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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徐有榘]

가학(家學)으로 농학(農學)을 집대성하다

1764년(영조 40) ~ 1845년(헌종 11)

서유구 대표 이미지

서유구 초상

실학박물관

1 서유구가 살았던 시대상황

정조[조선](正祖)의 뒤를 이어 11세의 어린 나이인 순조(純祖)가 즉위하면서 외척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는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세도가문은 순조 즉위 직후 김조순(金祖淳)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 헌종[조선](憲宗) 때의 풍양조씨, 철종[조선](哲綜) 때의 안동김씨 등을 들 수 있다. 특정 가문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면서, 정치기강은 무너지고 부정부패가 심각해졌다. 이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진 백성들은 떠돌이 생활을 하거나, 도적떼가 되어 관아나 탐관오리의 집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누적되면서 전국적인 농민봉기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시기 발생한 대표적인 농민봉기가 홍경래의 난(洪景來-亂)이다. 당시 평안도는 중국 사신 접대에 대한 부담과 평안도 지역민에 대한 계속된 차별로 인해 불만이 높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경래(洪景來)가 중심이 되어 농민봉기를 일으켰고, 여기에는 광산 노동자, 상인, 수공업자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홍경래는 한 때 청천강(淸川江) 이북 지역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결국 관군의 반격으로 진압되고 만다. 그러나 이후 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2 가족관계와 성장배경

서유구의 자는 준평(準平)이고 호는 풍석(楓石)이다. 그의 집안은 조선전기 이래 대대로 벼슬을 했던 명문가였다. 조선전기 대제학 서거정(徐居正) 이후, 그 현손인 약봉 서성(徐渻)이 판서를 지내고, 그 아들인 서경주(徐景霌)는 선조의 부마 달성위가 되었다. 그의 손자인 서문유(徐文裕)로부터 서종옥(徐宗玉), 서명익(徐命翼), 서호수(徐浩修)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걸쳐 이조판서를 배출한 명문집안이었다. 그리고 서유구의 집안은 영정조대 탕평정국 하에서 소론(少論) 세력의 중심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서유구의 당숙인 서명성(徐命誠)은 소론 탕평파의 영수인 조현명(趙顯命)의 사위가 되었고, 그의 외할아버지는 소론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이장(李彛章)이다. 그리고 서유구의 작은할아버지인 서명선(徐命善)은 정조의 대표적인 충신이자 심복으로 영의정을 거듭 지낸 인물이었다.

서유구의 할아버지인 서명익은 전주이씨 이정섭(李廷燮)의 딸과 결혼하였다. 서유구의 아버지는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의 기초가 된 『어제춘저록』의 간행을 주관한 서호수이다. 서호수는 영조 말년에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편찬에 참여하였고, 정조대에는 규장각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각종 편찬 사업에 간여하였다. 그는 또 2차례 걸쳐 북경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정조의 명에 따라 『고금도서집성』을 구입해 왔다. 아울러 조선의 풍토에 적합한 농법을 찾기 위해 『해동농서(海東農書)』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서유구는 당숙(堂叔)인 서철수(徐澈修)에게 양자로 가게 되었다. 서철수의 아버지는 『보만재집(保晩齋集)』을 저술한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이다. 서명응은 서유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서, 세손 시절의 정조가 규장각(奎章閣)을 설립할 때 실무 책임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서유구는 십대 시절부터 서명응을 따라다니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서명응에게는 4종의 문집이 있는데, 『보만재집(保晩齋集)』, 『보만재사집』, 『보만재총서』, 『보만재잉간』이 그것으로, 시문을 제외해도 저술만 16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특히 서명응은 농서 편찬에 관심이 많았다. 이를 위해 조선의 대표적인 농서인 『농가집성(農家集成)』, 『산림경제』는 물론 중국과 서양의 자료를 구해 읽기도 하였다. 서유구도 서명응과 함께 『본사』편찬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농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서명응이 죽자 서유구는 그가 남긴 저술을 정리하여, 『보만재총서』를 편집하였다. 이 책은 1783년에 완료되어 1786년 생부인 서호수를 통해 정조에게 바쳐졌는데, ‘조선의 400년 역사동안 이처럼 거편(巨篇)은 없었다’는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서명응이 저술한 『고사12집』, 『기자외기』, 『위서』와 서호수의 『해동농서』를 제시하였는데, 이는 그가 달성서씨 가학을 계승하였음을 의미한다.

서유구의 어머니는 한산이씨 이이장의 딸이다. 이이장은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이려 하자, 이를 강하게 반대한 인물로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서호수의 형은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역임했던 서유본(徐有本)이고, 형수는 이창수(李昌壽)의 딸이다. 남동생은 서유락(徐有樂), 서유비(徐有棐)이다.

서유구는 박지원(朴趾源), 이덕무(李德懋), 성대중(成大中),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남공철(南公轍) 등 북학파들과 어린 시절부터 돈독한 교분을 나누었고, 이들을 통해 새로운 학문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특히 박지원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아, 지은 글을 그에게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런 연유로 박지원이 정조로부터 ‘문체반정’에 의해 질책을 받던 시절에도 박지원을 추종하였고, 그에 대해 비판적인 김조순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서유구는 여산 송씨 송익상(宋翼庠)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서우보(徐宇輔)이고 윤대동(尹大東)의 딸과 결혼하였다. 딸은 이광응(李光膺)과 결혼하였다.

3 순탄치 않은 관직생활

서유구는 1786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1790년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초계문신에 선발되어 규장각에서 공부를 하였고, 1792년에는 규장각 대교에 임명되어 국가적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의 할아버지인 서명응이 규장각 제학에 임명되어, 규장각 설립 및 정비에 간여하였고, 그의 생부인 서호수 역시 규장각 직제학을 지냈고, 그의 작은아버지인 서형수도 규장각 초계문신에 선발되어 활동하는 등 그의 집안은 대대로 규장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서유구는 1791년 초계문신 자격으로 『주역강의』, 『상서강의』, 『대학강의』, 『맹자강의』, 『좌전강의』, 『시경강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1796년부터 규장각 각신의 자격으로 『삼경사서』, 『향례합편』 등의 편찬 작업에 간여하였다.

특히 이 당시 서유구가 참여한 편찬 사업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전국에 소장된 책판 목록인 『누판고(鏤板考)』를 작성한 것이다. 정조는 1778년에 전국에 있는 책판의 현황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명하였고, 지방에서 보고가 오자 규장각에 실제로 소장하고 있는 지를 확인케 하였다. 1796년에 정조는 서유구에게 이전에 작성된 『장판부』를 바탕으로 하여 책판 목록을 작성하고, 책마다 편찬자, 내용, 분량, 판본의 소재를 기록하게 하였다.

이처럼 서유구는 규장각의 교육과 편찬사업에 참여하면서 많은 서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임원경제지』를 저술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이후 서유구는 전라도 순창군수와 평안도 의주부윤을 지냈다. 이 시절 서유구는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업전을 백성에게 분배하고 이에 대한 매매를 금지하는 한전론을 기반으로 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순창군수 시절에는 부민의 재력을 이용하여 수리사업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은아버지인 서형수가 1806년에 김달순(金達淳)의 옥사에 연루되어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그의 집안은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서유구는 이 일에 연좌되어 1806년에서 1824년까지 임진강(臨津江) 북쪽 장연(長淵)지역의 금화, 대호와 서울 주변 도봉산(道峰山) 아래 번계(樊溪)에 이어 남한강 유역의 두릉(斗陵)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서유구는 1824년 복직되어 강원도 회양부사에 임명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강원도관찰사에게 요청하여 받은 공명첩을 팔아 그 자금으로 소를 사서 마을에 나누어주어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1827년에는 강화유수에 임명되어, 강화부의 폐단을 고치기 위한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833년에는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완영일록(完營日錄)』을 저술하였다. 『완영일록』은 1833년 4월 10일 ~ 1834년 12월 30일까지 서유구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수행한 업무 내용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서유구는 전라도 관찰사와 병마절도사, 전주부윤을 겸임하면서 전라도 53개 고을을 순찰하기도 하였다.

1836년에는 수원유수에 임명되어 수원의 국영시범농장을 직접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수원유수를 지내면서 수행한 업무내용을 일기형식의 『화영일록』에 담았다.

75세의 나이로 은퇴한 이후에는 시골에 머물면서, 남공철, 성해응(成海應), 홍석주(洪奭周), 홍길주, 정약용(丁若鏞) 등과 계속 교유하였다. 그리고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윤정현(尹定鉉), 이유원(李裕元), 김영작(金永爵) 등 후배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관직을 물러난 이후 서유구는 『임원경제지』간행을 준비하다가 1845년 11월 1일 광주 두릉에서 사망하였다.

4 농업에 관심을 가지다.

꾸준히 농서를 연구해온 집안의 가풍과 관직생활의 경험을 통해 서유구는 농업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98년 11월 30일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적전(籍田)을 직접 경작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에 농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농서를 올리라는 윤음(綸音)을 내렸다.

이때 순창군수로 있던 서유구는 「순창군수응지소(淳昌郡守應旨疏)」에서, 호남지역은 수전(水田)이 대부분이어서 가뭄이 들면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고 언급하면서, 관개시설의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그는 수리시설 확충을 위해 순창읍 제언 설치에 필요한 공사비용과 제언에 포함되는 토지에 대한 면세를 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리고 농서 편찬을 위해 관찰사가 부서를 설치하여 농사기술을 아는 지식인들이 현지의 풍토, 생산작물, 파종시기 등을 조사하여 중앙에 보고하면 규장각에서 이를 농서로 편찬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서유구의 제안은 정조의 죽음으로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서유구가 『임원경제지』를 편찬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06년 작은아버지 서영수가 김달순 옥사에 연루되어 서유구는 은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장연의 금화, 대호를 비롯하여 노원, 두호 등지에서 생활하면서 『임원경제지』의 저본이 되는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를 저술하였고, 자신의 농업정책 구상을 밝히는 「의상경계책(擬上經界策)」을 썼다. 그리고 154종의 물고기의 이름과 모양, 형태, 생태, 습성, 맛, 가공방법 등을 서술한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를 저술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아들 서우보와 함께 『임원경제지』의 편찬을 진행하고 있었다.

1823년 정계에 복귀한 이후에도 서유구의 농업에 관심은 지속되었다. 1825년 서유구는 『행포지(杏浦志)』를 저술하였다. 『행포지』는 서유구가 직접 농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농법을 시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이다. 서유구는 『행포지』의 서문에서 『행포지』는 농사 전반에 걸친 내용을 하나씩 모은 것으로, 중국 서릉후가 살구나무 수풀과 창포를 보면서 농업을 장려한 옛이야기를 따라서 책 이름을 지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1834년 전라도관찰사 시절 서유구는 1807년~1814년 대기근으로 인해 주민이 떠나 생겨난 황무지를 노령(蘆嶺) 주변에서 발견하였다. 서유구는 이곳에 고구마를 심으면 기근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고구마 종자를 관내에 보급했으며, 그 재배법을 알리기 위해 강필리(姜必履)의 『감저보(甘藷譜)』, 김장순(金長淳)의 『감저신보(甘藷新譜)』 등을 연구하여 『종저보(種藷譜)』를 저술하였다. 서유구는 『종저보』의 서문에서 고구마는 열매 중에서 제일 늦게 수확되어 기근을 대비할 수 있고, 병충해에도 강한 품종이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 종자가 유입되었지만, 재배법을 알지 못해 해안지역 일부에서만 재배가 된다고 하였다. 1834년 호남지방을 순찰할 때 노령산맥 주변에 고구마 경작지가 있어 농민에게 물으니 기근을 당하여 유망할 때 고구마를 심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고구마 종자를 각 고을에 나누어주고, “명나라 서광계의 「감저소(甘藷疏)」‚ 우리나라 강필리의 『감저보』 및 김장순의 『감저보』 등을 참고하여 본서를 편찬하고 인쇄·유포하여 그 재배법을 알리고자 한다”고 했다.

1838년에 서유구는 경기도지역에 큰 가뭄이 들자, 구황책을 제시하였다. 서유구가 제시한 구황책은 생육 기간이 짧은 중국의 종자를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서유구는 중원과 통주 지역의 60일 벼, 상해 지역의 깊은 물에서 자라는 홍도(紅稻), 덕안부의 향호만도(香好晩稻)를 제안하였다. 농법에 관한 그의 관심과 지식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서유구는 수리시절 방비를 위해 제언에 포함된 토지는 경작을 금지시키도록 하였고, 새로운 제언 수축을 위한 비용이 없으면 부호(富戶)를 참여시켜 이들에게 중추원의 직함과 작질을 주자고 제안하였다. 또한 수리시설이 미비한 곳은 수전으로 경작하면 피해가 크니, 한전을 수전으로 변경한 지역의 수리시설을 점검하여 한전으로 되돌릴 것을 요청하였다. 이 같은 서유구의 요청을 헌종은 모두 받아들였다.

5 실용백과사전 『임원경제지』를 저술하다.

『임원경제지』는 농업을 중심으로 복식, 천문, 건축, 음악, 미술, 식생활 등 다양한 학문이 수록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이 책은 달성서씨 가문의 농업에 관한 관심과 서유구가 규장각에서 근무할 때 볼 수 있었던 수많은 책, 그리고 그의 다양한 지방관 역임 경험이 어우러져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18~19세기 활발한 인적교류와 각종 서적들의 대량 출판으로 인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의 광범위한 유통은 『임원경제지』가 저술될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이었다.

『임원경제지』는 113권 53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서적이다. 서유구는 이 책을 단기간에 집중적인 저술 활동을 통해 편찬한 것이 아니라, 1806년부터 30여 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편찬하였다. 그는 1806년 시골에 은거하면서 “걱정 속에 있으면서 걱정을 잊기 위해 많은 자료를 모아서 『임원경제지』를 편찬하였는데, (중략) 문장을 이리저리 수정한 것이 30여년이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말하였다.

『임원경제지』는 크게 16지(志)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처음에 나오는 것이 「본리지」다. 「본리지」는 전제(田制), 수리, 토양, 시비, 개간, 작물별 경작법 등 농사 전반에 걸친 내용을 담고 있다. 「관휴지」에는 산나물과 해초, 채소, 약초 등에 관한 명칭의 고증, 파종시기와 종류 등 식용작물과 약용식물을 다루고 있다. 「예원지」는 화훼류의 재배법과 50여 종의 화훼 명칭, 재배시기, 재배법에 관해 다루고 있다. 「만학지」는 과실류, 재목으로 쓰이는 나무 등 각종 나무의 재배법 및 벌목법, 보관방법에 관해 다루고 있고, 「전공지」는 뽕나무 재배를 비롯한 옷감 제작 방법, 염색법 등 부녀자들의 길쌈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위선지」에는 농업에 관련된 기상 예측방법, 「전어지」에는 가축의 사육과 질병 치료, 여러 가지 사냥법, 고기를 잡는 방법과 어구, 「정조지」는 각종 음식과 조미료 및 술 등을 만드는 방법, 「섬용지」는 건축기술, 도량형, 각종 작업 도구,「보양지」는 도가적인 양생(養生) 논의를 소개하면서 여러 가지 식이요법과 수련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인제지」는 『임원경제지』에서 가장 방대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고, 주로 의약과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다. 「향례지」는 시골에서 생활하는 사대부가 알아 두어야 할 예가 실려 있고, 「유예지」는 독서법 등 향촌에 거주하면서 취향을 기르는 각종 기예가 실려 있다. 「이운지」는 선비들의 취미 생활에 관한 내용이고, 「상택지」는 집을 짓기에 적당한 위치를 선정하는 방법, 「예규지」는 유통과 교역 등 생산활동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처럼 방대한 내용이 수록된 『임원경제지』를 저술하면서 서유구는 조선이 당시에 처한 문제를 개선, 개혁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임원경제지』는 다양한 서적에서 발췌한 내용을 이용하기 좋게 분류한 오늘날 백과사전 형식으로 저술되었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저술하면서 수많은 서적을 활용하여 방대한 내용을 정리하였고, 또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임원경제지』는 조선후기 향촌사회의 경제사정과 농업정책, 농업기술, 민속 등의 연구에 필수적인 사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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