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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혼[成渾]

서인의 학문적 기틀을 세우다

1535년(중종 30) ~ 1598년(선조 31)

성혼 대표 이미지

우계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성장배경과 가족관계

성혼은 1535년(중종 30) 서울의 순화방(順和坊)에서 성수침(成守琛)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인 창녕 성씨는 5세 성여완(成汝完)이 중앙에서 활동하였던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그의 조부 성세순(成世純)은 대사간, 대사헌 등 언로(言路)의 요직과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던 명망 높은 인물이었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친 성수침은 현량과를 통해 천거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벼슬을 단념하고 은거하여 유일(遺逸)로 명성이 높았다.

『우계집(牛溪集)』의 연보에 따르면 어린 시절 성혼은 출생지인 서울에 거주하였다. 앞서 이야기하였듯 부친 성수침은 기묘사화 이후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는데, 중종[조선](中宗) 말년 혼란이 심화되자 서울을 떠나 1544년 파주 파산(坡山)의 우계(牛溪)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학문에 힘쓰던 성혼은 1551년(명종 6) 신여량의 딸 고령 신씨와 혼인하였다. 같은 해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급제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복시(覆試)에는 응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과거 경력이었다. 이 시기에 얻은 병은 평생 그의 고질이 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겨울 귀양에서 풀려난 백인걸(白仁傑)이 파산에 와서 머무르자 그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554년에는 그의 평생의 벗이자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이이(李珥)와 교분을 나누었다. 이후 성혼과 이이는 학문적 논의를 주고받기도 하며, 분당의 와중에도 입장을 같이 하는 등 평생의 벗으로 남았다. 1561년과 1564년 모친과 부친을 잇달아 여의었는데, 부친의 상 때에는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는 등 유교적인 예법을 준수하는 모습을 보였다. 흥미로운 것은 성혼의 외조부가 적손이 없었으며, 제사를 이었던 서자마저 죽어 후손이 없게 되자 별도로 묘(廟)를 만들고 자신이 제사를 받들었다는 사실로, 조선 중기까지 외손이 제사를 받들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부인 고령 신씨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으며 차남 성문준(成文濬)은 후일 천거로 현감이 되었으며, 차녀의 사위로 대사간을 지낸 윤황(尹煌)이 있다.

2 사림의 대두 : 일세의 선비로 이름을 떨치다

두 차례의 사화 이후 명종[조선](明宗) 즉위 내내 재야에서 학문을 닦고 있던 성혼에게, 선조[조선](宣祖)의 즉위는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었다. 즉위 이후 훈척세력이 위축되고 사림이 득세함에 따라 선조는 재야에 은거하고 있던 선비들을 천거하여 관직을 제수하는, 후일의 산림 초치에 비견될 만한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선조의 명에 따라 경기 감사 윤현(尹鉉)이 성혼을 천거하였고, 이때부터 관직에 제수되기 시작하였다.

비록 주어진 대부분의 벼슬을 사양하거나 관직에 나아간다 하더라도 곧바로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참봉을 시작으로 현감, 좌랑, 지평에 임명되는 등 사림의 진출 이후 성혼은 점차 중앙에서도 주목받는 선비로 그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시기 성혼의 학문활동 역시 활발하였는데, 이황(李滉)과 만나고, 이이와 유명한 이기론(理氣論),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는 등 학문세계가 점차 무르익는 모습을 보였다.

1559년(명종 14)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의 논쟁에서 촉발된 사단칠정에 관한 논쟁은 맹자 이래로 유학, 특히 성리학의 핵심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였다. 인간의 선한 본성과 인간 본연의 감정 상호간의 관계에 관한 이 논쟁은 감정을 다스리고 하늘로부터 받은 인간 본연의 순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성리학의 수양론의 핵심을 이루는 주제였으며, 따라서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연구하던 당시 학자들의 중요한 관심주제였다.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은 사단과 칠정, 인심과 도심, 그리고 이(理)와 기(氣)라는 존재론적인 영역에까지 확대된 논쟁을 벌였으며,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양선생왕복서(兩先生往復書)』라는 이름으로 주목받기도 하였다.

이황과 기대승의 후학이라 할 수 있는 성혼과 이이 역시 1572년부터 이에 관한 주제로 서간을 통해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성혼의 『우계집』과 이이의 『율곡전서(栗谷全書)』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이들은 이와 기의 관계에서 양자의 구분보다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측면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는 공통된 의견을 보였으나, 이와 기의 능동성 문제에서 견해 차이를 보였다. 그리고 인심과 도심의 관계에서 인심의 포괄성을 강조하였던 이이의 견해와 양자의 구분 가능성을 더 크게 보았던 성혼의 견해가 갈렸으며, 이들의 주장은 이른바 ‘우율논변’으로 불리며 후학들의 주목을 끌었다. 학문적 동반자인 이이와의 논변은 조선 성리학의 주요 주제들에 대한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이 학문적 소양과 명성을 쌓은 성혼은 대표적인 산림으로 인식되었으며, 동료들의 추천과 선조의 부름을 지속적으로 받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지속적인 부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출사는 하지 않았으며, 파주의 근거지에서 제자들을 육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특히 1568년 백인걸과 이이의 주도로 세워진 파산서원(坡山書院)을 중심으로 학문과 교육에 힘쓰며 그 명망을 떨치고 있었다.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힘쓰던 성혼의 그 궁핍함이 조정에 알려질 정도의 생활을 하였으나, 여전히 재야에서 학문에 힘쓰며 학자의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3 붕당의 대립과 임진왜란에 휩쓸리다

이처럼 벼슬을 사양하고 재야에서 학문에 매진하는 사림의 본분에 충실하던 성혼이었으나,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점차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정국에 휩쓸리고 있었다. 선조 즉위 이후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대립에서부터 촉발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분열은 1575년 이후 점차 가속화되고 있었다.

중앙에 출사하지 않았던 성혼은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으나, 그의 교유관계가 문제가 되어 의도치 않게 동서의 분쟁에 개입될 수밖에 없었다. 동인과 서인의 분열을 조정하려던 이이가 동인의 공격을 받고 서인으로 간주되면서, 그와 학문적 동반자로 인정되었던 성혼 역시 서인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선조 역시 이이, 성혼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며 그들을 두둔하고 자신 역시 이이, 성혼의 당(黨)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등, 성혼은 점차 동인과 서인의 대립 속에 깊숙이 연루되어 갔다

자신과 이이를 둘러싼 조정의 논란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던 성혼이지만, 이이가 병조판서로 있으며 선조의 허락을 얻지 않고 일을 처리한 것이 문제가 되자 이이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는 등, 점차 이이와 성혼은 서인의 중심인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동인과 서인의 분당에 성혼 역시 연루되어 이이와 함께 붕당의 주범으로 지목되었으며, 동인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1584년(선조 17) 이이의 사후 동서의 분쟁은 점차 심화되어갔으며, 성혼 역시 지속적으로 동인에게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성혼을 더욱 동서분쟁에 깊이 연루시키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임진왜란(壬辰倭亂)과 함께 성혼의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기축옥사(己丑獄事)였다.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 정여립(鄭汝立)과 성혼이 교류가 있었다 하여 논란이 되어 대죄(待罪)하는 등, 기축옥사 자체에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성혼은 이와 관련하여 동인의 비난을 받았다.

특히 최영경(崔永慶)의 죽음은 성혼이 동인의 비난을 받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애초에 최영경이 기축옥사 과정에서 옥에 갇히자 성혼은 당시 옥사를 주도하던 정철(鄭澈)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무고함을 주장하였고, 이를 받아들여 정철이 최영경을 풀어줄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끝내 최영경이 죽임을 당하자 성혼은 그 자신이 직접 간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실상 최영경의 죽음을 이끈 인물이라며 거센 비판을 받았으며, 이는 그의 사후에까지 논란이 되었다.

이처럼 동인과 서인의 대립에 휘말리던 성혼의 일생에 가장 큰 논란이 되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바로 임진왜란의 발발이었다. 기축옥사의 여파로 동인의 공격을 받고 있던 성혼은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은거하고 있었다. 『우계집』에 따르면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에도 자신의 처지가 바로 선조를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선조의 어가가 빠른 시일 내에 의주로 몽진할 것이라 생각지 못하여 선조의 어가를 호종하지 못하였다.

앞서 성혼을 옹호하던 선조 역시 자신을 호종하지 않은 성혼에게 껄끄러운 마음을 드러냈으며, 피난길에 가까운 파주에 거주하던 성혼이 자신을 따라오지 않은 것을 힐난하는 등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이는 전쟁 이후 정권을 장악한 동인이 성혼을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였다.

성혼의 수난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강화를 주장하였던 이정암(李廷馣)이 비난을 받자 성혼이 그를 옹호하였고, 이에 선조의 분노를 샀다.

성혼은 이정암의 주장까지 옹호하지는 않고, 다만 그의 말이 잘못된 것은 사실이나 나라를 위하는 충절이었기에 중죄로 다스려서는 안된다는 완곡한 뜻을 표현했으나, 선조는 이정암을 옹호한 것 자체에 대해 분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光海君)을 먼저 찾아가고 나중에 선조를 찾아간 것이 빌미가 되어 세자의 선위(禪位)를 꾀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는 등, 임진왜란 내내 성혼은 기축옥사와 자신의 처지가 문제가 되어 정쟁에 휩쓸리었다.

이처럼 중앙의 벼슬을 하지 않고 재야에서 학자로서의 본분을 이어가던 성혼이었으나 동서 붕당의 대립과 기축옥사, 임진왜란에 연루된 성혼은 파란만장한 만년을 보내었으며, 1598년(선조 31) 평생을 보낸 파산의 우계에서 생애를 마쳤다.

4 사후 : 일단의 파란, 끝내 문묘에 종사되다.

말년의 성혼은 기축옥사와 임진왜란 때의 처신 문제로 정치적 파란의 중심이 되어왔으며, 이는 그의 사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4년 뒤인 1602년(선조 35) 정인홍(鄭仁弘)이 중심이 되어 성혼을 비판하였으며, 끝내 정철과 함께 관작이 삭탈되었다.

이후 동인이 득세한 광해군대 내내 성혼의 관작은 회복되지 않았고, 이 조치는 서인이 중심이 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조[조선](仁祖)가 즉위한 이후에 철회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이 득세하면서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연원에 있었던 성혼의 위상 역시 재고되었다. 서인들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끊임없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文廟) 종사를 시도하였으나, 문묘종사가 지니는 상징성으로 인해 역대 왕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들의 시도가 성사된 것은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의 정권이 강화되고, 숙종[조선](肅宗)과 더욱 밀착된 1681년(숙종 7)의 일이었다.

유학의 도통에 공헌이 인정되는 인물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묘에 종사됨으로써 성혼의 학문적 위상은 국가적 공인을 받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금 정권을 잡자 남인은 서인의 학문적 영향력을 감쇄하기 위해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서 출향(黜享)하고자 하였고, 1689년(숙종 15) 문묘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재차 정권을 잡은 뒤 다시금 문묘에 들어가는 복향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로써 붕당 간의 대립에 연루된 성혼의 문묘종사 문제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문묘종사가 완전히 마무리된 이후 성혼은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연원으로 큰 존중을 받게 되었다. 문묘에 종사되었다는 것 자체가 국가에서 그 학문적 권위를 인정한 것이었으며, 그와 이이의 문인들이 지속적으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성혼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정신적 지주이자 일대의 대학자로 추숭 받게 되었다. 비록 기호학파와 서인의 중추에 있던 인물은 이이였으나, 성혼 역시 이이와 함께 이기론, 사단칠정론, 인심도심론을 논하며 학문세계를 공유하였던 인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과 전성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사후에는 파산서원, 황산서원, 소현서원에 배향되었다. 1629년에는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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