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 연대기
  • 조선
  • 송준길

송준길[宋浚吉]

송시열과 함께 서인세력을 이끌다

1606년(선조 39) ~ 1672년(현종 13)

송준길 대표 이미지

송준길 행초 동춘당필적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17세기 산림(山林) 예학(禮學)의 시대를 주도하다 -송준길(宋浚吉)의 생애와 업적을 중심으로-

17세기 지식인들은 양란에 대한 후유증을 예치(禮治)로서 회복하고자 하였고, 그 과정에서 예학자들은 예학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자신들의 입론을 정치 현실에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송준길은 그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태어나 당시 예학의 거두였던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을 하며 예학자로, 서인 학통의 계승자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친척인 송시열(宋時烈)과 정치적 학문적 동시로서 활약하며 ‘양송(兩宋) 시대’를 전개하였다. 당시 정계에 큰 이슈였던 예송(禮訟)이 극화되었을 때, 송시열과 함께 서인의 입장에서 예론을 전개하며 예송을 주도하였다. 그의 서인으로서, 예학자로서의 그의 위상은 영조대 문묘(文廟)에 종향됨으로써 사후에도 지속되었다.

2 예학禮學의 시대에 예학 전문가로 명성을 날리다.

17세기는 변화와 격동의 시기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대내적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조선이 문명의 상징으로 존중한 명나라가 망하고, 오랑캐라고 무시하는 청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국제질서의 변동이 있던 시기였다. 인조반정으로 등장한 사대부들은 성리학 이념을 정치 현실에 구현하려는 의지를 가진 성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반정의 명분을 제시하며 도덕정치와 산림숭상을 반정 정국의 기본 틀로 구상하였다. 이후 발발한 병자호란 이후 극도의 좌절감에 빠진 조선지식인은 자기 회복의 방법을 모색하였고 그 결과 대내적으로 예치, 대외적으로 북벌론(北伐論)을 제창하였다. 특히 효종(孝宗)은 국가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산림 등용을 도모하였으며, 산림이 정치 현장에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산림의 종장들은 세도(世道)의 담당자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예치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시기의 산림들은 수준 높은 학덕과 군왕의 존숭으로 한 시대의 정치와 학문과 사상을 주도하였으므로 그 영향은 지대하였다. 이처럼 예질서의 재정립이 시급하게 요청되었으며 이러한 시대적 과제의 담당자인 산림이 예치주의 구현을 다각도로 모색하였다. 송준길은 이러한 변화와 격동의 시기인 17세기의 초중기를 살았던 인물로서 예질서의 회복을 추구하던 대표적인 산림(山林) 예가(禮家)였다.

서인과 남인은 예에 대한 입장의 차이를 보여주었고, 이것은 붕당의 전개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서 각 학파별로 예치를 위한 이론 대립을 드러냈는데, 두 번의 예송이 그것이다. 1차 예송은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이 죽자 계모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가 1년 복을 입을 것인가 3년 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으며, 2차 예송은 1674년 효종의 왕비이자 현종의 모후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승하하자 역시 1차 예송 때 예의 적용이 문제가 되었던 조대비가 상복을 1년 입을 것인가 9개월 입을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서인의 예론이 국왕과 사대부 모두 예의 적용이 같다는 ‘천하동례(天下同禮)’의 보편성을 강조한 것이라면, 남인의 예론은 국왕과 사대부는 예의 적용이 달라야 한다는 ‘왕자례부도사서(王子禮不同士庶)’로서 군신간의 위계를 중시하고, 왕권을 옹호하는 입장으로서 서로 차별점을 지니고 있었다.

3 양송(兩宋) 시대를 열다.

송준길의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다. 할아버지는 군수(郡守) 송응서(宋應瑞), 아버지는 영천군수(榮川郡守) 송이창(宋爾昌)이다. 어머니는 광주 김씨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은휘(金殷輝)의 딸이다. 송준길의 처는 진주 정씨 정경세(鄭經世)의 딸이다.

송준길의 가계는 상청당(雙淸堂) 송유(宋愉)에게서 기원을 찾는다. 송유는 절행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태조의 묘에 합사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회덕(懷德)으로 돌아와 종신토록 출사하지 않은 절행에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은진송씨는 고려 말 송명의(宋明誼) 때부터 회덕에 정착하였지만 은진송씨가 회송(懷宋)이라 칭해질 만큼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송유 당시부터이다. 송유가 회덕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에 ‘송촌(松村)’이라는 지명이 생기기도 하였다.

송준길은 1606년(선조 39) 12월 28일 서울 정릉동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우선 태어난 장소가 김계휘(金繼輝)의 옛집으로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등 예학의 3대가 이 집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특이한 일로 전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송준길이 김장생, 김집으로 이어지는 예학의 정통을 이었음을 강조하는 후대인의 의도와도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람의 꿈에, 어떤 사람이 산구(産具)를 손에 들고 말하기를, “나는 하늘나라 사람인데, 오늘 송이창이 아들을 낳을 것이므로 이것을 주려고 왔다.” 하였다. 송이창의 연세는 많은데, 뒤를 이을 아들이 없자, 종족과 이웃이 모두 우리 청좌공처럼 덕을 쌓으신 분이 어찌 끝내 후손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선생이 출생함에 이르러서는 또 모두 서로 축하하며 “덕을 쌓은 보답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태어나서부터 외모가 수려하고 용모가 특이하며, 피부가 깨끗하고 정신이 맑으니, 사람들은 “정신은 가을 물처럼 맑고 골격은 옥처럼 아름답다.”라고 칭찬하였다.

그의 본관은 은진이지만 주로 아버지의 부임지인 진안(鎭安), 신녕(新寧), 영천(榮川), 송촌(宋村) 등지에서 자라고 생활하였다. 호란이 발발한 이후로 호란을 피해 영남 안음현(安陰縣) 노계촌(蘆溪村)에 잠시 거주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9세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글 읽기나 쓰기를 좋아하여 밤이 되어도 배우지 않고는 잠을 자지 않았으며 글씨체 역시 어른 글씨 같아서 감상하는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독서를 너무 좋아하여 병이 날 것을 염려한 송이창은 장기를 두도록 명하여 놀이를 하면서 휴식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놀이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1623년(인조 1) 선생의 나이 18세에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송준길의 부친인 송이창은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모친은 김장생의 종매였다. 따라서 송준길은 이이의 풍도를 들을 수 있었고, 김장생에게서도 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송준길은 김장생에게 계몽서를 배우고, 이 때부터 지속적으로 왕래하며 모든 글을 통하였다. 그 중에서도 예서에 정통하고 해백하여 예서의 말들은 자기 말처럼 외웠다고 한다. 이때 김장생이 예로서 사람을 가르치고 있던 때라 송준길을 두고 “이 애가 장차 예가(禮家)의 큰 인물이 될 것이다.”고 극찬하였다.

이로서 송준길은 이이에서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서인 학통의 맥을 잇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송준길의 아들 역시 송시열(宋時烈)과 김집(金集)에게 수학하게 함으로써 서인 학통의 뚜렷한 학맥을 형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장생의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예학(禮學)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의 예학적 연원은 이이-김장생-김집으로 계승되어온 기호학파에 연원을 두었지만 남인 예학자인 정경세를 장인으로 모시면서 남인의 학문적 영향 역시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정경세는 송준길을 보고는 대성할 사람으로 기대하여 크게 공경하고 대우하였는데, 이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에게 정경세는 “이 사위는 예사롭게 대우할 수 없다.” 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송준길은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에게 사사 받으며 호서 예학의 주요한 인물로 평가받아왔다. 그러나 그는 장인이자 예학가였던 정경세에게 학문을 배우고, 이황(李滉)을 평생의 모델로 삼았다고 할 만큼 남인 학풍의 영향도 받았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그를 호서예학파에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호서와 영남 지역의 예설 교류에 기여하고, 조선 예학의 주역으로 발전하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송준길의 사우관계에서 주목할 부분은 송시열과의 관계이다. 송준길의 졸기에 의하면 송시열과는 동종(同宗)인데다 또 중표형제(中表兄弟)가 되고 함께 김장생·김집 부자를 스승으로 섬겨서 덕망이 엇비슷하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양송(兩宋)’이라 칭하였다고 하였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부계와 모계가 모두 친인척 간이었는데, 부계의 경우 송유의 현손(玄孫)으로 송세량(宋世良)과 송세영(宋世英)이 있는데, 세량의 현손이 송시열이고 세영의 증손이 바로 송준길이었다.

뿐만 아니라 송준길과 송시열은 모계 쪽으로 외할머니가 같은 이종 6촌 사이였다. 송시열과 송준길의 외할머니는 모두 이윤경(李潤慶) 의 딸로 자매 사이였다. 어린 시절 집안이 어려웠던 송시열은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형제, 동학, 정치적 동지로서의 관계를 자리매김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송시열이 송준길이 있는 송촌으로 와서 기거하며 함께 공부한 것을 시작으로 1630년(인조 8)에는 송시열이 옥천에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동학으로서 학문을 수학하였다. 이후에도 송시열과 행보를 함께 하였는데, 1634년(인조 12) 장현광(張顯光)을 함께 찾아뵙거나 김장생을 돈암서원(遯巖書院)에 봉향하기 위한 항례의절을 함께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후의 예송(禮訟)의 주요한 정치 현안에 대해서 입장을 함께 하였을 뿐 아니라 향후 서인의 학풍에 기여하였다. 저서로 『동춘당집(同春堂文集)』이 있으며, 글씨로는 「윤계순절사비문(尹啓殉節碑文)」이 있다.

4 예학의 대가로서, 예송(禮訟)의 중심에 서다.

1630년(인조 8) 송준길은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고, 1636년(인조 14) 예산현감에 제수하였지만 모두 나가지 않았다. 송준길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것은 효종대였는데, 연양부원군 이시백의 영향인 측면도 없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송준길은 연양부원군 이시백(李時白)과 사이가 좋았는데, 인조[조선](仁祖)가 시백을 불러 주연을 벌일 때, 세자(후의 효종)에게도 대신으로서 이시백을 깍듯이 대우할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인조가 이시백에게 “지금 세상에 독서인이 누구냐?” 하고 물으면 이시백은 그 기회를 이용해 송준길을 추천하였고, 세자는 그러한 일을 기화로 송준길을 늘 염두에 두었다. 실제로 1649년(효종 1)에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송준길을 기용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삼았다.

이 외에도 효종대 그의 정계 진출은 효종이 친청파를 몰아내고, 산림을 등용하는 정치적 시점과도 맞물린 것이었다. 송준길은 친청파인 김자점과 그 무리를 논핵하여 미움과 원망을 받았으나 이후 효종이 그들을 몰아내고 역모 죄로 처벌되자 왕의 예우가 다시 융숭해지고 정계로 불러들이는 일이 계속 잇따랐으며 교자(轎子)를 타고서 나오라고 명할 만큼 우대하였다.

특히 그의 주목할 정치적 행보는 예송에서의 역할이었다. 1659년 병조판서·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송이 일어났다. 송시열이 기년제(朞年祭 : 만 1년)를 주장하자 그를 지지하였으며, 남인 윤휴(尹鑴),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등의 3년 설과 논쟁을 거듭한 끝에 일단 기년제를 관철시켰다. 서인은 국제(國制)인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내세워 1년, 남인은 고례인 『의례(儀禮)』에 근거를 두고 3년을 주장한 끝에 서인이 승리한 것이다. 이후 벼슬은 대사헌에까지 이르렀다.

5 사후 문묘(文廟)에 배향되며 영향력을 미치다.

1672년(현종 13) 12월 송준길의 병세는 심각해졌다. 송시열이 문병하였고, 12월 2일 회덕의 동춘당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원근의 선비들과 향리의 친지들의 애도가 끊이지 않았다. 송준길의 병세가 심해지자 원근의 선비들과 향리의 친지들이 양식을 싸들고 와서 모두 모여 밤낮으로 문후하는 사람이 문안에 가득하고 골목에 넘쳤으며 돌아가시자 친척의 죽음처럼 애통해하였으며 궁벽한 산야의 어린이와 늙은이도 모두 놀라 부르짖으며 서로 “현인이 죽었다.”고 고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외에도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기록도 등장하는데, 이날 붉은 기운이 하늘로 솟고 그 빛이 땅을 비추니 길을 가던 사람이 바라보고는 불을 끄기 위해 달려왔는데, 와서 보니 선생이 막 운명하였다. 이해 10월 성관(星官)의 ‘소미성이 동방에 떨어졌다.’라는 발언이 있었는데, 권상하(權尙夏)는 송준길의 죽음이 바로 성관의 말과 맞아 떨어진다고 애석해 하였다.

1673년 1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1675년(숙종 1) 2차 예송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허적(許積)·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관작을 삭탈 당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관작이 회복되었다. 이후 서인의 집권이 이어지면서 1681년(숙종 7)에는 숭현서원(崇賢書院)에 봉향되었고, ‘문정(文正)’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1682년(숙종 8) 숙종이 직접 송준길 문집의 간행을 명하기도 하였다. 1694년(숙종 20)에 검담서원(黔潭書院), 1702(숙종 28)에 상주에 흥암서원(興巖書院), 1703(숙종 29)에 성천서원(星川書院)이 완성되어 송준길은 그 곳들에 봉향되었다. 뿐만 아니라 1681년(숙종 7) 서인 측에 의해 문묘에 종사하자는 건의가 있은 이래, 지속적인 논의를 거친 후 1756년(영조 32)에 이르러서 송시열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