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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文定王后]

수렴청정으로 절대권력을 휘두르다

1501년(연산군 7) ~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 대표 이미지

함양 용추사 무학대사 영정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조선의 제11대왕 중종[조선](中宗)의 제2계비이자 조선의 제13대왕 명종[조선](明宗)의 어머니이다. 중종대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사림정치가 퇴조하고 척신정치가 성행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중종의 제1계비의 아들인 세자(후의 인종)를 제치고 자신의 아들인 경원대군(후의 명종)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자신의 남동생들과 친척들을 척신으로 끌어 들였다. 결국 인종이 일찍 사망하고 자신의 아들 명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국왕의 모후로서 수렴정치를 펼치게 되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림들을 축출하고 숭불정책을 펼치는 등 반성리학적 척신정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2 가계와 왕비 책봉

1499년(연산군 5)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성종의 둘째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왕위에 오르게 되며 진성대군의 부인인 신수근(愼守勤)의 딸 신씨는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로 책봉된다. 단경왕후의 아버지인 신수근은 중종의 장인이면서 한편으로는 연산군의 처남이 되는데 반정에 반대하다 자신은 물론 일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기에 반정공신들은 장래를 위하여 신씨를 폐서인하여 사가로 보내고 말았다. 반정공신들은 중종의 새 왕비로 반정의 주도세력인 윤임(尹任)의 여동생이자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을 중종의 계비로 추대하였으니 그녀가 곧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이다. 장경왕후 윤씨는 중종과의 사이에서 효혜공주(孝惠公主)와 세자(후의 인종[조선](仁宗)) 두 자녀를 두었는데, 왕비가 된지 8년 만에 세자를 낳다가 산후병으로 사망하였다. 그러자 윤임은 세자의 보호를 위해 같은 가문 출신 중에서 중종의 두번째 계비를 물색하였고 결국 윤지임의 딸 윤씨가 그 대상자로 지목되었다. 이렇게 1517년(중종 12) 윤지임의 딸 윤씨는 중종의 두번째 계비가 되었으니 곧 문정왕후이다.

문정왕후의 본관은 파평(坡平), 할아버지는 윤욱, 아버지는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으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를 지낸 윤지임(尹之任)이다. 윤지임은 성종·연산군대 승지·부제학 등을 지낸 이덕숭(李德崇)의 딸 이씨를 맞아 윤원개, 윤원로, 윤원형 세 아들과 한 딸을 두었는데 그 딸이 성장하여 중종의 제2계비가 된 것이다. 그녀의 성품에 대해서는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 ‘천성이 엄의(嚴毅)하여 비록 상(上)을 대하는 때라도 말과 얼굴을 부드럽게 하지 않았다’라는 표현 등에서 그 대체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문정왕후는 중종과의 사이에서 네 공주들인 의혜공주(懿惠公主), 효순공주(孝順公主), 경현공주(敬顯公主), 인순공주(仁順公主)를 출산한 끝에 1534(중종 29) 그토록 소원하던 아들 경원대군(慶源大君)을 얻었다.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아는’, 곧 ‘강하고 똑똑한’ 여성이 왕비이자 대군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이후 그녀가 정국의 주요 변수가 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3 중종 중·후반기 척신정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대의 폐정을 혁신하고자 연산군대 사화로 밀려난 신진 사림세력들을 다시 불러들여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도학정치를 추진하였다. 10여 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친 후 1515년(중종 10) 중종은 드디어 조광조 이하 신진 사림세력들을 본격적으로 등용하여 이른 바 ‘지치주의’로 표방되는 성리학적 개혁정치를 시작하였다.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입어 기묘사림의 개혁정치는 빠르게 진전되었으나 점차 개혁의 방향이 중종과 기성의 훈구세력들의 입지점과 부딪히는 현상이 생겨나게 되었다. 결국 개혁정치에 대한 중종과 훈구세력의 불만은 1519년(중종 14) 반정공신 위훈삭제사건(反正功臣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폭발하게 된다. 중종은 기묘사화를 일으켜 신진 사림세력을 제거하고 재차 훈구세력을 등용, 보수적인 정국 운영 방식으로 선회하였다. 곧 중종은 애초 신진 사림세력의 새로운 사상적, 정치적 경향에 적극 호응하였지만 이것이 국왕권의 강화와 배치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자 이를 바로 물리쳤던 것이다.

기묘사화 이후 정국은 훈구세력에게로 넘어갔다. 사림세력은 도학정치를 표방, 정국운영의 이념과 원칙이 상대적으로 분명하였지만 다시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 훈구세력의 경우 이러한 부분에서 상대적인 취약성을 지녔고 따라서 기묘사화 이후 훈구세력 내의 정권쟁탈전이 극심해져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다. 특히 중종후반기로 가면서는 훈구세력 내에서 척신세력이 등장하여 정치를 농단하게 되었는데, 이는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 소생인 세자(후의 인종)와 제2계비 문정왕후의 소생인 경원대군의 왕위 계승 경쟁을 둘러싸고 양측의 척신세력이 쟁투하였던 때문이다.

문정왕후는 어머니를 잃은 세자를 양육하고 보호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자신의 소생인 경원대군을 낳은 후에는 세자가 아닌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자 고심하게 되었고 이러한 야망을 이루기 위해 동생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을 위시하여 자신의 친인척을 동원, 세자의 입지를 약화시켜나갔다. 세자의 외숙 윤임세력은 이를 극력 경계하였고 이에 양세력간의 긴장은 날이 갈수록 고조되었다. 기묘사화후 정국 운영에서 국왕권이 정점에 놓이게 된 결과 차기 왕위 계승자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척신정치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그 중심부에 문정왕후가 자리하게 된 것이다.

4 대·소윤의 대립

세자를 둘러싼 윤임계와 경원대군·문정왕후를 둘러싼 윤원로·윤원형계의 척신간 대립은 대·소윤의 대립으로 불리었다. 곧 이들은 모두 파평 윤씨 일문으로 윤임세력은 대윤(大尹) 세력, 문정왕후 세력은 소윤(小尹) 세력으로 불린 것이다. 물론 대·소윤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거론되는 것은 중종이 사망하기 직전인 1543년(중종 38년)이다. 당시의 “(대사간 구수담具壽聃이 이르기를) 풍문에 의하면 간사한 의논이 비등하여 윤임을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을 소윤이라 하는데 각각 당여를 세웠다고 합니다.”는 기록이 그것인데, 실상 사세로 미루어보면 대·소윤의 갈등은 경원대군이 성장해가면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실록에 “(윤원로는) 대군이 장성하게 되자 세자의 자리를 바꾸려는 마음을 갖고서 동궁이 후사가 없음을 빙자하여 날로 더욱 대내에 은밀히 사주하여 끈질긴 참소와 통절한 호소가 마치 불꽃처럼 치열해지자 상의 의혹도 이미 심하게 되었다. 대윤·소윤의 설이 도하(都下)에 파다했는데, 이는 진실로 일조일석에 생긴 일이 아니었다”는 기록은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이즈음 윤임계와 윤원로·윤원형계의 척신간 대립 국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으니 바로 권신 김안로(金安老)이다. 김안로는 중종의 맏딸이자 세자의 누나인 효혜공주와 결혼한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의 아버지이다. 김안로는 세자의 보호를 내세웠고 중종이 여기에 적극 호응하면서 세력을 얻어 정권을 농단하게 된다. 여기에 윤임세력이 관련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김안로는 세자의 보호를 자처하면서 수년간 최고의 권신으로서 정권을 농단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경원대군·문정왕후를 둘러싼 윤원로·윤원형 등 소윤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1537년(중종 32) 무렵 김안로는 급기야 자신을 견제해오던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게 되는데 문정왕후는 오히려 이를 역이용, 김안로를 제거하게 된다.

당시의 정국에 대해서 『부계기문(涪溪記聞)』이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안로가 권세를 마음대로 전단하여 여러 번 큰 옥사를 일으켜 왕실의 지친과 공경 대신들까지도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이 계속되었으며 심지어는 국모(문정왕후)를 폐하고자 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참판 윤안인(尹安仁)은 문정왕후의 당숙인데 몰래 김안로를 내쫓을 것을 도모하여 비밀리 왕비에게 아뢰기를 ‘안로가 모의하여 왕비께 해를 끼치려 합니다’고 했다. 왕비가 크게 두려워하여 임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우니 임금이 까닭을 물었다. 이에 왕비가 대답하기를 ‘오랫동안 좌우에 모시고 있었는데 이제 폐함을 당하게 되니 슬퍼집니다’ 하였다. 임금이 크게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왕비가 김안로의 계교를 고하니 임금이 크게 노해서 즉시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그 권세가 큰 것을 두려워하여 윤안인에게 밀지를 내려 도모하라고 하였다.”

또 실록에 “정유년에 왕비의 친족인 윤안인·윤원로가 김안로를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김안로에게 미움을 받았고 위에서도 김안로가 나쁜 줄 알았으나 누르기 어려웠다. 마침내 윤임이 대사헌 양연에게 말해 논핵·주벌하였다”는 기록은 대윤계와 연결된 김안로일파가 문정왕후와 소윤계에 의해 제거되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김안로일파가 제거된 이후에도 세자와 경원대군을 둘러싼 대·소윤간의 정쟁 구도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다만 정쟁의 축은 김안로세력 대(對) 윤원로·윤원형 세력이 아니라 윤임세력 대 윤원로·윤원형 세력이 되었다. 이즈음 “중종 말년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사자(嗣子)가 없음을 보고 (윤원형이) 형 윤원로와 함께 서로 어울려 헛소문을 만들어 동궁의 마음을 동요시켰으며 문정왕후가 안에서 그 의논을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대윤이니 소윤이니 하는 말이 있게 되어 중종이 이 걱정으로 승하하였다.”는 기록은 중종 말년 대·소윤의 대립이 더욱 심해졌으나 중종이 이를 통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와중에 고민하다가 사망하였음을 보여 준다.

5 인종의 즉위와 사림세력의 재등장

1544년(중종 39) 중종이 사망하자 왕위는 자연스럽게 세자인 인종에게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는 대·소윤간의 대립에서 대윤이 승리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종은 동궁 시절부터 효심이 깊어 문정왕후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자 항상 노력하였던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우 온화한 성품이었다. 성리학에도 뛰어난 조예를 보였으며 김인후(金麟厚), 유관(柳灌),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 인사들을 매우 신임하였다. 이러한 세자 주변에는 기묘사화 이후 약세를 면치못하던 사림세력들이 대거 결집되었고, 자연스럽게 사림정치에 대한 새로운 기대가 생겨나게 되었다. “(동궁이) 날마다 유신들과 더불어 옛글을 강론하기를 주야로 게을리하지 않으니, 당대 선비들이 자기 집에서 몸을 닦아 훗날 등용되어 어진 임금께서 쓰일 희망을 가지고 간절히 기다리니 유풍이 크게 떨쳐서 사람들이 ‘요순이 될 소년 임금’이라 일컬었다”는 기록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실제로 인종은 즉위후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을 통해 사림들을 널리 등용, 사림들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그러나 사림들의 이러한 여망을 뒤로 하고 인종은 즉위후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더니 재위 9개월도 채 못되는 시점인 1545년(인종 원년) 7월 사망하고 말았다. 더구나 그에게는 소생도 없었기에 인종을 지지하던 대윤은 순식간에 세력 기반을 상실하고 말았다.

6 명종의 즉위와 을사사화

1545년(인종 원년) 7월 인종이 사망하자 그의 이복동생이자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이 불과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문정왕후와 소윤계 척신세력의 오랜 소원이 이루어지게 된 것인데, 더군다나 신왕이 너무 어려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정치를 행하게 되자 권력은 문정왕후와 소윤계 세력으로 급격히 옮겨가게 되었다. 윤원로가 윤원형과의 세력다툼으로 밀려나 사사된 이후 소윤계는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鄭蘭貞)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명종의 즉위와 함께 시작된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의 세도는 명종 20년 문정왕후의 사망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수렴정치가 시작되자마자 오랜 정적인 대윤파 제거에 나서게 된다. 윤원형은 대윤계의 영수인 윤임, 또 윤임 일파인 영의정 유관·유인숙과 그 주변에 포진된 사림을 제거하기 위해 평소 이들에게 원한을 가진 정순붕(鄭順朋),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 허자(許磁), 최보한(崔輔漢) 등을 심복으로 삼아 계책을 꾸며 대윤 일파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역모죄에 몰린 대윤계는 하루아침에 몰락하게 되어 윤임·유관·유인숙이 사사되며 더 나아가 이들과 연결된 사림 인사들도 대거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이것이 곧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윤임 등이 급작스럽게 역모죄로 얽혀든 을사사화의 정황에 대해서는 선조대 이황의 “을사사건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이 인종을 위하여 충성과 의분을 쌓았는데 사태가 별안간 크게 변하여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의 왕위 계승이 결정되자 충신이 도리어 간사하다는 의심을 받게 되고 간사한 자가 올바른 것처럼 되었다. 이에 간사한 자들이 이런 추세를 타고 원수를 갚으려고 크게 무함하여 마침내 반역이라는 죄명을 입혔다. 이를 ‘죄없는 사람도 함께 도륙당했다’고 한 것이다. 윤임 사건은 당시에 실제로 있었다 해서 큰 죄를 가하였지만 여론은 그것이 꼭 실제로 있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퇴계집』)”는 언급을 통해 그 대체적인 사정을 짐작해보게 된다.

을사사화가 일자 문정왕후의 수렴정치와 이기 등의 농간을 비난하는 여론이 일었고 정국내 이러한 이상 기류는 이듬해인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곧 경기도 과천 양재역에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단하니 나라의 멸망을 서서 기다릴 만하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라는 내용의 익명으로 된 벽서가 나붙었다. 문정왕후나 윤원형·이기 등은 그 문서의 진위를 따지거나 작성자를 색출하는 대신 이 모든 사태는 오로지 이전의 역적을 엄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옥사를 일으켰다.

문정왕후의 수렴정치와 이기 등의 농간을 비난하는 여론에 대해 소윤계는 오히려 이를 역이용, 재차 대윤계 및 대윤계와 연결된 사림세력들을 토색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윤임의 인척인 송인수(宋麟壽)·이약빙(李若氷)이 사사되고 권벌(權撥)·이언적·정자(鄭滋)·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백인걸(白仁傑) 등 대윤계 사림인사 20여 명이 유배되었으며 이들 외에도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희생된 사림계 인물들이 많아 이는 정미사화(丁未士禍)로도 불리었다.

7 명종대 문정왕후의 수렴정치와 숭불

이처럼 문정왕후의 비호하에 윤원형은 각종 권모술수를 동원, 대윤계 및 대윤계와 연결된 사림들을 처단하였는데 을사사화 이래 5~6년간 대략 100여명 정도가 처단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문정왕후와 소윤계의 정치적 위상은 확고부동해졌다.

1553년(명종 8) 명종이 친정을 하게 되자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제어하기 위해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의 아버지인 심강(沈鋼)의 처남인 이량(李樑)을 이조판서로 등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명종의 의도와 달리 이량 또한 척신으로서 세도를 부리면서 사림파 윤근수(尹根壽), 이문형(李文馨), 윤두수(尹斗壽) 등을 외직으로 추방하고 재차 사화를 꾸미는 등 척신정치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문정왕후는 수렴정치를 그만둔 후에도 1565년(명종 20) 사망하기 이전까지 명종의 배후에서 끝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명종은 친정을 하게 되었지만 문정왕후의 제재를 받아 자유롭지 못했다. 윤원형은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문정왕후와 내통해 명종을 위협하고 제재하니 주상의 걱정과 분노가 말과 얼굴에 나타나게 되었다. 내관 중에 그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윤원형은 궁인을 후하게 대접해 그들의 환심을 샀기 때문에 주상의 모든 행동을 알 수 있었다. 하루는 주상이 내관에게 ‘외척이 큰 죄가 있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라고 했는데 윤원형을 가리킨 것으로 이 말이 누설되어 문정왕후에게 들어갔다. 왕후가 ‘나와 윤원형이 아니었으면 주상께서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크게 꾸짖으니 주상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든 군국의 정사가 대부분 윤원형에게서 나오니 주상은 마음속으로 그를 매우 미워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문정왕후 및 윤원형 세력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임금이 장성하여 대비가 비로소 환정(還政)하였다. 따라서 마음대로 권력을 부리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국문으로 조목을 나열하여 중관을 시켜서 보냈다. 임금이 보고는 행할 만한 것은 하고 행하지 못할 것은 얼굴에 수심을 나타내며 쪽지를 말아서 소매 속에 넣었다. 이로써 매양 문정왕후에게 거슬렸으므로 왕후는 불시에 임금을 불러들여 ‘무엇 무엇은 어째서 행하지 않느냐’고 따지면 임금은 온순한 태도로 그 합당성 여부를 진술하였다. 문정왕후는 버럭 화를 내어 ‘네가 임금이 된 것은 모두 우리 오라버니와 나의 힘이다’고 하였다. 어떤 때는 때리기까지 하여 임금의 얼굴에 기운이 없어지고 눈물 자국까지 보일 적이 있었다.”는 기록은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명종대 문정왕후의 권력이 이처럼 막강하였기에 문정왕후가 주도하는 숭불정책이 어떠한 걸림돌도 없이 추진될 수 있었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 하였기에 선초 이래 국왕이나 왕실 여성들 중에서 개인 차원에서 숭불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를 국가 정책 차원으로까지는 공식화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개인 차원의 숭불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국가정책 차원으로 공식화시켰다.

문정왕후의 숭불정책의 중심에는 보우(普雨)가 자리하고 있었다. 문정왕후는 강원감사 정만종(鄭萬鍾)의 추천을 통해 보우를 소개받은 후 보우를 매우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보우를 봉은사[서울](奉恩寺) 주지로 임명한 후 본격적으로 불교를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유신들의 반대에도 아랑곳않고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선·교 양종에서 각각 30명의 승려를 선발하였으며 전국에 300여개 사찰을 공인하였다. 이러한 숭불정책으로 인해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려 휴정[서산대사](休靜(西山大師)), 유정[사명대사](惟正(四溟大師)) 등이 발탁되는 등 조선의 불교는 일시적인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조정의 유신들은 물론 전국의 사림들이 문정왕후의 때아닌 숭불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하였으나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8 문정왕후의 죽음과 척신정치의 종결

명종 즉위후 20년간 계속된 문정왕후의 절대 권력은 1565년(명종 20) 그녀의 죽음으로 드디어 끝을 보게 된다. 이즈음 문정왕후는 보우와 함께 양주의 고찰 회암사(檜巖寺) 중창에 열성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낙성식 및 무차대회를 눈앞에 두고서 숨을 거두었다.

평소 문정왕후의 기세에 눌려 아무런 비판도 하지 못하던 조신들은 그녀가 죽자마자 빗발치듯 그녀의 잘못을 논박하기 시작하였고 무력한 명종은 이러한 여론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먼저 보우를 요승으로 규탄하는 상소가 쏟아져 나와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다. 또한 양종의 선과가 혁파되는 등 문정왕후의 숭불정책은 한결같이 폐기되었고 이전의 억불정책으로 돌아갔다.

문정왕후 뒤에서 권력을 휘둘렀던 윤원형과 정난정도 곧바로 정국에서 몰려나 시골에 내려가 있다가 분울함 속에서 사망하였다.

문정왕후 또한 그녀가 죽자 실록 사평에서 ‘사직의 죄인’이자 ‘집안을 망하게한 암탉’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스스로 명종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비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 『서경』목서(牧誓)에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 하였으니 윤씨를 이르는 말이라 하겠다.”

이처럼 문정왕후는 중종대 중·후반부터 명종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척신정치의 중심부에 자리하면서 권력을 좌지우지하였고 을사사화나 정미사화와 같은 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세력들을 제거하였으며 국가이념인 성리학이념과 배치되는 숭불정책을 추진하였다. 곧 문정왕후는 중종~명종대 척신정치를 상징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척신정치의 상징 문정왕후의 사망과 함께 척신정치가 쇠퇴하고 사림들의 정국 진출이 활발해져 사림정치가 다시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9 문정왕후릉(태릉) 조성 과정에 나타난 척신정치의 그림자

애초 문정왕후는 죽은 남편인 중종의 옆에 묻히기 위해 중종릉을 이장까지 해가면서 그 옆에 자신의 능지를 조성하였다. 곧 중종 사후 중종릉은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릉인 희릉(禧陵)의 동원(同原)에 조성되어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태를 이루었다.(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소재) 그러나 문정왕후는 명종대 수렴정치로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자신의 사후 중종과 함께 묻히기 위해 보우를 통해 중종릉의 풍수가 불길하다는 논의를 제기하였고, 급기야 중종릉을 희릉에서 분리해 자신의 세력권인 봉은사 옆인 현재의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소재의 정릉(靖陵) 자리로 이장하였다.

새로운 정릉 자리는 지대가 낮아서 거액을 들여 흙을 쌓아 지대를 높였으나 매년 여름이면 강물이 능의 앞까지 들어오고 재실마저도 침수가 되어 다시 능을 옮기자는 논의까지 이는 등 많은 논란을 야기하였다. 문정왕후는 이렇게 새롭게 정릉을 조성한 후 그 옆에 자신이 묻힐 자리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낮은 지대로 인한 침수의 문제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문정왕후가 죽게 되자 명종은 ‘서울 북쪽에 태산(泰山)을 봉하면 나라가 안정될 것이다’는 지관의 의견에 따라 문정왕후릉을 지금의 서울 공릉동 지역에 조성하였으니 태릉(泰陵)이다. 조선왕실의 관행으로 보아 왕비의 능을 태산에 비유한다든가 능호에 ‘태(泰)’ 자를 사용하는 등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로 명종대 정국에서 문정왕후의 절대적 위상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러한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정릉은 결국 단릉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 명종의 사망 이후 명종릉은 태릉 옆에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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