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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昭惠王后]

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인수대비가 되다

1437년(세종 19) ~ 1504년(연산군 10)

소혜왕후 대표 이미지

경릉 왕후릉 전경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개요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는 세조의 큰아들인 덕종(德宗, 의경세자)의 부인이다. 그녀는 청주 한씨(淸州韓氏) 가문 출신으로, 한확(韓確)의 여섯째 딸이다. 1455년(세조 1) 세자빈에 책봉되었지만, 2년 뒤 남편 의경세자가 사망하여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月山大君), 성종(成宗), 명숙공주(明淑公主)가 있다. 1469년 성종은 즉위 이후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였고, 어머니를 왕후에 책봉했다가 인수대비(仁粹大妃),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로 승격하였다. 소혜왕후(인수대비)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西五陵) 내에 있는 경릉(敬陵)으로, 덕종과 합장되어 있다

2 세자빈 시절, 2년여 만에 막을 내리다

소혜왕후는 1437년(세종 19)에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은 막강한 위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세종대에 아버지 한확의 누이들이 명 3대 황제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와 5대 황제 선종(宣宗) 선덕제(宣德帝)의 후궁이 되었고, 한확이 대명외교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대외적 위상도 높았다. 또한 한확 외에도 한명회(韓明澮), 한백륜(韓伯倫), 한계희(韓繼禧) 등이 세조·예종·성종 등의 집권에 기여함으로써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더욱이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청주 한씨 가문은 훈척(勳戚)이 되었다. 소혜왕후를 비롯하여 예종 비 장순왕후(章順王后)·안순왕후(安順王后), 성종 비 공혜왕후(恭惠王后) 등이 모두 같은 가문이었다.

소혜왕후는 14세인 1450년(문종 즉위)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의 큰아들인 도원군(桃源君, 덕종) 이장(李暲)과 혼인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조 즉위 후 도원군이 의경세자에 책봉되자 그녀 역시 19세에 왕세자빈이 되었다. 훗날 그녀가 펴낸 『내훈(內訓)』의 발문(跋文)에는 자신이 법도를 중시하고 엄한 성품이어서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왕후가 ‘폭빈(暴嬪)’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기록해 두었다.

그러나 소혜왕후는 연이어 아버지와 남편을 잃는 슬픔을 겪어야만 했다. 우선 1456년(세조 2) 당시 좌의정이었던 한확은 명 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인 1457년(세조 3)에는 남편 의경세자가 둘째 아들(훗날 성종)이 태어난 지 2달도 지나지 않아 병사하였다. 따라서 세자위가 해양대군(海陽大君, 훗날 예종)에게 승계되었고, 소혜왕후가 왕세자빈으로서의 지위를 누린 기간은 2년여에 불과했다. 그녀는 21세에 과부가 되어 자녀들을 데리고 사가로 돌아갔다.

3 국왕 어머니로서 대비가 되다

예종은 1468년(예종 즉위)에 즉위하였지만, 재위 13개월 만에 훙서하였다. 그리고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신숙주(申叔舟), 한명회 등의 뜻에 따라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올랐고, 그의 어머니인 수빈(粹嬪, 소혜왕후)도 궁궐로 돌아왔다. 당시 국왕의 나이가 13세로 어렸기 때문에, 약 7년 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시행되었다. 정희왕후는 ‘문자를 알고 사리에 밝은’ 며느리 수빈에게 수렴청정을 맡길 것을 제안하였지만, 결국 행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기간 동안 소혜왕후의 정치적 영향력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수빈의 위호(位號)도 변경되었다. 당시 궁궐에는 대왕대비 정희왕후, 왕대비 안순왕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수빈의 위상 문제는 복잡했다. 게다가 안순왕후는 왕대비였지만, 수빈에게는 아랫동서였다. 일단 1470년(성종 1) 의경세자의 시호가 온문의경왕(溫文懿敬王)으로 정해졌고, 수빈은 인수왕비(仁粹王妃)가 되었다. 1472년(성종 3)에는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인수왕비의 위차를 왕대비(안순왕후)의 위에 두도록 했다. 그리고 1475년(성종 6) 1월에 부부가 의경대왕(懿敬大王),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로 존호를 올려 받았고, 명으로부터는 회간왕(懷簡王), 회간왕비(懷簡王妃)의 시호를 받았다. 그해 10월에는 의경대왕이 덕종 묘호를 받았다.

4 왕실의 어른으로서 『내훈』을 편찬하다

인수대비(소혜왕후)는 1475년(성종 6) 왕실의 어른으로서 『내훈』을 편찬하였다. 당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내외관념에 따라 구분되었고, 특히 궁중 여성들에게 여성으로서의 덕목과 행실은 더욱 엄격하게 규정되었다. 더욱이 왕실에 정희왕후 이하 성종의 비빈(妃嬪)들까지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던 상황에서, 인수대비는 여성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내훈』은 중국의 『열녀(烈女)』, 『여교(女敎)』, 『소학(小學)』, 『명감(明鑑)』 등에서 부녀자들의 훈육에 필요한 내용을 뽑아 전체 3권 4책으로 정리하였다. 제1권은 언행(言行), 효친(孝親), 혼례(婚禮), 제2권은 부부(夫婦), 제3권은 모의(母儀), 돈목(敦睦), 염검(廉儉)으로 구성되었다. 어버이에 대한 효도, 부부 사이의 예절, 자식과 며느리에 대한 교육, 친족 간의 화목, 청렴하고 검소한 생활 등에 대한 내용이 핵심으로, 이후 조선 왕실 여성들을 가르치는 교재로 활용되었다.

5 내훈의 가르침, 실패한 것일까

인수대비는 『내훈』에서 “옥 같은 며느리를 얻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내면서 며느리에 대한 교육을 중시했지만, 안타깝게도 며느리 윤씨(尹氏)를 폐비하여 사사(賜死)하기에 이르렀다.

윤씨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의 딸로 후궁이 되었는데, 1474년(성종 5)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가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1476년(성종 7) 중전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그해에 아들 이융(李㦕, 연산군)까지 낳았다.

하지만 폐비 조치가 행해진 만큼, 실록에 기록된 윤씨의 행실은 “왕비의 죄를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 , “독약으로 궁인을 해치려고 했다.” 등 매우 부정적이다. 인수대비 역시 폐비 윤씨에 대해 ‘칠거(七去)’의 기준으로 비난하였다. 대비전에서 책망을 하면 노려보기 일쑤였고, 남편 성종에게도 “발자취까지도 없애겠다”는 등의 패역(悖逆)한 말을 많이 했다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인수대비의 언급은 폐비 윤씨 사사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6 불교에 심취하다

인수대비는 유교 윤리를 중시하면서도 불교에 심취하였다. 그녀는 선대 왕과 왕후의 명복을 빌고자 자신의 사재(私財)를 털어 불경을 간행하고 불교 의례를 시행하는 것임을 밝혔다. 대비의 불교 행위에 대한 신하들의 반대 의견이 나올 때에도 그 주장은 일관되었다.

한편, 1492년(성종 23) 도첩제(度牒制) 폐지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대했다. 당시 인수대비는 도첩이 없는 승려가 비정상적으로 증가한 원인을, 승려가 되면 놀고먹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을 정상적으로 살 수 없게 만드는 그릇된 정치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이와 같이 강경한 의사를 나타낼 정도로 인수대비는 불교를 옹호하였다. 따라서 대비가 발원하여 간행한 불서도 상당하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비롯하여 수십 종에 달하는 불서(한문분, 언해본)를 간행하였다. 일부는 중국본을 저본으로 삼아서 백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체제를 바꾸어 간행하기도 했다.

7 손자 연산군의 원망을 받다

폐비 윤씨를 사사한 후 성종은 관련 사안을 거론하지 말도록 했지만, 연산군은 즉위 직후 생모 윤씨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연산군은 폐비의 추숭을 시도하면서 삼사의 언관과 대립하였고, 끝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발생으로 이어졌다.

연산군 즉위 이후 인수대비는 인수대왕대비(仁粹大王大妃)로 승격되었지만 폐비 윤씨를 사사시키는 데 기여한 대왕대비는 손자 연산군으로부터 어머니를 죽인 원망을 받았다. 연산군이 장녹수(張綠水)에게 빠져들 무렵에는 인수대비가 여러 차례 타일렀지만, 원망과 분노는 더해갔다. 대비는 연산군이 날마다 개최하는 연회에 억지로 참석하면서 늘어가는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하루는 연산군이 처용(處容) 가면을 쓰고 칼을 휘두르며 처용무를 추자 인수대비가 크게 놀랐고, 이를 계기로 병을 앓게 되었다고 한다.

1504년(연산군 10)에 연산군은 생모 윤씨의 시호를 ‘제헌(齊憲)’으로 올리고, 회묘(懷墓)도 회릉(懷陵)으로 승격시켰다. 그해에 인수대비는 창경궁 경춘전(慶春殿)에서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연산군은 “나라에는 특별히 이렇다 할 일이 없고, 다만 자친(慈親)으로 섬겼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인수대비의 위상을 격하하였다. 그로부터 2년 뒤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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