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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朴堧]

아악을 집대성하다

1378년(우왕 4) ~ 1458년(세조 3)

박연 대표 이미지

박연

전통문화포털(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1 가족 관계와 어린 시절

박연(朴堧, 1378∼1458)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음악이론가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초명(初名)은 연(然), 자(字)는 탄부(坦夫), 호(號)는 난계(蘭溪)이다. 고려에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했던 박언인(朴彦仁)이 중시조이며, 할아버지 박시용(朴時庸)은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아버지 박천석(朴天錫)은 삼사좌윤(三司左尹)에 올랐다. 어머니는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김오(金珸)의 딸이었는데, 박연이 11세 때인 1388년(우왕 14)에 사망하였다. 박연의 부인은 여산 송씨(礪山宋氏)로 판서를 지낸 송빈(宋贇)의 딸이다. 박연은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박맹우(孟愚)와 둘째 아들 박중우(仲愚)는 각각 현령과 군수 등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막내아들 박계우(朴季愚)는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연루되어 1454년(단종 2) 사망하였다.

박연은 충청북도 영동(永同)에서 출생하여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시기에 박연은 여타의 유생들과 마찬가지로 영동 향교(鄕校)에서 유가(儒家) 경전(經傳)을 공부하면서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박연은 일찍부터 출중한 음악적 재능을 나타냈던 것으로 보이는데,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전한다.

박연이 영동 향교에서 수학하던 시절에 그의 이웃에 피리를 부는 사람이 있었는데, 박연은 공부하는 중에 틈틈이 그를 찾아가서 피리를 익혔다고 한다. 그 결과 박연의 피리 솜씨를 지역에서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하였고, 이웃의 피리 연주자도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면서 박연의 실력을 인정하였다. 이후 박연은 과거 응시를 위해 서울에 왔다가 장악원(掌樂院)의 악공(樂工)을 만났는데, 박연이 그 앞에서 피리를 연주하니 악공은 “음절이 속되어 절주에 맞지 않으며 습관이 이미 굳어져서 틀을 고치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박연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악공을 찾아와 수업을 받았고 불과 수일 만에 악공으로부터 “가르칠 만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수일 후에는 “규범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장차 대성하겠다.”는 평을 받았고, 또 수일 후에는 악공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치면서 “나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위의 일화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는지의 여부는 현재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것은 박연이 음악에 대한 천부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2 출사와 관직 활동

박연은 1405년(태종 5)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고, 6년 후인 1411년(태종 11)에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문과 급제 후 박연은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등을 역임하였다.

세종대에 들어 박연은 세종으로부터 음악적인 능력을 인정받았고, 그 결과 봉상판관(奉常判官)과 악학별좌(樂學別坐), 관습도감(慣習都監)의 제조(提調) 등으로 재직하면서 국가 음악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였다. 1431년(세종 13) 이후 박연은 대호군(大護軍)·상호군(上護軍) 등의 무반직에 임명되었으나, 실제로는 계속해서 국가 음악의 정비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1436년(세종 18) 1월에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같은 해 12월에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역임했으며, 1439년(세종 19) 이후에는 공조참의(1439년), 예조참의(1442년), 인순부윤(仁順府尹, 1444년)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1445년(세종 27)에는 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성절사(聖節使)로 사행을 다녀왔다.

사행 과정 중에 박연은 명나라 정부에서 준 부험(符驗)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일이 있었는데, 귀국 후에 이 문제가 불거져서 고신(告身)을 회수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1447년(세종 29) 1월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관직에 복귀한 박연은 이듬해(1448) 3월 죽은 누이의 상을 박하게 치렀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박연은 파직된 지 1년여 만인 1449년(세종 31) 5월 인수부윤으로 복직되었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임명되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이 일어난 후 이듬해 8월, 박연의 막내아들 박계우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김종서(金宗瑞)의 편에 서서 반역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이에 의금부에서는 박연도 연좌하여 처벌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박연은 고산(高山)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4년만인 1458년(세조 4) 유배에서 풀려 경외종편(京外從便)되었으며, 같은 해에 고향인 영동 고당리(高塘里)에서 8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471년(성종 2) 성종은 박연의 고신(告身)을 돌려주도록 하였고,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3 세종대의 음악 정비 활동

박연의 음악 정비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세종대이다. 이 시기 박연은 추진한 음악 정비의 내용은 악서(樂書) 찬집, 아악기(雅樂器) 제작, 아악(雅樂)에 관련된 각종 제도의 정비 등 크게 세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박연은 음악의 정비를 위해서는 먼저 정확한 악서(樂書)를 찬집하여 음악 이론을 정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그는 1425년(세종 7) 2월에 수본(手本)을 통해 문신 한 사람을 악학(樂學)에 추가하여 악서 찬집과 악기 및 악보법 연구 등을 담당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 이듬해(1426) 4월에도 그는 장문의 상소를 올려 당시 국가에서 주관하는 각종 제사 음악의 문제점을 지적한 다음, 이런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음악에 관한 역대의 고전들과 제도들을 연구하여 새로운 악서를 찬집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이상과 같은 박연의 음악 이론 연구 노력은 1430년(세종 12) 윤 12월에 아악보(雅樂譜)의 완성으로 1차적인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최종적인 악서 편찬은 박연 당대에는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가 수행한 연구와 노력들이 토대가 되어 성종대 성현의 『악학궤범(樂學軌範)』으로 완성되었다.

다음으로 악기 제작과 관련하여 박연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율관(律管)의 제정이었다. 율관은 음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 정확한 음을 내는 악기를 만들이 위해 반드시 먼저 확정되어야 했다. 이에 박연은 1425년(세종 7) 가을에 해주에서 생산된 거서(秬黍 : 검은 기장)의 알곡을 사용하여 황종관(黃鐘管)을 처음 만들었으나 소리가 중국의 황종보다 높았다. 박연은 그 원인을 알기 위해 많은 서적들을 연구했고, 그 결과 우리나라와 중국의 토지 차이로 인해 생산되는 기장의 크기가 다르고, 따라서 그 기장을 기준으로 만든 황종음의 높낮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박연은 밀납을 녹여 해주의 검은 기장과 모양은 같으면서 크기는 더 큰 낱알을 만든 다음 이것을 사용하여 황종관을 만들었는데, 그 음이 중국의 황종과 일치하였다. 이에 박연은 이 황종관을 기준으로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을 적용하여 12율관을 완성하였다.

율관이 완성되자 박연은 이를 바탕으로 아악기의 제작에 착수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편경(編磬)의 제작이다. 조선 초기의 아악은 악보와 악기 등 모든 면에서 매우 미비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 해주(海州)에서 검은 기장이 생산되고 이듬해(1426)에는 남양(南陽)에서 편경의 재료가 되는 경석(磬石)이 생산되자, 세종은 이를 계기로 조선의 아악을 일신할 뜻을 갖고 박연에게 편경의 제작을 명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편경이 있었지만 12음의 높낮이가 전혀 맞지 않아서 제대로 된 연주가 불가능했다. 이에 박연은 모양은 중국의 편경을 따르면서도 음은 자신이 제작한 12율관을 기준으로 삼아 새로운 편경을 제작하였다.

박연이 새로운 편경을 처음 완성한 것은 1427년(세종 9) 5월이었다.

세종은 새로 제작한 편경이 정확한 음을 내는 것이 크게 만족하면서 박연에게 편경 제작을 총괄하게 했고, 그 결과 1428년(세종 8) 여름까지 남양(南陽)의 경석을 이용하여 각종 편경과 특경(特磬) 528매를 제작하였다.

한편, 박연은 편경 이외에도 제례악(祭禮樂)이나 회례악(會禮樂) 연주에 필요한 각종 악기들을 제작하는 일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박연은 세종대에 수많은 상소를 통해 음악에 관련된 각종 제도의 정비를 건의했으며, 이중 상당수가 정책에 반영되었다. 박연의 문집인 『난계유고(蘭溪遺稿)』에는 박연이 올린 총 39편의 상소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세종실록』에도 실려 있다. 이 중에서 내용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1430년(세종 12) 2월에 올린 장문의 상소이다. 박연은 이 상소에서 종묘의 영신악(迎神樂), 악현(樂懸) 제도, 선농(先農)의 음악, 제향에서 사용하는 북, 헌가(軒架)의 편종(編鐘) 배치, 등가(登歌) 연주자 양성, 일무(佾舞)의 위치, 율관(律管) 제정, 악서(樂書) 편찬 등 모두 23개의 조항에 걸쳐 국가의 제사 음악에 관한 종합적인 내용들을 건의하였다. 특히, 그의 상소에는 악공(樂工)의 제복(祭服), 풍우뇌우단(風雨雷雨壇)의 제도, 단유(壇壝) 제도, 제사를 마친 후 폐백(幣帛)을 묻는 의식 등에 관한 내용도 있어 주목된다.

이는 박연이 단순히 제사 음악에 관한 일만 논의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제사 의례 전반에 걸쳐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개선 방안을 제시했음을 보여준다.

이밖에 세종대에 박연이 올린 건의 내용이나 새로 제정한 제도들을 개관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430년(세종 12) 9월에는 조회(朝會) 때에 사용하는 음악에 관한 내용을 건의했고, 1431년(세종 13) 8월에는 회례에 참여하는 남악(男樂)의 관복을 만들어 올렸다.

또, 같은 해 11월에는 각종 의식에서 연주하는 음악에 관한 내용을 상언하였고, 12월에는 정재 무동의 선발과 방향(方響) 제작에 관한 건의를 하였다.

1432년(세종 14) 1월에는 종묘 정전(宗廟正殿)의 앞이 좁아서 제사 운영에 어려움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전 앞에 있는 공신당(功臣堂)의 위치를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또, 1432년(세종 14) 3월에는 일무(佾舞)를 고례(古禮)에 맞게 시행하기 위한 조건들을 건의했고, 1433년(세종 15) 3월에는 제사 음악에서 사용하는 관복의 제도를 만들어 올렸으며, 1438년(세종 20) 11월에는 중사(中祀)와 소사(小祀)에 해당하는 제단의 정비를 건의하였다.

이상과 같이 박연은 세종대 아악(雅樂) 정비와 아악기의 제작, 음악에 관한 각종 정책과 제도 확립 등 세종대 국가 음악의 정비와 발전에 대단히 큰 공헌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각종 제단(祭壇)과 제사 복식(服飾) 등의 정비 논의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조선 초기 국가 의례의 확립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박연이 앉으나 누우나 항상 가슴에 손을 얹고 악기 치는 시늉을 했고 입으로는 휘파람으로 음률(音律) 소리를 내어가며 10여 년의 공을 쌓아 일가를 이루었다고 하면서, 박연을 세종의 훌륭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해서 태어난 인물로 평가하였다. 이와 같은 서거정의 평가는 박연이 세종대 음악 정비 사업에서 얼마나 큰 공헌을 했는지, 그리고 그 자신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음악 정비에 헌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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