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박문수

박문수[朴文秀]

유능한 경세관료, 영조의 어진 정치를 돕다

1691년(숙종 17) ~ 1756년(영조 32)

박문수 대표 이미지

박문수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영조 탕평정치의 핵심관료로의 삶, 그리고 암행어사의 이미지

박문수(朴文秀)는 영조(英祖) 탕평정치의 핵심관료로 활약한 인물이다. 영조가 왕세제(王世弟)로 있던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박문수는 때로 지나친 면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그는 평생 영조의 정치를 강직한 성품으로 보필하였다. 이러한 성품과 실무관료로 보여준 능력 때문인지, 실제 암행어사로서 활약이 그다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사 행적과 관련된 수많은 설화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2 암행어사 박문수

박문수. 그 이름만 들었을 때에는 무언가 허전한 듯하다. 이름 앞에 한 단어만 덧붙이면 매우 자연스럽고 친숙한 이름이 된다. 암행어사 박문수. ‘암행어사 박문수’라는 드라마가 만들어질 정도로 우리의 뇌리 속에 박문수는 암행어사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암행어사 박문수의 활약은 여러 구전설화 및 야담에서 상당수 발견된다.

그러나 박문수는 실제로 지방에 어사로 파견된 것이 네 차례에 불과하며, 그 중에서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암행어사는 어떠한 존재였으며, 박문수는 왜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일까?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암행어사란 방방곡곡을 누비며 궁벽한 곳에 있는 백성들의 원억을 풀어주는 존재였다. 특히 사회적 병폐가 점차 심각해지던 조선 후기에 암행어사의 파견이 활발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암행어사의 활약상 또한 눈에 띄게 늘어났다. 비록 암행어사의 이미지가 실제 활약 및 권한과는 어긋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오히려 이 어긋남이 조선 후기 이후로 백성들이 암행어사에게 기대했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백성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잘 풀어주려는 노력, 이 노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개인적 능력이 바로 백성들이 암행어사에게 기대한 것이었다. 박문수의 어사 활동에 관한 일화를 살펴보자.

암행어사로 나아간 박문수는 전라도 어느 산속에서 유안거라는 사람과 그 아들을 만났다. 유안거 부자는 이웃에 살던 천씨 부자에 의해 누명을 쓰고 도망 온 것이었다. 심지어 천씨 부자는 유안거의 아내와 며느리를 빼앗아 합동 혼례를 올리려 하고 있었다. 박문수는 이를 듣고 광대들과 함께 옥황상제의 명을 받은 하늘의 신장(神將)처럼 행세하면서, 천씨 부자를 잡아 처단하였다. 10년 후에 가보니, 유씨 가문은 하늘이 돕는 집이라고 소문나 이웃들과 잘 지내고 있었다.

암행어사가 어찌 관아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하늘의 신장처럼 거짓 행세하며 천씨 부자를 처단하였을까? 그러나 사정을 잘 알고 보면 이 일화 속 박문수의 결정은 실로 탄복할 만하다. 유안거 부자가 살던 곳은 대대로 구씨 가문과 천씨 가문이 세거하여 왔던 곳이기에 지명도 두 가문의 성을 따서 구천동이라 한 곳이었다. 애초에 누명을 쓰게 된 것도 유씨 가문이 외지에서 들어온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박문수가 관아의 힘을 빌려 법대로만 처리하였더라면 구씨 가문과 천씨 가문은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았을 것이고, 박문수가 떠난 뒤 언제든지 같은 일이 재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박문수는 하늘의 힘을 가장하여 다른 가문이 유씨 집안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이 일화에서, 당시 조선 사람들이 암행어사에게 바랐던 이미지를 잘 알 수 있다. 백성들의 원통함과 그 근원을 잘 이해해주는 능력, 원통함을 해결해주기 위한 의지, 그리고 절차에 구애받지 않는 융통성 등이었다. 그렇다면 암행어사 박문수가 아닌 실제 역사 속의 박문수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박문수는 실제로 어떠한 인물이었기에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일까?

3 신진 소론, 왕세제의 교육을 맡다

박문수는 1691년(숙종 17) 9월 8일 외가인 경기도 진위현에서 박항한(朴恒漢)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이다. 부친 박항한은 박문수가 여덟 살 되던 해에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조부 박선(朴銑)과 백부 박태한(朴泰漢)은 이미 두 해 전에 세상을 떠나, 친가 쪽 어른이 없던 박문수는 자연스레 외가 쪽에 의지해 자라게 되었다.

박문수의 외조부 이세필(李世弼)은 당대의 명문 경주 이씨로, 조선 중기의 명신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이었다. 본인은 붕당 간의 정쟁으로 인해 중앙 정계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으나, 형조참판 등의 벼슬이 꾸준히 제수될 정도로 실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 아들이자 박문수의 외숙 이태좌(李台佐)는 소론의 중심인물로 벼슬이 정승에까지 이르렀다. 이태좌의 아들 이종성(李宗城) 또한 영의정에까지 이르는 등, 박문수의 외가는 대표적인 소론의 명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태좌의 집에서 이종성과 함께 글을 배운 박문수 또한 그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박문수는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 16위로 급제하며 정계에 입문하였다. 당시 정국은 신임사화 이후 소론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시험이 수차례 치러지며 소론계 인물들이 정계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소론 명문가의 외손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았을 때 정계에 입문하여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정5품의 병조정랑에까지 올랐으니, 박문수의 정치 노선 또한 전반적으로는 소론으로 기울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관직 생활 초반기인 이 때 박문수는 당시 왕세제 연잉군(후일의 영조)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집권한 소론과 연잉군은 서로 긴장 관계에 있었다. 소론은 경종이 세자였던 시절부터 경종을 지지하였고, 그에 비해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였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자 노론은 지속적으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봉하고 대리청정을 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나, 소론 강경파가 이를 역모라 비판하여 노론이 실각하고 소론이 집권하게 되었다. 성격이 온유한 경종만이 동생 연잉군을 보호하려 하였으나, 정치적 지지기반이 없는 연잉군은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이러한 때에 소론계 박문수가 세제시강원(世弟侍講院)의 관원으로 임명되어 왕세제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를 계기로 영조가 가장 총애했던 신하로 성장하게 된다.

4 탕평 정치 하의 실무 관료

박문수는 영조 즉위 후 노론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잠시 정계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러던 그는 1727년(영조 3) 영남과 호남에 흉년이 들자 영남별견어사(嶺南別遣御使)로 임명되어 이듬해까지 활동하게 된다. 어사 활동 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승진하기도 하였으니, 비록 암행어사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활동하였다고는 해도 박문수의 첫 어사 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었던 듯 보인다.

이듬해에는 영조 재위 초반 가장 큰 위기였던 이인좌의 난이 벌어졌다. 3월 15일 소론 강경파의 공모 하에 이인좌(李麟佐)가 청주성을 함락시키며 시작된 난은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등지에서도 호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박문수가 어사로 파견되었던 영남에서도 정희량(鄭希亮)이 중심이 되어 난에 호응하였다. 박문수는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의 종사관으로서 토벌군에 합세하여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박문수는 영남 지역의 민심을 진정시키는 안무사(按撫使)로 파견되었다가 현지에서 곧바로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는 상당히 특례적인 조치였던 만큼, 박문수가 영남 지역의 민심을 진정시키고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는 이인좌의 난에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공신으로 책봉되었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이후 박문수는 예조, 병조, 호조, 형조 등의 판서를 고루 지냈으며, 외직에서도 경상도, 평안도, 함경도, 경기도 등의 관찰사를 지냈다. 특히 그는 재정과 군정에 있어서 특출난 공로를 세웠다. 호조판서로 있을 때에는 국가 재정 전반을 살펴보고 정비하여 「탁지정례(度支定例)」를 편찬하였다. 또한 균역법과 주전(鑄錢) 논의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당시의 재정 전반을 개혁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군정 개혁에도 힘을 써 1754년(영조 30)에는 금군을 금위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등 금군 개편을 주도하였다. 호조와 병조의 문제, 즉 재정과 군정 개혁은 당시에도 박문수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인정받았다. 여기에서 박문수의 뛰어난 실무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박문수는 백성들을 위한 진휼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내놓는 진휼책은 상당히 파격적인 것들이었다. 1731년(영조 7)에는 호서 지방에 대한 구휼책을 논의하던 중, 영조는 박문수에게 비변사에서 구휼책을 논하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박문수의 대답은 평소 박문수의 파격적인 성향을 잘 보여준다. “신의 말은 비변사(備邊司)에서 용납되지 않습니다.” 영조는 이에 대해 웃으면서 답하였다. “나도 경의 말을 용납할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경우이겠는가?”

박문수가 내놓는 대책은 항상 파격적인 것들이었기에, 비변사에서 같이 논의하던 다른 대신들은 그의 말을 용납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영조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파격적인 박문수의 구휼책이 결과적으로는 큰 성공을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영조는 알고 있었기에, 파격적임에도 불구하고 박문수에게 지속적으로 구휼책을 논하라고 지시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날 박문수가 비변사에서 논의하여 영조에게 주청한 구휼책도 실로 파격적이었다. 관서(關西)와 해서(海西)의 감영에 저축된 돈 3만 8천 꿰미와 면포(綿布) 1천 4백 동(同)을 삼남(三南)으로 옮겨 곡식을 무역(貿易)하여 진자(賑資)를 마련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던 것이다. 북쪽 감영의 물자를 삼남까지 옮기는 실로 거대한 구상이었다. 절차에 구애받지 않는 파격적인 융통성과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의지가 박문수에게는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박문수는 또한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 언론을 담당하는 대신(臺臣)들에게도 바른 소리를 거리끼지 않았다. 1732년(영조 8)에는 대신(臺臣)들에게 노예라고 비판하여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대신(臺臣)들 중에서 침묵만을 지키고 있는 자들을 ‘당로자(當路者)를 아첨해 섬기는 데에는 노예와 같다’고 표현하여 공격받은 여러 대신(臺臣)들이 사직 상소를 올렸고, 이에 말이 너무 심하다며 박문수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박문수 스스로도 본의 아니게 실언한 것은 인정할 정도였으니, 잘못된 것을 비판할 때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박문수가 실언하였다고 아뢴 상소에 대해서도 영조가 부드러운 면이 부족하다며 사기(辭氣)를 허비하는 것이 박문수의 병통이라 평하였다는 사실은 박문수의 강직한 평소성격을 잘 보여준다.

1756년(영조 32) 4월 24일, 박문수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서로 마음을 알아주던 사이였던 친우이자 충신을 잃은 것을 매우 슬퍼하였다. 실제 역사에서 박문수는 영조가 가장 아꼈던 신하들 중 하나로, 영조의 탕평 정치를 실무 능력과 강직한 성품으로 보필한 인물이었다.

박문수는 백성들의 고통과 그 근본적인 원인을 이해해주고 해결해주려는 의지, 절차에 구애받지 않는 파격적인 조처, 뛰어난 실무 능력, 강직한 성품 등 백성들이 암행어사에게 기대하는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박문수가 실제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