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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

주자학을 절대 신봉했던 노론의 영수

1607년(선조 40) ~ 1689년(숙종 15)

송시열 대표 이미지

송시열 초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조선후기를 이해하는 열쇠

조선후기를 이끌어 간 이념, 정치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우암 송시열(宋時烈)이다. 1607(선조 40)년에 태어나 1689년(숙종 15년)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83년 송시열의 인생은 길고도 강렬하였다. 송시열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막 끝난 혼란의 시기에 태어나서 인조[조선](仁祖) 대의 병자호란을 겪고, 이로 인해 효종(孝宗) 대에 본격적으로 출사하여 주자의 화이론(華夷論)에 기반하여 대청복수론과 대명의리론을 이야기하여 전쟁으로 황폐해진 조선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현종[조선](顯宗) 대에는 본격적으로 문화적 화이론인 존주론을 강조하여 조선도 중화문명의 실천자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일어난 갑인, 기해년의 두 차례 예송(禮訟)과 윤휴(尹鑴), 윤증(尹拯), 박세당(朴世堂) 등의 학자들과의 사문(斯文) 논쟁, 이 당시 본격적으로 증폭되기 시작한 붕당들의 갈등으로 송시열은 논란의 대상이 되거나 정치적인 부침을 겪게 되었다. 숙종[조선](肅宗)이 즉위하고 나서도 그는 항상 조정의 주요 논의에 중심에 있었으며, 결국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산림의 영수로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으며, 사후에도 이를 통해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송시열이 주창한 춘추대의는 정조가 널리 현창하려 했던 시대정신이었다.

송시열에 대한 현대의 역사적 평가는 일제시대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부정적이었다. 식민사관이 정체성론, 당파성론, 사대성론으로 규정하는 한국 역사의 총체적인 책임자는 조선후기의 성리학, 송시열과 그의 이념을 이은 서인(西人) 노론(老論)에게 모아졌다. 70년대 조선시대 연구자들의 내재적 발전론을 기반으로 한 사회경제사학, 80년대 민중사학, 본격적인 정치사 연구가 진행되면서 식민사관은 극복되었지만 여전히 송시열은 시대를 역행한 보수적인 정치인의 이미지였다. 이후 조선의 성리학과 정치문화에 대한 재조명 덕분에 송시열을 당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합당하게 평가할 수 있는 계기가 충분히 주어지고 있다. 송시열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조선후기 역사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와도 직결되어 있다. 송시열이 조선후기의 방향성을 결정했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2 북벌을 이야기하다.

송시열은 송갑조(宋甲祚)의 둘째 아들로 외가인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이며, 호는 우암, 자는 영보이다. 어릴 때 후에 양송으로 일컬어지는 동춘당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수학하였다.

27살인 1633년(인조 13)에 생원시 장원을 하고 1635년(인조 15) 11월에 대군사부로 임명되어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에게 『서경』을 비롯한 학문을 가르쳤다.

그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청나라에게 인조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자 송시열은 보은으로 돌아가 칩거하였다. 이때부터 효종 즉위후 출사하기 이전까지 그는 약 10년간 성리학에 침잠하였다.

병자호란은 송시열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전통적인 화이론에 입각한 세계관을 가졌던 조선의 모든 지식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충격이 있었을 것이다. 송시열은 조선이 오랑캐인 청나라의 무력에 굴복하여 춘추의리를 저버리게 된 것은 인륜을 저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649년 효종의 즉위 이후 척화론의 상징인 김상헌(金尙憲)을 비롯한 이유태(李惟泰), 송준길, 김집(金集) 등 호서산림들이 대거 조정에 불려 들어가면서 당시 사류들의 광범위한 공감대 속에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송시열은 이때에 효종의 밀지를 받은 뒤 조정에 들어가 대청복수론을 중심으로 한 13개 조목의 「기축봉사」를 올린 뒤 낙향하였다.

효종의 계속되는 부름에도 송시열은 조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노모봉양, 신병 등의 이유를 들어 출사를 사양하고 강학에 전념하였다.

효종은 즉위 이래 청나라를 실질적으로 정벌하기 위해 군사적 준비에 몰두하였다. 현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북벌’의 이미지는 바로 효종이 추진한 북벌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이 생각하는 북벌은 효종의 그것과는 달랐다. 송시열이 보기에 청을 무력으로 치는 것은 올바른 복수의 방법이 아니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한 민생의 고통이 극심한 상태에서의 군비확충은 확실히 왕도정치가 아닌 패도정치였다. 송시열은 유가의 정치문화에서 이상적인 시대로 여기는 중국 삼대로 상징되는 왕도정치를 위한 내수외양, 즉 민생을 먼저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북벌론의 핵심이자, 춘추대의를 실천하는 방법이었다. 송시열의 이와 같은 생각은 1657년(효종 8) 8월 사직소의 형식으로 올린 「정유봉사」에 잘 드러나 있다.

3 예론을 정립하고 논쟁하다

효종의 뒤를 이어 현종이 즉위하자 송시열은 좌참찬에 임명되는 등 재차 출사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곧 효종의 국상을 치르는 과정에서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기간을 두고 남인(南人)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것이 1차 예송인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남인들은 허목(許穆)을 대표로 ‘왕이 되었다면 차자도 장자 대접을 받아야한다’는 논리로 3년설을 주장했지만, 송시열의 경우 ‘효종이 적통으로 왕위를 이은 것은 맞으나 장자는 아니기 때문에 왕이 되었다고 해서 장자로 대우를 바꿀 수는 없다’는 입장으로 1년 설을 지지하였다. 이 과정에서 송시열은 『의례』 주소의 설을 근거로 주장하였는데, 그가 여기서 근거로 들은 ‘체이부정(體而不正)’ 설에 등장하는 ‘서자(庶子)’라는 단어가 문제가 되어 정치적으로 비화된다. 허목은 ‘서자’가 ‘첩의 자식’을 뜻하는 것이냐며 비판하였고, 윤선도(尹善道)는 송시열의 의도가 효종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소현세자(昭顯世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데에 있다며 극력 비판하는 상소를 하였다.

이 때문에 송시열은 스스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후에 송시열은 자신의 예설이 남인들에 의하여 곡해된 면이 크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글을 하나 남긴다며 「예설」이라는 글을 지어 남겼다.

이후 송시열은 별다른 정치 활동을 하지 않고 강학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664년(현종 5) 김만균(金萬均)의 출처문제를 둘러싼 ‘공의·사의논쟁’이 일어나자 서필원(徐必遠)과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 일과 이전의 예송에 관한 일로 남인들이 비판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송시열은 대명의리론의 이념을 주장하며 현종에 의해 그 뜻이 실천되기를 바랐다. 1673년(현종 14)에는 출사하여 좌의정이 되었지만 또다시 민신(閔愼) 집안의 복제에 관한 일에 의견을 표명한 송시열의 예론이 비판받게 되는 일이 일어나자 다시 화양동으로 낙향하였다.

1674년(현종 15) 2월에는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죽음으로 자의대비의 복제가 또 한 번 문제가 되었는데, 이것이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다. 역시 이전의 예송과 같은 구도로 서인은 9개월 설을, 남인은 1년 설을 주장한 가운데 현종이 이번에는 남인의 예설이 옳다는 판단을 하였다. 그리고 곧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였다. 송시열은 다시 서울로 올라갔으나 그의 예설이 종통의 순서를 어지럽힌다며 엄한 처벌을 주장하는 곽세건(郭世楗)을 비롯한 남인들의 비판으로 결국 유배되었다.

이 유배지에서 송시열은 주자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을 편찬하였다.

4 대로(大老) 세상을 떠나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영의정으로 하는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송시열의 유배생활은 끝나게 되었다. 그의 나이 76세였다. 지금으로 쳐도 많은 나이에 그는 노구를 이끌고 조정에 들어와 정치에 열심히 참여하며 자신이 그동안 정립한 주자학적 정치사상을 피력하였다. 이 동안 송시열은 윤증 및 그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이 시작되면서 여러 가지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김익훈(金益勳) 등의 훈척을 비호하였다는 지적을 받았고,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 내용의 수정을 거절한 이유로 윤증과 갈등을 빚으면서 송시열은 이들 세력과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확실한 선을 긋게 되었다. 그는 윤증 등이 윤휴와 같이 주자학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불순한 무리들이라고 규정하고 적극적인 배척에 나선다. 이로 인하여 서인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少論)으로 분립되었다.

1689년(숙종 15) 1월 송시열은 장희빈(張禧嬪)이 낳은 아들의 원자 책봉을 미룰 것을 건의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숙종은 조정의 요직을 남인들로 채우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을 조정에서 대거 축출하였다. 이것이 두 번째 환국인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이때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그를 사사하라는 남인들의 빗발치는 요청으로 6월 서울로 압송 되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가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은 ‘학문은 주자를 위주로, 사업은 효종의 유지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즉,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했던 두 가지는 주자의 학문과 존주의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바로 이점이 현대의 연구자들로 하여금 송시열 사상의 사대성을 지적하게 하였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주희의 사상과 화이론의 고수는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유교문화의 핵심이념인 왕도정치를 조선에 구현하고 실천하는 방법으로 여겨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오히려 생각할 여지가 있다.

5 사후에도 조선을 지배하다

송시열은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관작이 회복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즉, 공식적으로 숙종에 의해 송시열의 학문과 정치 이념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전국 각지에 그를 배향하는 서원들이 세워져 최대 70개에 달할 때도 있었다. 영조(英祖) 대에는 문묘(文廟)에까지 배향되면서 그의 영향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의 존주론은 구한말에까지 영향을 미쳐 위정척사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정조[조선](正祖)는 왕명으로 송시열의 문집을 간행하며 그에게 ‘송자(宋子)’라는 칭호를 붙였으니, 이는 공자, 맹자, 주자 등 역대 성현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의 제자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권상하(權尙夏)는 송시열의 적전 제자로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로 일컬어지며 호론(湖論)의 입장에서 철학적 사유를 발달시킨다. 서울과 그 주변에 거하던 김창협(金昌協), 이희조(李喜朝), 이단하(李端夏) 등의 낙론(洛論) 계열 제자들은 대대로 관료 생활을 하며 경화사족으로서 송시열이 남긴 정치이념을 실천한다. 송시열은 저술도 상당히 방대하여 그의 문집인 『송자대전』만 해도 장장 215권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다. 이 밖에도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논맹문의통고』, 『경례의의』, 『심경석의』, 『이정서분류』 등의 저작이 있어, 그가 평생 동안 정립한 사상의 정수를 잘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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