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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成俔]

15세기 필기(筆記) 문학과 음악 이론의 대가

1439년(세종 21) ~ 1504년(연산군 10)

성현 대표 이미지

용재총화

국립중앙박물관

1 가문 배경과 가족 관계

성현(成俔, 1439~1504)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字)는 경숙(磬叔)이며, 호(號)는 용재(慵齋)·부휴자(浮休子)·허백당(虛白堂)·국오(菊塢) 등이다.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명문가의 하나였다. 창녕 성씨가 명문으로 성장한 것은 여말선초에 성석린(成石璘)·성석용(成石瑢)·성석인(成石因) 형제들이 현달하면서부터였다. 세 사람은 모두 고려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성석린(1338∼1423)은 이성계(李成桂)와 막역한 사이로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참여하여 개국원종공신(開國願從功臣)이 되었고, 또 태종(太宗)의 집권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과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관직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성석용(成石瑢, ?~1403)도 개국원종공신에 봉해졌고 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했으며, 성현의 증조부인 성석인(成石因, ?~1414)은 태종대에 대사헌·대제학과 호조·형조·예조의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처럼 성석린 형제들이 태조~태종대에 공신에 책봉되고 정부의 요직을 역임했으며 이후의 자손들까지도 대를 이어 현달하면서 창녕 성씨는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성장했다. 특히 성현의 직계인 성석인의 후손들이 가문의 성장을 주도하여, 성석인의 아들 성엄(成揜, ?~1434)은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나가 대사헌·판한성부사·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하였다. 성엄은 성염조(成念祖, 1398∼1450)와 성봉조(成奉祖, 1401∼1474) 등 두 아들을 낳았는데, 성염조가 바로 성현의 부친이다. 성염조는 1419년(세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형조의 참판과 한성부판사·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했으며, 성봉조는 세조(世祖)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동생과 혼인하여 세조와 동서간이 되었고 1471년(성종 2)에 좌리공신(佐理功臣)과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성현의 가족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은 그의 두 형인 성임(成任, 1421~1484)과 성간(成侃, 1427~1456)으로, 12세 때 부친을 여읜 성현은 두 형으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성임은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요직을 역임했으며 『국조보감(國朝寶鑑)』·『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간은 1453년(단종 1) 문과 급제 후 전농직장(典農直長)과 수찬(修撰)을 역임했으나 30세에 요절하였다. 성임과 성간은 모두 시문(詩文)과 글씨로 명성이 높았고 음률(音律)에도 뛰어났는데, 성현이 문학과 음악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두 형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2 세조~연산군대의 관직 생활

성현은 1439년(세종 21)에 성염조와 모친 순흥 안씨(順興安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에서 본 것처럼 12세 때인 1450년(문종 즉위) 부친이 사망한 후 두 형에게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또 형들의 친구인 강희맹(姜希孟)·이승소(李承召)·김수온(金守溫) 등에게서도 수학하였다.

성현은 23세 때인 1462년(세조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고, 27세 때인 1466년(세조 12) 5월에는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한 다음 박사(博士)에 임명되었다. 이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예문관수찬(藝文館修撰) 등을 역임했으며, 1476년(성종 7)에는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다시 한 번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사옹원정(司饔院正), 홍문관의 직제학(直提學)과 부제학(副提學), 승지, 형조참판 등을 두루 거쳤으며, 강원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어 한성부(漢城府)의 우윤(右尹)·판윤(判尹), 대사헌, 예조·공조의 판서, 홍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등의 직책을 수행했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성현은 음률에 뛰어나 장악원(掌樂院)의 제조(提調) 직책을 오랫동안 겸임하였다.

성현의 관력에서 주목되는 것은 명(明)에 사행(使行)을 네 차례나 다녀온 점이다. 첫 번째 사행은 1472년(성종 3) 1월로, 그의 형 성임이 명의 황태자 책봉을 하례(賀禮)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수행원으로 함께 갔다. 두 번째는 1475년(성종 6) 2월로,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된 한명회(韓明澮)를 수행하여 북경에 다녀왔다. 또 1485년(성종 16) 윤4월에는 천추절(千秋節) 하례를 위한 사신단의 정사(正使)로서 세 번째 사행을 다녀왔으며, 1488년(성종 19) 7월에는 사은사에 임명되어 네 번째 사행을 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행을 통해 성현은 견문을 크게 넓혔으며 이는 그의 학문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으로 그가 여러 차례 사신단에 선발된 사실은 그가 대명(對明) 외교에서 필수적인 뛰어난 문장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대부분의 일생 동안 관료로 활동했던 성현은 1504년(연산군 10) 1월 19일에 6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일생 평탄한 관직 생활을 영위했던 성현은 오히려 사망 후에 시련을 맞았는데, 즉 갑자사화(甲子士禍) 과정에서 성현의 대사헌 재직 시 부마 간택과 관련된 발언이 문제가 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한 것이다. 하지만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곧바로 신원되어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追贈)되고 ‘문대(文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성현은 문장에 뛰어난 학자였던 만큼 많은 저술을 남겼다. 첫 번째 명나라 사행 때의 견문을 시로 기록한 『관광록(觀光錄)』, 음악의 이론과 실제를 집대성한 『악학궤범(樂學軌範)』, 필기류 작품집인 『용재총화(慵齋叢話)』 등이 있으며, 또 문집인 『허백당집(虛白堂集)』이 전하고 있다. 이 중에서 성현의 학문적 특징을 잘 보여주며 또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대표작으로 『악학궤범』과 『용재총화』를 꼽을 수 있다.

3 조선 음악의 교과서, 『악학궤범(樂學軌範)』

『악학궤범』은 성현이 1493년(성종 24)에 성종의 명을 받아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 유자광(柳子光),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신말평(申末平) 등과 함께 편찬한 음악 이론서이다. 성현이 서문을 지었는데, 이에 따르면 당시 장악원의 의궤(儀軌)와 악보들이 오래되어 산실된 것이 많고 남아 있는 것도 대부분 내용이 소략하거나 오류가 많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종이 성현 등에게 이를 보완·교정하여 새 책을 편찬하도록 명했다고 한다.

성현이 『악학궤범』 편찬을 주도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음률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성현의 두 형인 성임과 성간도 음률에 밝아 성임은 악학도감제조(樂學都監提調)를 역임하기도 했는데, 이와 같은 재능이 동생 성현에게도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성종실록(成宗實錄)』에는 성현의 음악적 재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사가 실려 있다. 1493년 7월에 성현이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장악원 제조 유자광은 성종에게 성현이 음률에 뛰어난 것과 그동안 장악원제조로서 많은 역할을 담당했던 사실을 말한 다음, 경상도관찰사는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만 장악원제조는 성현만이 감당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성현의 경상도관찰사 임명을 재고할 것을 건의하였다. 성종은 유자광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현을 예조판서로 임명했는데,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악학궤범』의 편찬이 완성되었다. 이 기사는 성현이 당시 관료들 중 음악 이론에 가장 뛰어났으며, 『악학궤범』 편찬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악학궤범』은 9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권의 수록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제1권에는 「육십조(六十調)」·「오성도설(五聲圖說)」 등 실제로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관련된 여러 이론들이 정리되어 있으며, 제2권에는 성종대 당시 국가 제사나 연향(宴享) 등에서 시행하던 악기의 배치, 악보와 악장, 연주 절차, 연주곡의 제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3권에는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를 인용하여 고려시대의 당악정재(唐樂呈才)와 속악정재(俗樂呈才)를 기록하였고, 제4권에는 성종대 당시의 당악정재에 관한 내용을, 제5권에는 성종대 속악정재에 관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제6권의 「아부악기도설(雅部樂器圖說)」과 제7권의 「당부악기도설(唐部樂器圖說)」·「향부악기도설(鄕部樂器圖說)」 등은 각종 악기의 모양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재료와 규격(치수)을 기재해 놓은 것이며, 제8권에서 「당악정재의물도설(唐樂呈才儀物圖說)」과 「향악정재악기도설(鄕樂呈才樂器圖說)」은 당악정재 및 향약정재에서 사용되는 각종 의물과 복식을 그림으로 설명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9권의 「관복도설(官服圖說)」은 악사(樂師)·악공(樂工)·무공(舞工) 등의 복식을 그림으로 설명한 것이다.

4 15세기 필기(筆記) 문학의 꽃, 『용재총화(慵齋叢話)』

성현의 『용재총화』는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와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이육(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 등과 함께 15세기 필기(筆記) 문학을 대표하는 저술이다. 우리나라의 필기 문학은 고려 말에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이 등장한 후 한동안 침체되었다가, 15세기 성종대에 이르러 위와 같은 여러 작품들이 출현하면서 번성하였다.

『용재총화』는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324가지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제10권의 끝에 실린 「발문(跋文)」에 따르면 이 책은 1525년(중종 20)에 경주에서 처음 간행되었다. 그리고 1909년에 조선고서간행회에서 발간한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수록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성현은 『용재총화』의 이야기들에 대해 특별한 분류를 적용하지 않았지만, 『용재총화』에 대한 기존 연구에 따르면 『용재총화』의 수록 내용들은 ①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 ② 우스운 이야기, ③ 귀신·점복(占卜) 등의 신기한 이야기, ④ 기타 잡론(雜論)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관한 내용으로, 우리나라 역대의 문인(文人)·서적·활자 등과 조선초기의 각종 제도와 풍속, 서예·그림·음악 등 예술에 관한 내용, 중국·일본·여진의 사신(使臣)에 관한 일화, 그리고 당시까지 활동했던 수많은 인물들의 일화들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용재총화』에 일화가 수록된 인물들은 왕실 인물이나 사대부 관료·학자들뿐만 아니라 서화가·음악가·예술가·승려 등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매우 다양하다. 이밖에 우스운 이야기나 신기한 이야기 등을 통해서도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모습들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용재총화』는 조선 초기 사회의 다양한 사상적 흐름과 문화의 실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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