 물었다. 노사신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신은 별다르게 할 말이 없지만, 다만 원하는 것은 임금께서 경연(經筵)에 자주 나아가 형벌과 포상이 바로 맞도록 하게 하시는 것뿐입니다.” 연산군의 폭정이 이어질 것을 이미 눈치 챘던 것일까? 그는 마지막까지 국왕을 보필해야 하는 자신의 책임을 더하였다.

노사신은 개인의 탁월한 능력과 더불어 국왕의 비호를 받으며 엘리트 관료로 성장하였고, 『경국대전』 편찬과 같이 국가의 체계를 세우는 데에 일조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속해있던 국가체계와 그를 뒷받침하던 왕권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폭정까지 나아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노사신은 정승으로서 국왕을 보필해야 하는 자신의 의무를 죽을 때까지 다하였고, 그 부작용 또한 최소화하고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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