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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肅宗]

정쟁의 와중에서도 왕조중흥의 기틀을 닦다

1661년(현종 2) ~ 1720년(숙종 46)

숙종 대표 이미지

숙종 어필 칠언시

국가문화유산포털(문화재청)

1 숙종의 가족관계와 개인으로서 일생

조선의 제19대 왕으로 생몰년은 1661~1720년(현종 2~숙종 46)이며 재위기간은 1674~1720년이다. 이름은 순(焞)이며 자는 명보(明普)이다. 제18대 왕인 현종의 외아들로, 어머니는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태어났다.

7살 때인 1667년(현종 8) 1월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69년 1월에 입학례를 치르고 이듬해에 관례(冠禮)를 치렀다. 1671년 10살 때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당시 세자빈으로 맞아들인 이는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의 딸로서, 곧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1674년 8월 18일에 부왕 현종이 승하하자 같은 달 23일에 국왕에 즉위하였으니, 이때 나이가 14세였다.

1680년(숙종 6) 10월에 왕후가 천연두를 앓다가 죽자 그 시호를 ‘인경’이라 하였다. 이듬해인 1681년 5월에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로 맞았는데, 곧 인현왕후(仁顯王后)이다.

1683년 12월에는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승하하였다.

1688년(숙종 14) 10월에 득남하였는데 소의(昭儀) 장씨(張氏) 소생으로, 곧 후일의 경종(景宗)이다.

이때 소의 장씨를 승격시켜 희빈으로 봉하였다.

1689년 1월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들이 반대하는 왕자의 원자(元子) 정호(定號)를 관철시키고, 또 그 과정에서 기사환국을 통해 서인들을 숙청하였다. 이러한 조처의 연장선에서 같은 해 5월에 인현왕후를 폐출(廢黜)시키고

희빈 장씨를 올려 왕비로 삼았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을 단행하여 남인을 숙청하고 서인을 대거 기용하면서는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같은 해 9월에 득남하였는데, 곧 후일의 영조(英祖)로 숙의 최씨 소생이었다.

1701년(숙종 27) 8월에 인현왕후와 사별하였는데,

이때 왕비를 저주하였다는 죄를 물어 희빈 장씨를 자진케 하였다.

1702년에 10월에 김주신(金柱臣)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곧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720년에 회갑을 맞이하였는데, 그해 6월부터 환후가 깊어져서 6월 8일에 경덕궁(慶德宮)의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는 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이고, 묘호는 숙종(肅宗)이다. 능호는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의 서오릉(西五陵)에 있다.

현종의 적자로 태어난 숙종은 왕후들과 후궁들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여럿 두었는데, 그 가운데 역사적으로 조명을 받는 이들은 역시 희빈 장씨 소생의 경종과 숙빈 최씨 소생의 영조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부인을 맞아들이고 혹은 내치는 과정이 숙종대의 정치적 파란과 떼놓고 볼 수 없이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또 아들들인 경종과 영조 역시 그러한 가족사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정국의 동향·굴곡과 또 그 정치를 이끌어가는 왕들의 숙명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 숙종대의 정치, 정국의 동향

숙종의 재위 기간은 조선 중기 이래 지속되어 온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어떠한 정치 운용 방식의 극성기는 또 한편으로는 그에 뒤이은 하향·쇠퇴를 의미하는 만큼, 숙종대는 붕당정치가 말폐현상을 노정하면서 그 자체의 파탄이 발생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숙종 즉위 초의 정국은 그 직전인 현종 말년 예송(禮訟)에서 승리한 남인(南人)이 주도하고 있었다. 1674년(현종 14)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국상(國喪) 과정에서 인조의 계비 조대비의 복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서인(西人)이었던 현종의 장인 김우명과 그 조카 김석주(金錫胄)가 송시열(宋時烈)을 제거하고 서인 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남인과 연합하여 장자부 기년설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조대비의 복제는 기년상으로 정해지고

정권은 허적(許積)을 비롯한 남인에게 기울었다. 얼마 후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자, 숙종은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을 숙청하고 허적·윤휴(尹鑴)·허목(許穆) 등 남인들에게 정권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숙종대 정치의 시작은 남인 주도의 정국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1680년(숙종 6) 이른바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일거에 남인이 정계에서 축출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되는데, 이는 숙종대 정국 동향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이후 숙종대 정치는 양대 정치세력이 일진일퇴하는 ‘환국정치’의 양상을 띠게 된다.

1680년 경신환국은 숙종 즉위 초반부터 정국을 주도해오던 남인 세력에 대한 국왕 숙종의 견제에서 비롯된 정권 교체였다. 1680년 3월 남인 영수 영의정 허적이 관련된 이른바 유악(油幄) 사건이 발단이 된 이 환국은, 남인이 담당하고 있던 군권을 전격적으로 서인에게 넘기는 국왕 숙종의 인사조치로 시작되었다. 곧이어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과 종친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형제가 역모 혐의자로 거론된 고변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남인의 군사적 기반으로 인식되던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의 복설·운영에 관계하던 남인계 정치인들의 숙청으로 이어지면서, 정국은 일거에 서인 주도로 전환되었다.

경신환국 이후로 붕당 간의 대결이 극렬한 양상을 띠게 되었고 붕당정치가 일당전제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경신환국 이후 수년간 유지되어 오던 정국은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일변하게 되었다. 이 환국은 왕후인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극에서 흔히 ‘장희빈’으로 지칭되는 숙종의 후궁 장씨가 1688년 왕자를 생산하였고, 이듬해 1월 원자 정호 문제가 불거지면서 전개되었다. 숙종의 원자 정호 관철, 서인 숙청과 남인 기용, 노론 영수 송시열의 사사(賜死), 인현왕후 민씨 폐출과 희빈 장씨의 왕비 책봉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 이후 다시 남인이 정권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론 가문 출신이었던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남인과 연계되어 있던 역관 가문 출신의 희빈 장씨가 왕비에 책봉된 것은 국왕의 가족사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숙명적으로 차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은 서인들의 폐비 민씨 복위 움직임에 대한 남인 정권의 남옥(濫獄), 숙종의 남인 정치인 처벌, 소론계 인사 등용, 그리고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를 계기로 남인 정권이 몰락하고 노론·소론으로 분립되어 있던 서인이 재집권하게 된 정국 변동이었다.

이후 남인들은 정계에서 붕당으로서 존립기반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 숙종대 후반의 정국은 서인의 분파들인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의 불안정한 연정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른바 1716년(숙종 42) 병신처분(丙申處分)을 계기로 노론 일색의 정국이 전개되면서 소론에 대한 정치적인 박해가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경종대인 1721~1722년에는 신임사화(辛壬士禍)를 통해 소론측의 반격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환국으로 대변되는 숙종대 전반기의 정치 운영 양상은 이후 송시열과 윤증(尹拯) 간의 대립에서 야기된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 왕자들(후일 경종, 영조)을 둘러싼 노·소 분쟁 등 붕당/당파 간의 정쟁으로 이어졌다. 숙종대는 정치권 내의 갈등과 정국의 불안정성이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환국으로 인한 정국 불안정화와 민심의 동요, 외척의 권력 장악에 대한 사류들의 비판·공세, 왕과 신료들 간의 충돌, 그리고 왕비·후궁들의 영욕 등 붕당정치의 말폐로 인한 대가는 혹독하였다.

환국이 남인-서인 간의 갈등에 의해 전개된 정치 행태라면, 또 한편으로는 남인과 서인 붕당 각각의 내부 분열 양상 역시 숙종대 붕당정치의 극성기에 전개된 과열된 정국 동향을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또 이는 숙종대 후반기의 정국 추이를 이해하는 단서이다.

남인은 숙종 초에 탁남(濁南)과 청남(淸南)으로 분기되었다.

예송의 승리 이후 서인 처벌에 대한 태도, 정국 운영 방식을 둘러싼 의견 대립이 그 원인이었는데, 허적을 비롯, 민암(閔黯)·민희(閔熙)·오시수(吳始壽)·목창명(睦昌明)·유명천(柳命天) 등이 이른바 탁남에 속하는 인사들이었다. 민희·오시수·목창명·유명천 등은 경신환국 때 사사당하거나 유배되었으며, 민암은 1689년 기사환국 이후 정국을 주도하는 위치에 섰으나 갑술환국 직후 사사되었다. 허목과 윤휴, 홍우원(洪宇遠)·권대운(權大運)·이봉징(李鳳徵)·이옥(李沃)·오정위(吳挺緯) 등은 청남으로 분류되는 정치인들이다.

한편, 17세기 전반 다양한 갈래로 분기되어 있던 서인은 효종·현종대에 이르러 송시열을 정점으로 다시 하나로 규합되었는데, 숙종대에 이르러 노론-소론의 분기를 겪게 된다. 분당의 계기는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서인 내부에서 발생한 주도권 쟁탈에서 비롯되었다. 1682년 외척·노장파로 분류되는 김익훈(金益勳)의 전횡과 과도한 남인 탄압에 대해 소장파 한태동(韓泰東) 등이 탄핵한 사건이 그 출발점이었다. 이때 송시열을 비롯한 노장파도 한태동의 탄핵 상소를 반박함으로써 노장파-소장파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서인 내부의 분파·대립 양상은 송시열과 그의 제자 윤증 사이의 불화로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를 노론, 한태동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파를 소론으로 지칭하게 되었다.

노론은 1680~1689년의 시기에 정국을 주도하다가 1689년 원자 정호 문제로 송시열·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등이 숙청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일시적인 몰락을 겪게 된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서인이 재집권하였을 때 정국을 주도한 이들은 남구만(南九萬)을 비롯한 소론이었다. 이후 숙종대 후반기의 정국은 남인이 정권에서 영구히 배제되고, 노론·소론에 의해 운영되었고, 그들 간의 정쟁이 격화되어 가는 양상을 보인다.

숙종대의 정국은 이처럼, 전반기(1674~1694년)에 남인·서인 간의 대립을 주축으로 전개된 ‘환국정치’와, 후반기(1694~1720년)에 서인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전개된 노·소 간 대립으로 그 외양을 정리할 수 있다. 숙종대 정국의 추이에서 보이는 정쟁의 격화는 붕당정치의 말폐가 노정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앞선 현종대의 예송 논쟁으로 손상된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국왕 주도의 정국 운영 방식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특히 숙종 전반기의 환국의 단행은 붕당 간의 대립이라는 운동원리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러한 대립구도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숙종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된 것이 분명하다.

3 숙종의 치적과 국가체제 정비

숙종대는 정쟁의 격화로 인한 정국의 불안정성이 가중된 일면이 있는 반면 왕권은 오히려 강화·안정되었으며, 그러한 요인은 왜란과 호란 이후 계속되어온 국가체제 전반에 대한 복구와 정비를 완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첫째, 숙종대 추진되었던 경제정책과 경제 분야의 업적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우선 상평통보(常平通寶)의 주조와 유통을 들 수 있다. 1678년 영의정 허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주조·유통되기 시작한 상평통보는 조선 말기까지 유일한 법화로서 통용되었다.

상평통보의 유통은 양란 이후 조선사회의 변동·발전, 즉 상업의 발달과 대동법의 실시로 인한 조세체계의 단순화 및 상품 생산의 증가 등의 추세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국가재정을 확충하기 위한 재원확보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발전적 경제 정책이었다. 특히 화폐의 원료가 되는 동(銅)을 대일무역을 통해 확보하였다는 사실은 국제 무역의 활성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1608년(광해군 즉위)에 처음 실시된 대동법(大同法)을 1678년(숙종 4) 경상도, 1708년(숙종 34) 황해도에까지 확대실시하여 100년 간에 걸쳐 진행되어온 대동법의 전국 시행을 완성시켰다. 대동법은 1894년(고종 31)의 세제개혁 때 지세(地稅)로 통합되기까지 조선후기 수세·재정 분야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가 되었다.

광해군대부터 추진되어 온 도(道) 단위의 양전사업의 연장선에서 1709년 강원도 양전, 1719~1720년 삼남 양전을 시행함으로써 서북방 일부를 제외한 전국적 규모의 양전사업을 완료한 것 역시 숙종의 경제분야의 치적으로 들 수 있다.

숙종대에 추진된 이상의 경제 정책은 양란 이후 사회·경제 부문의 변화 추세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둘째, 숙종대에 이루어진 서적 간행은 문화·학술 분야의 치적이다. 국가적 편찬·간행사업으로 『선원계보(璿源系譜)』·『대명집례(大明集禮)』·『열조수교(列朝受敎)』·『북관지(北關誌)』 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전속록(大典續錄)』·『신증동국여지승람』·『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 등 다수의 전적(典籍)이 간행되었다. 특히 조선후기 각종 관서지(官署志)의 편찬이 시작된 때가 숙종대로, 『통문관지(通文館志)』, 『혜국지(惠局志)』, 『홍문관지(弘文館志)』가 편찬되었다. 이는 절정에 도달한 조선후기 사회의 정치·문화를 재정리하고 변화하는 사회에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자 하는 당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셋째, 숙종대는 역사적 재평가 작업과 시대관념의 정리가 이루어진 때이기도 하다. 태조와 태종의 시호를 추가로 올리고, 인조는 중흥의 대업을 이루었다고 평가하여, 또 효종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혔다 하여 높여서 세실(世室)로 삼았다.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을 복위시킨 것 또한 숙종대 역사적 재평가 작업 가운데 주목되는 부분이다. 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하였고, 1698년 신규(申奎)의 상소에 따라 복위를 결정하여 묘호를 ‘단종(端宗)’으로 추증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또 소현세자빈 강씨의 신원을 회복시키고 강빈옥사(姜嬪獄事)에서 죽음을 당한 강석기(姜碩期)를 신원하는 조치를 취한 것 역시 숙종대의 일이다.

한편, 1704년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나라 신종의 은의를 기리기 위해 창덕궁 후원에 대보단(大報壇)을 건립한 것은, 그 실현 가능성 여부와는 별개로 17세기의 정신사를 규정하면서 국가재건 과정에서 국민의 분발을 추동하는 역할을 해냈던, 북벌대의와 대명의리에 대한 시대적 정리작업이었다. 즉 대보단은 앞선 시기의 북벌론을 문화적 화이관(華夷觀)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재평가 작업은 역사 속의 충역관계를 왕권 강화의 측면에서 재정립하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넷째, 국방력의 재건·강화 역시 숙종의 주요 치적으로 들 수 있다. 왜란과 호란을 경험한 조선사회로서는 국가 재건 과정에서 가장 절실한 부문이 바로 국방력의 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중반의 시기까지 산성 수축 등 국방의 주요 부분에서 별다른 진척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숙종대에는 대흥산성(大興山城)·황룡산성(黃龍山城)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도성을 크게 수리하는 등 국방 재건에 분명한 성과가 있었다. 특히 1712년 영의정 이유(李濡)의 건의로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게 함으로써 수도방위체제 정비를 일단락하였다. 군제 측면에서도 효종대 이래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訓鍊別隊)와 정초청(精抄廳)을 통합하여 금위영(禁衛營)을 신설함으로써 5군영체제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임진왜란 이후로 계속된 군제 개편이 사실상 완료되었다. 1703년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하여 양역변통의 방안을 강구하고, 이듬해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을 마련하여 양정(良丁) 1인의 군포 부담을 일률적으로 2필로 균일화한 것 또한 이 부문의 주요 치적 가운데 하나이다.

다섯째, 대외정책상의 성과도 주목된다. 재위 초반부터 종래의 폐사군지(廢四郡地)에 관심을 보여 무창(茂昌)·자성(慈城) 등에 진(鎭)을 설치하여 북방 영토에 대한 영유권 회복과 적극적인 경영을 도모하였다.

한편, 그러한 북방 정책의 결과 조선인들의 압록강 연변 지역의 출입이 빈번해졌고 그 지역에 거주·활동하는 중국인들과의 마찰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685년에는 백두산 부근을 답사하던 청나라 관원들이 압록강 건너 삼도구(三道溝)에서 조선 채삼인(採蔘人)들의 습격을 받아 크게 외교 문제가 발생한 것을 비롯, 1690·1704·1710년에도 범월로 인한 외교적 마찰이 이어졌다. 이는 곧 조선-청 간의 국경선 분쟁으로 이어졌는데, 양국의 국경 협상 결과물이 바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이다.

그러나 숙종대의 대청관계가 갈등 국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현실적인 판단을 토대로, 17세기 후반 오삼계의 청조에 대한 반란이나 대만 해상세력의 반청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내수(內修)의 달성에 주력함으로써 청과 평화적 관계를 구축하였다. 이는 18세기 청의 건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조선후기의 부흥을 이루는 기초적 토대가 되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1682·1711·1719년 세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 17세기 초반 이래의 평화적 관계를 지속하면서, 양국의 일상적 통교 현장인 왜관(倭館)에서 발생하는 비정상적인 외교적 관행들을 해소해나갔다. 1678년 왜관 이전을 계기로 대일외교상 주도권과 자신감을 회복한 것은 큰 성과였다. 특히 1693년 안용복(安龍福)의 도일(渡日)이 발단이 되어 7년에 걸쳐 진행된 울릉도 해역의 귀속을 둘러싼 외교전에서 일본 막부측이 조선의 영유권을 공인토록 한 것은 주목할 만한 외교적 성과이다.

4 숙종의 시대를 이해하는 한 방향

숙종대는 왜란과 호란 이후 붕괴된 조선의 사회경제적 토대를 재건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던 17세기 한국사의 전개를 긍정적으로 마무리 지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다음 시대인 영·정조대의 조선후기의 중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숙종대에 이루어진 각 부문의 치적·성과는 이를 잘 설명해준다.

일제의 식민지 침탈을 합리화하기 위한 왜곡된 역사 이해 방식인 식민사관의 관점에서는, 숙종대에 극심하였던 ‘당쟁’이 곧 국망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하지만 붕당정치의 극성기·쇠락기로, 치열한 정쟁이 전개된 숙종대~정조대가 오히려 조선왕조 제2의 중흥기였음을 감안하면, 이는 분명 그릇된 이해 방식이다. 물론 환국을 비롯한 정쟁으로 인하여 많은 명사들이 죽음을 당하고 정국이 불안정한 양상으로 전개된 것은 냉정하게 분석·평가해야 하는 부분이다. 다만 국가사회의 변화발전과 맞물리면서도 ‘정치’란 어디까지나 그 자체의 운동원리를 가지고 변화·발전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숙종대의 정국의 혼란·추이와 사회경제적 발전을 기반으로 한 국가체제의 정비는 상호 모순되지 않게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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