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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계량[卞季良]

조선 초기 태종 대의 대표적 문장가

1369년(공민왕 18) ~ 1430년(세종 12)

변계량 대표 이미지

변계량비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출생과 관로 진출

변계량(卞季良)은 본관은 초계(草溪: 혹은 밀양(密陽)으로 칭함)이며,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으로, 1369년(공민왕 18) 태어났다. 증조부는 변주(卞珠), 할아버지는 증찬성사 변원(卞元)이고, 아버지는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 변옥란(卞玉蘭)이다. 어머니는 제위보부사(濟危寶副使) 조석(曺碩)의 딸이다. 그러나 일부 기록에는 형인 변중량과 함께 어머니가 성공필(成公弼)의 딸이라고 나오기도 한다. 형제로는 형인 변중량(卞仲良)이 있으며, 정종대 노비와 사통하고 무고한 죄로 사형을 받은 누이가 확인된다. 정처 소생의 아들은 없으며, 비첩(婢妾) 소생인 아들 변영수(卞英壽)가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네 살에 고시의 대구(對句)를 외우고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 이색(李穡)과 권근(權近)의 문인이었다. 열 네 살이던 1382년(우왕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에는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2년 후 1385년(우왕 10)에 열일곱 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 전교주부(典校主簿)에 보직(補職)되었으며, 여러 번 옮겨 사헌시사(司憲侍史)가 되고, 성균악정(成均樂正)을 지나 직예문관(直藝文館)·사재소감 겸 예문응교(司宰少監兼藝文應敎)·예문직제학(藝文直提學)을 지냈다.

그가 본격적으로 관로를 열어간 것은 1407년(태종 7) 문과 중시에서 을과 1인으로 장원을 차지하면서부터였다. 이를 계기로 당상관에 오른 후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가 되었고, 이듬해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고, 그 뒤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등을 거쳐, 1412년(태종 12)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이 되었다. 1416년(태종 16)에는 가뭄이 심하자 조선에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예는 아니지만, 권도(權道)를 따라 원단(圓壇)에 빌기를 청하여 태종의 명으로 변계량이 제문을 짓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이 원단에 가서 제사하였다. 이후에도 변계량은 여러 차례 제천례를 청하였는데, 원단 제천을 청한 그의 글은 제천의식에 대한 조선 초의 인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 관료로서의 업적

변계량은 태종-세종대를 대표하는 관료로서, 특히 예문관의 제학과 대제학, 예조 우참의와 판서, 의정부의 참찬과 찬성, 성균관의 대사성 등을 오랜 기간 동안 역임하면서, 당대의 주요한 글들을 작성하고 실록을 비롯한 다수의 주요 도서들을 편찬하였으며, 과거제를 개혁하는 등 다방면에 참여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들을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과거제 개혁과 공정한 과거의 주관

그의 졸기에서 변계량의 업적 중 하나로 꼽은 것은 여러 차례 그가 과거를 주관하면서 매우 공정하여, 고려 시기의 부정한 관행들을 근절하였다는 점이었다. 또한 그는 1417년(태종 17) 예조판서가 되어 이 무렵 과거제도 개혁에도 관여하여 봄, 가을로 제술 시험을 보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과거제 개혁 논의 때마다 참여를 하며, 조선 초 과거제를 정립시키는 데 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체로 강경보다는 제술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과거제 뿐만 아니라, 학문을 장려하고 인재를 뽑기 위한 여러 가지 조처를 건의하였는데, 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의 권지(權知)를 지방에 보내어 생도 교육을 시키라고 한다던지 5부 학당의 공억(供億)을 마련하자는 등의 건의가 대표적이며, 기타 여러 논의에 참여하였다.

2) 주요 글 작성 & 도서 편찬 참여

태종대 초반까지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글을 작성한 사람이 권근(權近)이었다면, 태종대 후반부터 세종대까지 주요 글을 작성하고 실록을 비롯한 각종 도서의 편찬에 참여한 인물이 바로 변계량이었다. 직책상으로도 임금의 말이나 명령을 대신하여 짓는 것을 담당하는 예문관의 대제학을 오래 맡아,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사대교린의 사명(詞命)은 물론 나라의 문한과 왕실의 문서를 거의 도맡아 주관하였다.

무학대사 비명, 문묘중수비문, 돈화문루종명, 태종의 신도비명, 낙천정기, 기자묘비명 등이 모두 변계량의 손에서 나왔다.

한편 당대의 주요 편찬사업에도 빠짐없이 관여하고 있었다. 실록의 경우 『태조실록(太祖實錄)』부터 『정종실록(定宗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의 편찬을 주도하였으며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한 태종대부터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고려사』의 개수에도 관여하였다.

이외에도 여러 악장 가사를 지었는데, 『하성명가』, 『화산별곡(華山別曲)』 등이 대표적이며, 『청구영언』에는 시조 2수가 전하기도 한다.

3) 대마도 정벌과의 연관성

변계량이 의정부에 재직 중이던 1419년(세종 1) 5월 5일 왜선 39척이 명나라에 가던 도중 비인현(庇仁縣) 도두음곶(都豆音串)을 침탈하고, 12일에도 황해도 해주에 왜선 7척이 침입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대책이 논의된 끝에 14일 태종과 세종이 대신들을 모아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종무(李從茂)를 앞세운 기해동정(己亥東征)이 시작된 것이다.

6월 말에서 7월 초까지 2주가량의 정벌은 비록 실제로 박실의 패군 등 전황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정벌 이후 대규모 왜구는 소멸되고, 대마도와의 평화적 왕래가 구축된 것으로 평가된다. 1421년(세종 3) 4월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사절을 보내오는 것을 계기로 정벌 국면이 종결되었으나 그전까지는 1419년(세종 1) 6월과 같은 실제 정벌은 결행되지 않았으나 재정벌 논의가 지속적으로 있었다.

이러한 정벌국면에서 변계량은 태종이 정벌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1419년(세종 1) 정벌 직후 병조판서 조말생이 대마도 수호(守護) 도도웅와(都都熊瓦)에게 보낸 글을 작성한 것도 변계량이었다.

3 후대의 평가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대제학이 되었고,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가 되었다가 1430년(세종 12)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62살이었다. 시호는 문숙(文叔)이었으며, 후에 거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형인 변중량과 함께 배향되었다.

그는 한 시대의 국가의 주요 문장을 맡았고, 과거제를 공정하게 운영하여 자리 잡게 하였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첫 번째는 가정사의 문제로서, 처음에 철원부사 권총(權總)의 딸에게 장가들었다가 버리고, 또 오씨(吳氏)에게 장가들었다가 오씨가 죽자, 또 이촌(李村)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몇 달 만에 이 역시 버리고, 또 도총제 박언충(朴彦忠)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특히 이촌의 딸에게 장가들었을 때에는 지나치게 아내를 구속함으로써 불화를 빚었으며, 아내가 있으면서 또 아내를 맞았다는 점 등으로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두 번째는 그가 “살기를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귀신을 섬기고 부처를 받들며, 하늘에 절하는 일까지 하여 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는 점이었는데, 바로 유자(儒者)로서 이단인 불교나 도교도 가리지 않았고, 제천을 주장하는 등 참람된 예를 주장하기도 하였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실제 그는 왕실의 불교나 도교의 도량이나 법석, 초제 등과 관련된 글을 다수 지었으며, 사찰의 중창 기문 등도 많이 작성하였다. 세종대 초간된 그의 문집 『춘정집』에는 이러한 글이 다수 실려 있었으나, 순조대 중간되면서 그의 글 중 불교, 도교 관련된 글들은 대거 삭제되었다. 현재 초간본은 전질이 전해지지는 않으며 일부 낙질인 상태로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고, 순조대 중간본은 당시의 책판이 형의 문집인 『춘당집』 책판과 함께 일부가 남아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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