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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徐敬德]

화담학파를 이끈 송도삼절

1489년(성종 20) ~ 1546년(명종 1)

서경덕 대표 이미지

화담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개성 사람, 서경덕의 독창적 사유

서경덕은 1489년(성종 20) 2월 17일 개성(開城)에서 아버지 서호번(徐好蕃)과 어머니 한씨(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경덕의 본관은 당성(唐城)이고 증조부 서득부(徐得富)를 시조로 하였다. 아버지 서호번이 장가와서 정착한 곳이 바로 개성이었다. 서경덕이 성장하였던 개성은 고려의 옛 수도로서 조선왕조와는 적대적이고 이질적인 곳이었다. 조선왕조로부터 정치적인 차별을 받아 개성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수가 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는 말은, 사실 여부를 떠나 당시 개성과 개성 사람들이 처한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개성에는 여전히 불교와 도교와 같은 고려왕조의 문화적 유제가 많이 남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경덕은 개성 사람 그리고 조선의 유학자로서 고려의 지적 전통을 한편으로 수용하고 한편으로 반발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 과정에서 어느 지역의 유학자보다 독특한 사유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서경덕은 이러한 지역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북송(北宋)의 성리학자인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상수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형상과 수(數)를 통하여, 과거·현재·미래를 비롯하여 세상 모든 사물의 변화를 설명하고 세상의 모든 원리를 설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2 서경덕의 생애와 활동

서경덕은 어려서부터 궁리와 사색 공부에 전념하였는데, 박세채(朴世采)의 《남계집(南溪集)》에 유명한 일화 하나가 전해진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서경덕은 부모님이 시켜 나물을 뜯어 와야만 했는데, 매일 늦은 시간에 돌아오면서도 바구니를 채우지 못하였다. 부모가 그 이유를 물어보자 나물을 캘 때 새가 있기에 그 새를 관찰하였고, 새가 점차 능숙하게 날아가는 과정을 살피면서 새가 하늘을 나는 이치를 혼자 궁리하여 결국 그 이치를 깨우쳤다는 것이다.

서경덕은 빈한한 환경 속에 변변한 스승도 없이 공부해야 했다. 《서경(書經)》의 〈기삼백(朞三百)〉을 몰라서 그냥 넘어가고자 하는 스승을 대신하여 스스로 〈기삼백〉을 독학해야만 할 만큼 혼자서 학문을 깨우쳐야 했다. 가난과 독학은 평생 계속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은 한편으로 전통적인 학문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가난한 가정환경과 확실한 스승의 부재는 오히려 새로운 학문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1518년(중종 13) 조정에서 과거시험으로 발탁되지 못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한 방법으로 천거과 설치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듬해 천거과에 추천된 사람이 120인이었고 그 중 서경덕이 수석을 차지하였지만, 사양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으려 했으나 어머니의 명으로 결국 43세인 1531년(중종 26) 생원시를 치렀다. 이후 1540년(중종 35)에 김안국(金安國)에 의해 천거되었으며, 56세 되던 1544년(중종 39)에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명종 원년인 1546년(명종 1) 58세 되던 해에 사망하였다.

죽기 전에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서 몇 편의 글을 남겼다. 연보에 의하면 〈원이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 네 편의 글이 이때 지어졌다. 이 글들은 서경덕 이기론의 핵심을 담고 있다.

서경덕에 대해서는 민간에서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온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황진이(黃眞伊)와의 일화이다. 당대 최고 기녀였던 황진이가 서경덕을 존경하였으며 자신과 박연폭포, 서경덕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칭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그 밖에도 홍만종(洪萬宗)이 도가, 단학의 입장에서 인물들의 사적을 정리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 서경덕이 수록되어 있으며, 당시로서는 민간 환상 소설인 〈전우치전(田禹治傳)〉에도 서경덕이 등장한다. 이처럼 민간에 그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전하는 이유는 그가 평생 재야에서 학문을 닦았기 때문에 민중들에게 친근하였으며, 여기에 더하여 그의 대표적인 학문인 상수학이 갖는 신비주의적 성격 때문이라고 보인다.

3 서경덕의 학문과 평가

16세기 사림파의 성장과 개성이라는 공간은 서경덕의 사유형성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는 소옹 상수학을 공부하면서 자연을 이해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을 터득하였다. 이것은 사물 각각에 대한 구체적인 학습보다는 순간적인 깨달음과 직관에 의해서 진리에 도달하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그의 공부 방법은 훗날 많은 비판을 받았다. 김인후(金麟厚)는 서경덕이 학자들로 하여금 하학(下學) 공부에 힘쓰지 않게 하고, ‘돈오첩경(頓悟捷徑)’의 학문에 빠지게 한다고 우려하였다. 서경덕을 따랐던 인물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후 양명학으로 기우는 것은 이러한 학문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정통 성리학자들에 의해서 비판이 있기는 하였지만, 사색과 자득(自得)을 중시하는 서경덕의 공부 방법과 학문적 성과는 이후 세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내외에서 널리 인정받았다. 이이(李珥)는 서경덕이 기(氣)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점을 비판하였으나, 이황(李滉)에 비해 기를 중시하는 이이의 경향은 서경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 서경덕의 자득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였다. 조성기(趙聖期) 역시 서경덕의 사색공부를 칭송하였으며, 자득에 대해 강조하였다. 서경덕의 학문은 중국에도 알려져 훗날서호수(徐浩修)가 연행사의 일원으로 북경에 갔을 때 기윤이 서경덕의 문집 《화담집(花潭集)》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서경덕의 사유는 후대에 기(氣)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당시 반드시 나와야만 하는 사유이기도 했다. 민간에 유포된 불교나 도교, 그밖에 민간신앙들은 자연을 인격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 성리학은 이러한 사유방식을 비판하면서 자연을 상대적으로 무감정적인, 무인격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서경덕의 학문은 자연을 인격천(人格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기존 사유체계를 끊고, 이후 성리학의 자연관, 세계관을 열어놓는데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였다. 다시 말해 서경덕은 세상의 변화를 무심히 바라보며 상수라는 기호로 인간과 자연과 우주를 설명해 냄으로써 불교, 도교, 민간신앙이 가지고 있는 자연관을 극복하고 성리학적 자연관을 정착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모든 현상을 우주의 균일한 원리로 설명해내는 상수학은 인간의 문제를 예외로 다룰 수 없었다. 서경덕의 ‘이(理)’는 당위적이고 초월적인 것이 아닌 사물 자체의 존재법칙이라는 의미가 강했다.

그러나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만들어내자, 인간 고유의 주체성이 사라졌다. 소옹과 서경덕을 숭상하던 이들 상당수가 운명론에 무기력하게 빠져들어 간 것은 이와 관련이 깊다. 가령,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 이지함(李之菡)이 서경덕의 제자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들의 사유체계는 자연의 물리법칙에 의지하여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을 등한시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이황, 이이에 의해서 인간의 고유한 주체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났다. 그것은 이기론에서 ‘이(理)’를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황, 이이의 이기론 성립에는 서경덕의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반발이 상당 부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특별한 스승 없이 자득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터득했던 서경덕은 이황, 조식(曺植), 이이와 함께 사림파의 시조격 인물이 되었다. 그들의 제자와 후예들은 다양한 정파를 이루어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조선의 사상과 문화, 정치를 이끌었다. 그의 문집에는 민순(閔純), 박순(朴淳), 허엽(許曄), 박민헌(朴民獻), 이지함, 홍인우(洪仁祐), 박지화(朴枝華), 남언경(南彦經), 김혜손(金惠孫), 마희경(馬羲慶), 박려헌(朴黎獻), 차식(車軾), 김한걸(金漢傑), 정지연(鄭芝衍), 강문우(姜文佑), 이중호(李仲虎) 등이 서경덕의 문인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후 서경덕의 제자들은 조식의 제자들과 함께 대체로 북인(北人) 세력을 이루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이이와 이황의 제자를 중심으로 재편된 조선 성리학계에서 다소 소외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의 성리설은 정통 주자학과는 차이가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정치와 사상계에서 점차 밀려난 것이다.

4 사후 추증

서경덕은 1567년(명종 22)에 호조좌랑에 추증되었으며, 1575년(선조 8)에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고 문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584년(선조 17)에 박민헌이 찬술한 신도비가 세워졌고, 그의 문집은 문인인 박민헌과 허엽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壬辰倭亂) 중에 유실되어 홍방(洪霶)이 다시 수집하여 간행하였다. 1573년(선조 6) 개성유수 남응운(南應雲)이 주도하여 정몽주(鄭夢周)와 서경덕의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그들의 출신지인 개성에 사우를 세웠다. 이 사우는 1575년(선조 8) 숭양서원(崧陽書院)으로 승격되었으며, 북인이 정권을 장악했던 광해군(光海君) 대에는 화곡서원(花谷書院)이 창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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