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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徐居正]

조선 전기 편찬사업을 이끈 문장가

1420년(세종 2) ~ 1488년(성종 19)

서거정 대표 이미지

동문선

국립중앙박물관

1 가문 배경과 어린 시절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으로, 자(字)는 강중(剛中)·자원(子元)이며, 호(號)는 사가정(四佳亭)·정정정(亭亭亭)이다. 본관(本貫)은 달성(達成)으로, 아버지는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낸 서미성(徐彌性)이고, 어머니는 고려 말~조선 초의 대학자 권근(權近)의 딸이다.

서거정의 외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은 고려 말~조선 초의 대표적인 명문가였으며, 특히 권근 이후 여러 대에 걸쳐 조선 초기의 학계와 문단을 주도해 나갔다. 즉, 권근의 아들 권제(權踶)와 손자 권람(權擥), 외손인 이계전(李季甸)과 서거정, 그리고 외손녀사위인 최항(崔恒) 등이 모두 세종~문종대에 집현전(集賢殿) 관원으로 활동하였고, 세조~성종대까지 정부의 주요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또, 이들은 권근 이후 약 80여 년간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을 독점하면서 15세기 관학(官學) 교육과 문한(文翰) 정책을 총괄하였다.

서거정은 이와 같은 외가의 학문적 전통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이는 그가 권근의 재종외증손(再從外曾孫)인 채수(蔡壽)가 예문관 응교(應敎)에 임명되었을 때 이를 축하하며 써준 시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서거정은 권근 이후 안동 권씨 가문에서 조선의 관학계를 주도했던 사실을 서술하면서 채수 또한 이 같은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 힘써 줄 것을 당부하였다.

서거정은 6세부터 글을 읽고 시를 지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천부적인 학문적 재능을 보였다.

또, 10대 시절에는 원주(原州)에 유배되어 있던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을 찾아가 수년간 그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이때 권람과 한명회(韓明澮)도 함께 공부하였다.

2 세종~세조대의 관직 활동

서거정은 19세 때인 1438년(세종 20) 생원시(生員試)과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했으며, 1444년(세종 26)에는 식년(式年) 문과에서 을과(乙科) 3등으로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집현전 박사(博士)에 임명되어 『오례의(五禮儀)』 주해 작업에 참여했으며, 1448년(세종 30)에는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 사창(社倉) 시행 논의에 참여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집현전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어 동료 관원인 허조(許慥)·홍응(洪應)·이파(李坡)·심신(沈愼)·박기년(朴耆年)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 9월, 세조[조선](世祖)가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사행(使行)을 떠날 때 종사관(從事官)으로 선발되었으나 모친상으로 인해 압록강에서 되돌아왔다. 세조가 즉위한 후 1455년(세조 1) 9월에는 집현전 응교(應敎)로서 관제(官制) 편찬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원종공신(願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서거정은 세조대에 실시된 몇 차례의 문신 중시(文臣重試)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둠으로써 학문적 능력을 과시했고 또 이를 계기로 고위직에 올랐다. 먼저 1457년(세조 3)에 실시된 문신 중시(重試)에서 서거정은 병과(丙科) 1위(전체 4등)로 급제했으며, 또 1458년(세조 4)에도 전문시(箋文試)에서 성임(成任)·강희맹(姜希孟) 등과 함께 1·2등으로 합격하여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1466년(세조 12) 여름에는 발영시(拔英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예조참판이 되었고, 곧이어 등준시(登俊試)에서도 합격하면서 품계(品階)가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라 재신(宰臣)의 반열에 서거 되었다.

서거정의 학문 능력, 특히 문장 능력은 외교 현장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1460년(세조 6)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사행을 다녀왔다.

이 사행에서 서거정은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국(安南國)의 사신으로 명나라의 과거에서 장원을 했던 양곡(梁鵠)이란 인물을 만나 서로 시문(詩文)을 겨루었다. 당시 양곡은 서거정의 문장을 보고 ‘천하의 기재(奇才)’라며 탄복했으며, 요동(遼東) 사람인 구제(丘霽)가 서거정의 초고(草稿)를 보고는 “이 사람의 문장은 중원(中原)에서 구하더라도 많이 얻을 수 없다.”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1467년(세조 13) 4월, 형조판서로 재직하던 서거정은 예문관대제학과 성균관지사를 겸직하게 되면서 문형(文衡)의 지위에 올랐다.

이후 그는 1488년(성종 19)까지 22년 동안 예문관 대제학을 계속 겸임함으로써 국가의 문한과 교육 정책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가 되었고, 이 기간 동안 국가의 중요한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작성되었다. 1468년(세조 14)에는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세자 교육을 담당했으며, 1469년(예종 1)에는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고 호조판서를 거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

3 성종대의 관직 활동

성종 즉위 후 서거정은 1470년(성종 1)에 의정부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며, 이듬해(1471)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지면서 훈신(勳臣)의 반열에 올랐다. 1472년(성종 3)에는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고, 1474년(성종 5)에 다시 우참찬으로 복귀하였다.

1476년(성종 7)에 명나라에서 기순(祈順)과 장근(張瑾)을 사신으로 파견했는데, 이때 서거정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다. 서거정과 기순 등은 사행 기간 동안 서로 시문을 주고받으며 교유했는데, 그 때마다 중국 사신들이 서거정의 문장 능력에 크게 감탄했다고 전한다.

또, 서거정은 자신이 1460년(세조 6) 명나라 사행 때 지은 시문을 모아 편집한 『북정록(北征錄)』의 서문(序文)을 기순에게 부탁했는데, 이 서문에서 기순은 서거정의 시문에 대해 “중국에서 시가(詩歌)를 잘 한다는 사람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고, 비록 고대(古代)의 문인들과도 큰 차이가 없다.”라고 극찬하였다.

원접사의 임무를 잘 수행한 서거정은 이후 우찬성(右贊成)에 올랐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편찬에 참여했으며, 1477년(성종 8)에는 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이듬해(1478)에는 홍문관(弘文館)의 대제학을 겸직했으며, 『동문선(東文選)』 130권을 편찬하여 성종에게 올렸다.

1479년(성종 10)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이때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이듬해(1480)에는 『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편찬하였다. 또, 1481년(성종 12)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0권을 새로 편찬하여 성종에게 올렸으며, 그해 겨울에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483년(성종 14)에는 의정부좌찬성(左贊成)에 올랐고, 1485년(성종 16)에는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직하여 세자 교육을 담당하였다. 또 같은 해에 세조대부터 편찬이 계속되어 오전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완성하였으며, 이듬해(1486)에는 『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하였다.

1487년(성종 18)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했을 때 서거정이 박사(博士)가 되어 『논어(論語)』를 진강하였다. 이듬해(1488)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 등이 왔을 때에도 서거정이 이들을 맞이했는데, 당시 문장가로서 서거정의 명성이 중국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중국 사신들이 서거정을 대할 때마다 항상 존경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서거정은 1488년(성종 19) 12월 69세를 일기로 사저에서 서거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인데, ‘문(文)’은 학문의 폭이 넓고 견식(見識)이 많다는 뜻이며, ‘충(忠)’은 임금을 섬길 때 절의를 다했다는 뜻이다.

서거정은 15세기 중·후반에 6명의 국왕을 섬기면서 45년 간 관직 생활을 했으며, 22년 동안 문형(문형)의 지위에 있었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주관했던, 조선 초기의 관학(官學)을 대표하는 학자-관료였다. 이와 같은 이력에 걸맞게 그는 생애 동안 많은 저술을 남겼다. 먼저 여러 학자들과 공동으로 편찬한 저술로는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경국대전(經國大典)』·『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왕명에 의해 편찬된 관찬(官撰) 저술들로, 여기에는 15세기 동안 추진된 문물·제도 정비의 결과물들이 오롯이 담겨있다. 또, 서거정의 개인 저술로는 시문집인 『사가집(四佳集)』과 『역대연표』·『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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