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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朴世堂]

관료 출신의 시골 늙은이, 노론에 맞서다

1629년(인조 7) ~ 1703년(숙종 29)

박세당 대표 이미지

박세당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자유로운 학문 기풍으로 배척받은 강직한 학자

박세당(朴世堂)은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특히 그는 자유로운 학풍을 추구하여 당시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던 주자(朱子)에게서 벗어난 주장을 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흔히 박세당은 저서 『사변록(思辨錄)』의 내용으로 인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그는 40세 이후로 정계에서 거의 은퇴한 상태로 수락산 자락에 은거하면서도, 당시 붕당 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노론을 상대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강직한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정치적 대립은 그의 학문까지도 비판받는 큰 요인이 되었다. 결국 그는 늙은 나이에 성인을 모욕한 죄인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이후 복권되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까지 내려졌다.

2 오랑캐에게 무릎 꿇은 조선, 그리고 내부의 대립

박세당의 일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살다간 17세기 조선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시기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전쟁의 결과 조선의 국왕이 오랑캐 청(淸)의 황제에게 치욕적인 예를 행하며 무릎을 꿇었다. 이는 임진왜란 등으로 촉발되어 청의 중국 본토 점령으로 이어진 동아시아의 사회변동 과정의 하나였지만,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던 문명국가 조선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준 사건이기도 하였다.

오랑캐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평소 중화 문명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던 주자의 학문에 더욱 빠져들었다. 이는 조선이 중화 문명을 이어받았다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로 이어지면서 조선의 사상적, 문화적 발전을 촉진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주자학으로 경도되면서 사상적 분위기가 지나치게 경색되었다는 평가가 있기도 하다.

또한 17세기는 조선 후기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폐단이 심화되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조선 후기 상호 균형과 견제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붕당정치가 발전하였으나, 점차 이 원리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흔히 당쟁(黨爭)이라 묘사되는 폐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숙종(肅宗) 대의 여러 번의 환국(換局)을 거치면서 주요 인물들이 사사(賜死)당하는 등, 붕당 간의 정쟁이 점점 과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박세당은 바로 이 시기 조선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인 중화와 붕당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인물 중 하나이다.

3 순탄치 못한 어린 시절

박세당의 가문 반남 박씨(潘南 朴氏) 집안은 조선 후기 유명한 벌열가문 중 하나이다. 박세당의 직계선조들은 하나같이 두각을 드러낸 인물들이었다. 박세당의 조부 박동선(朴東善)은 벼슬이 정2품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으며 사람됨이 순후하고 근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친 박정(朴炡)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되고 금주군(錦洲君)에 봉해진 바 있으며,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이조참판(吏曹參判)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비록 사람됨이 도량이 적었다는 평가를 받기는 하였으나, 이는 지나치게 강직한 그의 성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요직을 역임하였던 박정은 이러한 성격 탓인지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임명되어 중앙정계에서 지방으로 쫓겨나기도 하였다. 남원은 특히 다스리기 어렵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그러나 박정은 이곳에서도 공을 세웠다. 당시 남원은 살인계(殺人契)가 크게 행패를 부릴 정도로 인심이 박한 지방이었다. 박정은 과감하게 적도들을 급습하여 이들을 일망타진하였다. 하지만 남은 잔당의 공격으로 다리에 칼을 맞고 교체되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다. 박세당이 보여준 강직한 성격은 부친에게서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부친과 그다지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박세당은 부친 박정이 남원부사로 재직하고 있던 음력 1629년(인조 7) 8월 19일 남원부 관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부친 박정은 막내아들 박세당이 한참 재롱을 부릴 나이인 4살에 불과했던 1632년 이른 나이로 별세하였다. 집안의 흉사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1635년(인조 13)에는 큰형 박세규(朴世圭)가 요절하였다. 이듬해인 1636년에는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두 형을 따라 조모와 모친을 모시고 원주, 청풍, 안동 등으로 피난살이를 가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세당이 다른 좋은 가문의 아이들처럼 어린 나이부터 학업에 매진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부친을 여읜데다 가난하여 제때 배우지 못하다가 10여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둘째형 박세견(朴世堅)에게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1640년에는 그를 매우 사랑하고 아껴주던 조부 박동선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박세당이 본격적으로 학문의 길에 들어선 것은 그의 나이 14세 때에 이르러서였다. 고모부 정사무(鄭思武)에게서 수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상당히 늦은 나이에 수학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는 그리 많은 책들을 섭렵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문리(文理)도 채 트이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역시 후대의 큰 학자가 될 인물은 그릇이 달랐던 것인지, 그는 이따금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꿰뚫어보아 장로들이 경이롭게 여겼다고 한다.

4 소론으로서의 행보

박세당은 17세인 1645년(인조 23) 당시 금성현령(金城縣令)이던 남일성(南一星)의 딸과 결혼하였다. 여전히 그는 가난한 처지로 이후 10여년을 처가살이해야 했지만, 이 결혼은 그의 인생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남일성의 첫째아들은 바로 송준길(宋浚吉)의 제자로서 이후 소론(少論)의 영수로 활약하게 되는 남구만(南九萬)이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그는 혼인관계를 통해 소론계 가문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박세당의 셋째형 박세후(朴世垕)는 윤선거(尹宣擧)의 사위가 되었는데, 윤선거의 아들 윤증(尹拯)은 아버지 윤선거의 행적 문제를 두고 스승인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게 되는 소론의 거두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본인의 성향과 함께 주위 가문들과의 교유 속에서 소론으로서의 정체성을 키워나간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박세당은 1660년(현종 1) 32세의 나이로 장원급제하면서 화려하게 정계로 입문하였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서 과거에 급제한 것도 늦었지만, 결국에는 장원이라는 쾌거를 거둔 것이었다. 그는 예조좌랑(禮曹佐郞)‧병조좌랑(兵曹佐郞)‧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물론 혼인 및 교유관계로 인해 소론가문들과 가깝게 지내기는 하였지만, 박세당이 정계에서 소론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현종 대의 공의(公義)·사의(私義) 논쟁이었다. 1664년(현종 5) 청에서 사신이 오게 되었는데, 당시 홍문관에 재직 중이던 김만균(金萬均)이 청나라 사신을 피하고자 면직을 청했던 것이다. 김만균의 조모가 호란으로 인해 강화도에서 순절하였으니, 원수인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일에 국왕을 배종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러자 당시 승지였던 서필원(徐必遠)이 부모와 같이 가까운 경우도 아닌데 사정(私情)을 앞세워 면직을 청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김만균을 비판하였다. 한편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이 의리를 중시한 김만균을 옹호하기 시작하면서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박세당은 서필원을 옹호하고 김만균을 비판하였다. 호란(胡亂)으로 인해 국가가 더없는 치욕을 겪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종묘사직을 위해 국왕조차도 원통함을 간직한 채로 청의 사신을 접대하는데, 일개 신하가 국왕만을 욕된 자리로 내몰고 자신만 청의(淸議)를 앞세울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의 논쟁이 바로 노론과 소론이 갈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송시열과 대립하였던 사실은 이후 소론으로 활동하며 노론과 맞서게 되는 박세당의 입지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대립하였던 송시열마저도 박세당의 학문적 성취에 감탄하였던 일도 있었다. 1667년(현종 8) 세자인 숙종에게 『소학(小學)』을 강의하고자 하였는데, 『소학언해(小學諺解)』가 난잡하고 잘못된 것이 많다고 하여 현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잘못을 바로잡으라고 명령한 적이 있었다. 다른 신하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박세당이 나서 기존 언해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서 올렸다. 이는 최종적으로 송시열과 송준길이 검토하였는데, 송시열은 박세당의 지적에 매우 감탄하면서 한두 조목만 제외하고는 대부분 박세당의 견해를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많은 이들은 박세당이 이전 학자들의 견해를 너무 쉽게 바꾼다며 비판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이후 박세당의 학문이 받을 배척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5 낙향과 『사변록』, ‘사문난적’

1668년(현종 9) 한창 나이인 40세에 박세당은 벼슬살이를 뒤로 하고 양주 수락산 자락 석천동에 은거하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실천한 것으로, 박세당은 산자락 계곡에서 유유자적하며 농부나 야인들과 함께 밭일을 하면 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가 나라의 일로부터 마음을 완전히 멀리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유유자적한 삶을 추구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자유를 찾기 위함이었지 세속의 일로부터 초연한 채로 고고하게 살고자 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수차례 관직이 제수되었음에도 하나같이 나아가기를 거부한 박세당이었지만, 청으로 가는 사절단으로서의 역할만은 거부하지 못하였다. 새로운 문물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힘들었던 것일까. 여하튼 그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의 수도 북경을 다녀온 후 다시 석천으로 돌아가 은거하며, 내려지는 관직을 한사코 거절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박세당이 학문에 매진하면서 『논어(論語)』, 『중용(中庸)』 등 각 경전의 해석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작성한 것이 바로 『사변록』이다. 특히 그는 당시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칭송되고 있던 주자의 주석과도 다른 견해를 취하기도 하였다. 『사변록』은 작성 당시에는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박세당이 다시 중앙정계의 일에 의견을 제시하면서 『사변록』 또한 문제가 되었다.

박세당은 한동안 은거하며 중앙정계와 멀리하였지만, 그의 아들들인 박태유(朴泰維)와 박태보(朴泰輔)는 정계에서의 갈등으로 인해 아버지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첫째아들 박태유는 1686년(숙종 12) 숙종에게 간언하다가 고산찰방(高山察訪)으로 좌천되었는데, 몸이 약했던 그는 함경도 고산의 기후를 당해내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둘째아들 박태보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장원급제한 인재였지만, 붕당간의 대립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에 강력하게 반대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고 말았다. 그는 심한 고문을 받고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고문의 상처로 인해 유배지로 떠나기도 전에 노량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은거하던 박세당은 내려지는 벼슬을 연이어 마다하였다. 1698년(숙종 24)에는 70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며 순탄한 삶을 이어가는 듯했으나, 1702년 아들들에 이어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썼던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낸 후, 국왕 인조가 치욕적인 예를 올렸던 삼전도에 비석을 세워 자신들의 승리를 기리고자 하였다. 이는 국가의 치욕을 글로 써서 길이 남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비문을 지으려 하지 않았으나, 예문관제학이던 이경석이 나서서 비문을 지은 것이었다. 당시 이 사실은 아무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고 이경석 또한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추후 송시열이 삼전도 비문 찬술을 문제로 삼으며 이경석을 모욕한 일이 있었다.

이경석의 후손들이 비문의 찬술을 부탁하자 박세당은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으며, 비문에서 그는 송시열을 부엉이에 비유하며 비판하였다. 국가를 위해서 하는 수 없이 한 일을 쉽게 비판할 수는 없다는 것이 박세당의 생각이었다. 박세당의 강직한 성품은 송시열을 비판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에 송시열의 문인들이 크게 노하여 박세당을 처벌할 것을 숙종에게 청하였고, 송시열을 모욕한 것과 함께 비판의 근거로 삼은 것이 바로 『사변록』에서 보이는 박세당의 사상이었다. 박세당이 주자의 주석까지도 부정하여 사문(斯文)을 훼손하였다는 것이 바로 비판의 주된 근거였던 것이다.

국왕 숙종은 박세당의 글을 읽어보고 그의 혐의를 인정한 후 옥과(玉果)로 유배할 것을 명하였다. 숙종이 그의 죄를 가늠하고 있는 와중에도 박세당의 강직한 성품은 그대로 드러났다. 74세의 늙은 나이에 병까지 얻어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와중에서도,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가 국왕에게 올라갔다고 하자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와 동문 밖에서 죄를 기다린 것이었다. 병이 심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숙종이 유배형은 면해주었으나, 박세당은 결국 그 해 1702년 8월 21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박세당이 성인을 업신여기고 올바른 사람을 욕하였다는 죄목을 받기는 하였지만 윤휴(尹鑴)와 같이 직접적으로 ‘사문난적’이라 지칭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사후 숙종은 박세당의 죄를 사면시켜주었으며, 소론이 정권을 잡은 1722년(경종 2) 그에게는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비록 죄인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초야에서도 노론과 맞선 그의 강직한 성품은 후대에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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