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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사[三學士]

청에 끌려가서도 충절을 지키다

미상 ~ 1637년(인조 14)

삼학사 대표 이미지

현절사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다가 청군에 압송되어 처형된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를 가리키는 말이다.

2 시대적 배경과 관직생활

삼학사가 태어나 활동한 시기는 국내적으로는 광해군(光海君)이 쫓겨나고 인조[조선](仁祖)가 즉위하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고, 국제적으로는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발흥하는 등 국내외적인 격변기였다. 그러한 격동기 속에서 세 사람의 일생도 풍파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삼학사 중 가장 연장자인 홍익한은 1586년(선조 19년) 11월 22일에 진사 홍이성과 생원 김림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남양이고, 처음 이름은 습(霫), 자는 택원(澤遠)이었으나, 뒤에 익한으로 개명하고 자를 백승(伯升)으로 고쳤다. 호는 화포(花浦), 운옹(雲翁)이다. 그의 집안은 원래 한미했으나 조선 전기에 출세하여 고조부 홍숙(洪淑)은 좌찬성, 증조부 홍서주(洪敍疇)는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후 다시 한미해져 조부 홍애(洪磑)는 현감이었고, 아버지 홍이성은 성균관 진사에 그쳤다. 그는 15세가 되었을 때 뒤를 이을 후손이 없었던 백부 홍대성의 양자가 되었다. 두 번 결혼하여 전처인 정랑 구곤원(具坤源)의 딸과의 사이에 아들 홍수원(洪晬元)과 딸 하나, 후처 군수 허식(許寔)의 딸과의 사이에 아들 홍수인(洪晬寅)과 딸 하나를 두었으며, 후처를 통해 최명길(崔鳴吉)과도 인척관계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스러우며 신의가 있었고, 독서를 업으로 삼았다. 또한 절의에 죽는 사람들을 숭상하였다. 월사 이정구(李廷龜)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이정구는 그를 가리켜 “다른 날에 반드시 위인이 될 사람”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1615년(광해군 7)에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21년(광해군 13년)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당시 권세가들에 의해 합격이 취소되어 관직에 등용되지 못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발탁되었는데,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었다. 이후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시강원사서, 사간원정언, 병조정랑 등 청요직에 주로 있으면서 고령현감, 부안현감 등 수령직으로 나가는 등 관력을 이어갔다.

1624년(인조 2) 감찰이었을 당시 정사 이덕형(李德泂)과 함께 서장관으로 명에 가서 조선의 요청이 관철되도록 노력하였으며, 이때의 경험을 『화포조천록(花浦朝天錄)』으로 남겼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고령현감으로서 도성을 구원하기 위해 상경했으나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으며, 이듬해에는 사간원정언으로서 강홍립(姜弘立)이 후금에 항복하여 고국을 해친 죄를 엄히 다스리기를 청하기도 했다.

윤집은 1606년(선조 39년) 현감 윤형갑과 관찰사 황치경(黃致敬)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 고산(高山)이다. 그의 조부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상주전투(尙州戰鬪)에서 순절한 윤섬(尹暹)이고, 형은 병자호란 때 순절하는 윤계(尹棨)이다.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 윤이선, 윤이징을 두었다. 13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형인 윤계에게서 배웠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어 형제 세 사람이 한 방에서 학업에 힘쓰면서 옷과 음식이 거칠어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1627년(인조 5년) 22세의 나이로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631년(인조 9년) 26세 때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시강원설서, 사서가 되었고, 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으며, 1635년(인조 13년) 30세 때 홍문록에 새로 등록되어 홍문관원이 되었다. 이후 홍문관 수찬, 부교리, 이조좌랑,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오달제는 삼학사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으로서, 1609년(광해군 1년) 오윤해(吳允諧)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해주이며,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이다. 그의 조부는 『쇄미록(瑣尾錄)』을 저술한 오희문(吳希文)이고, 백부는 인조대 고위 관직에서 활약한 오윤겸(吳允謙)이며, 어머니는 최형록의 딸이다. 처음 결혼한 신씨가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남일성의 여동생과 결혼하였고, 따라서 남구만(南九萬)이 그의 처조카에 해당한다.

백부 오윤겸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평소에는 순순하여 말을 못하는 사람같이 보였지만 국가대사와 같은 중대한 일에는 말이 격앙되고 강개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몸을 움츠리게 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일찍이 14세 때인 1622년(광해군 14년)에 이미 후금을 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작성한 적도 있었다.

1627년(인조 5년) 19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26세 때인 1634년(인조 12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윤집과 함께 홍문록에 오르고 성균관전적, 병조좌랑, 시강원사서,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거쳐 1636년(인조 14년) 홍문관부수찬, 수찬, 부교리가 되었다.

삼학사의 이력을 살펴보면 세 사람이 다 기호학파에 속하는 서인(西人)의 일원이고, 청요직을 두루 거쳤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나이가 많은 홍익한의 출세가 조금 늦다는 차이는 있지만 이는 광해군대에 출사가 가로막힌 것과 집안이 비교적 한미했던 탓이 크며, 인조대에는 세 사람이 모두 청요직에서 관직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더 많다. 특히 윤집과 오달제는 병자호란 직전에 홍문록에 선발된 젊은 엘리트 관료로서, 앞날이 창창한 인재들이었다.

3 척화론의 전개와 병자호란

정묘호란 이후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던 후금은 명과의 전쟁에서 점차 우세를 점하고 내몽골을 제패함에 따라 1636년(인조 14)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국을 자칭하였다. 또한 조선에도 형제의 맹약을 군신의 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하여, 2월에 용골대, 마부대 등이 몽골의 사신들을 거느리고 조선에 사신으로 나왔다. 이에 조선의 조정은 척화론으로 들끓었다.

당시 사헌부장령이었던 홍익한은 앞장서서 후금 사신의 목을 베어 그들의 주장을 거절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홍익한은 어려서부터 대명(大明)의 천자가 있을 뿐이라고 들었는데 어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통탄하며, 저들이 황제를 참칭하고 싶으면 스스로 할 일이지 어찌 조선을 끌어들이려느냐고 강하게 비난하였다.

이어서 삼사 및 성균관에서도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가 잇따르고, 대사간 정온(鄭蘊) 역시 후금의 주장을 거절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자 불온한 공기를 알아차린 후금의 사신들은 도망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조선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후금은 4월에 정식으로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홍타이지는 황제를 칭하였다. 이때 조선에서 사신으로 가 있던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廓)은 배례를 거부하다가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쳐들어가겠다고 경고하는 청의 국서를 가지고 돌아오는 상황이 벌어졌다. 조선에서는 청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지 못했다고 하여 나덕헌과 이확을 처벌하라는 주장이 나왔으며, 동시에 척화론이 기세를 올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명길이 힘써 주화론을 주장하여 청과 화의를 지속시킴으로써 전쟁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대간들은 이를 통렬히 비판하였는데, 윤집과 오달제는 그 중에서도 선봉에 서 있었다. 그들은 척화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한편, 언론기구로서의 대각(臺閣)의 입장을 주장하며 이미 대각에서 공론이 결정되었는데, 아무리 최명길이 대신이라 해도 어찌 공론에 대항하여 잘못된 의논을 주장할 수 있느냐고 강력히 탄핵하였다. 오달제가 최명길을 논핵할 때 다른 대간들도 협조하겠다고 했으나 도중에 입장을 바꿔버려 결국 혼자 최명길을 공격하게 되었고, 그 결과 파직되었다.

오달제가 파직되자 윤집 역시 오달제의 입장에 동조하여 형인 윤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명길을 극도로 탄핵하였고, 이는 삼사의 관원들이 잇따라 사직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신진 관료들로서 삼사에서 청요직을 역임하며 정책에 대한 비판을 담당하던 삼학사는 청의 요구에 맞서 척화론을 앞장서서 주장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 해 12월, 청 태종 홍타이지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시작된 것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홍익한은 척화를 앞장서서 주장하여 전쟁을 초래한 책임을 물어 청군이 쳐들어오는 경로에 있는 평양서윤(庶尹)에 임명되었다. 반면 윤집과 오달제는 인조의 대가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홍익한은 청의 기병이 이미 도성 서쪽에 출몰하는 상황에서 강화도, 교동도를 거쳐 20여 일만에 평양의 보산성(寶山城)에 도착하였다. 당시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이 패하여 인심이 흉흉해지고 일시에 군사가 흩어져 버렸는데, 홍익한은 격문을 내어 인심을 위무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성을 보전하였다. 그는 보산성에 머무는 동안 수백의 병력을 이끌고 외롭게 성을 지키면서 전황을 걱정하고 조정의 안위를 염려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반면 윤집과 오달제는 고립된 남한산성 안에서 결사항전을 주장하였다. 당시 고관 중에서는 정온, 김상헌, 신익성(申翊聖), 윤황(尹煌) 등이 강경한 척화론을 견지하고 있었다. 윤집은 삼사 관원으로서 척화론을 주장하면서 성을 지키기 위한 방책들을 건의하고, 성 밖으로 군사를 내보내어 적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강화를 주장한 최명길이 나라를 그르쳤다 하여 앞장서서 죄를 주기를 청하는 여론을 주도하였다. 윤집은 강화를 배척하는 상소에서 조선에서 먼저 강화를 청하면 적이 더욱 조선을 가볍게 보아 화의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며, 오직 조선이 방어능력을 갖추었음을 보여준 후에야 강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갈수록 불리해져만 갔다. 특히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남한산성의 항전 의지는 거의 붕괴되었다. 청은 강화 조건으로 인조가 직접 성 밖으로 나올 것과 앞장서서 화친을 배척한 신하들을 잡아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조정에서는 평양에 있었던 홍익한을 청에 보낼 사람으로 결정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수하도록 요구하여 김상헌, 윤황 등이 자수하였다. 이에 윤집과 오달제는 자신들이 가겠다고 요청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최명길의 주화론을 배척하였으니 자신들을 내보내라고 하며, 다만 청에 사죄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때 오달제의 형 오달승은 그가 척화를 으뜸으로 주도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를 만류하고자 하였으나, 오달제는 듣지 않았다.

결국 척화를 주도한 사람으로서 청군에 보내질 인물들로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세 명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세 사람은 병자호란의 마무리를 위한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이다. 1637년(인조 15년) 1월 29일, 윤집과 오달제는 인조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청의 진영으로 출발하였다. 홍익한 역시 생사를 확인한 뒤 체포하여 청으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져 2월 12일에 평양 두리도(豆里島)에서 잡혀 청군 진영에 인계되었다. 인조는 윤집과 오달제를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가족을 돌보아줄 것을 약속하고 술을 내렸다.

이 날 오달제는 죽음을 각오하고 나무를 깎아 자그마한 패를 만들어 차면서 자신의 시체를 수습할 때 그 패를 신표로 삼으라고 유언했다.

4 최후와 추모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청의 수도 심양으로 향하는 길은 힘들고도 괴로운 여정이었다. 홍익한은 종일 말을 타고 가느라 심신이 지쳤으며, 청으로 넘어간 뒤에는 춥고 괴로운 길에 흉복통까지 앓고 있었다.

오달제 역시 60여 일이나 옷을 벗지 못한 채 잠을 자느라 온몸에 이가 들끓었다고 한다.

때는 추운 겨울이었고, 죽음을 앞에 두고 가족과도 헤어진 이들의 심정은 더욱더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홍익한은 심양으로 가는 길에 아들들에게 편지를 부쳐 어머니와 처를 잘 부탁하며, 살아남아 제사를 끊지 말라고 하였으나, 편지를 받아야 할 사람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 있었다.

윤집은 동생 윤유에게, 오달제는 어머니와 형, 아내에게 편지와 시를 부쳐 이별을 고했다. 그래도 아직 생사가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니었기에, 일말의 희망이나마 남아 있었다. 오달제는 아직 죽지 않은 것은 가족을 다시 보기 위해서라며, 형 오달승에게 4월 내에는 반드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었다. 삼학사 중 가장 먼저 2월 25일에 심양에 도착한 홍익한은 잠시 갇혀 있다가 3월 5일에 홍타이지와 대면하게 되었다. 홍타이지와 대면하기 전 28일에는 자신이 목을 베라고 상소를 올렸던 청의 사신 용골대와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홍타이지와 대면한 자리에서 홍익한은 무릎을 꿇지 않고, 형제 맹약을 해놓고 군신 관계를 강요하여 맹약을 깬 홍타이지의 잘못을 꾸짖었으며, 자신이 왜 황제가 될 수 없는지를 묻는 홍타이지에게 천조(天祖)의 반적(叛賊)이 어찌 황제가 될 수 있느냐고 대답하였다. 결국 그는 홍타이지의 명령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홍익한 자신이 홍타이지에게 자신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 쓴 글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그는 ‘대명 조선국(大明 朝鮮國)의 신하로 죽었던 것이다.

윤집과 오달제는 4월 15일에 심양에 도착하였다가, 19일에 용골대에게 불려갔다. 용골대가 두 사람에게 죄는 중하지만 살려줄 테니 처자를 데려와서 심양에서 살라고 회유하였으나, 윤집은 처자의 소재를 알지 못한다고 둘러대었고, 오달제는 다시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니 차라리 죽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볼모로 심양에 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온 박황(朴潢)과 이명웅(李命雄) 등이 구명하였으나 용골대는 듣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 역시 죽임을 당했다.

병자호란은 삼학사의 가족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홍익한의 가족은 강화도가 함락되자 교동도로 피난하는 길에 청군을 만나 맏아들 홍수원이 후처 허씨를 감싸다가 청군의 칼에 죽고, 허씨는 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으며, 며느리 이씨 역시 이를 보고 자결하였다. 또한 둘째 아들 홍수인 역시 강화도 마니산에서 적에게 피살되어, 노모와 출가한 딸들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윤집의 형 윤계 역시 남양부사로 재직하다가 순절하여, 아버지 윤섬과 함께 부자 3명이 전란에 순절하게 되었다. 오달제의 부인 남씨는 남편이 죽을 당시 임신해 있어서 딸을 낳았지만 일찍 죽었고, 자손으로 서자 한 명만이 남았을 뿐이다.

삼학사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후대에는 추앙을 받았다. 인조는 윤집과 오달제, 나중에는 홍익한의 가족들에게까지 쌀과 콩을 매달 지급하도록 하였다. 1653년(효종 4년)에는 김시진(金始振)의 건의로 관직이 추증되었고, 1686년(숙종 12년)에는 홍익한에게 충정(忠正), 윤집에게 충정(忠貞), 오달제에게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1688년(숙종 14년)에는 남한산성에 삼학사를 기리는 현절사(顯節祠)가 세워졌다. 이렇게 삼학사가 크게 추앙받은 데에는 송시열(宋時烈)의 『삼학사전(三學士傳)』이 큰 공헌을 했으며, 세 사람을 삼학사라고 칭하게 된 것도 송시열이 1671년(현종 12년)에 『삼학사전』을 지은 뒤부터이다. 삼학사는 장렬한 최후를 통해 충절을 바친 조선 사대부들의 상징으로 기억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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