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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純祖]

19세기 전반, 세도 정치 극복에 실패하다

1790년(정조 14) ~ 1834년(순조 34)

순조 대표 이미지

서울 인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1 머리말

18세기 르네상스라고까지 불리는 영조(英祖)와 정조(正祖)의 시대가 지나가고 19세기가 시작되었다. 19세기 말 일제 침략의 책임까지 겹쳐지면서 지금까지 19세기는 부정적인 시대로 인식되고 있고, 그 시작이 되었던 것이 순조가 국왕으로 재위하였던 19세기 전반기이다. 순조는 19세기 시작된 세도정치기를 극복하고자 시도하지만 결국 별 성과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2 아버지의 기대 속에 성장한 순조, 11살에 아버지를 잃다.

정조는 1782년(정조 6)에 의빈 성씨(宜嬪 成氏)에게 첫째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얻었으나, 5세의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았고 4년 뒤인 1790년(정조 14)에 수빈 박씨(綏嬪 朴氏)에게 둘째 아들 순조를 얻었다. 정조는 정비에게서 후사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했는데, 순조는 40세가 가까워진 나이에 후궁을 통해 얻은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 순조는 왕위 계승을 위협할 만한 존재 없이 평탄하게 차기 국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대신들이 세자로 책봉할 것을 몇 차례 건의하였으나, 정조는 순조가 자신이 세손으로 책봉된 나이가 될 때를 기다려 세자로 책봉하고자 하였다. 그 사이 순조는 유교적 소양을 쌓으며 국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할 수 있었으며 11살이 되던 1800년(정조 24) 정월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1살의 나이는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더 많은 훈련과 성장이 필요한 나이었지만, 같은 해 6월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뒤를 이어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순조는 아직 국정을 운영하기에는 미숙한 나이였기 때문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게 한 영조의 처분이 정당하다는 노론 벽파의 의리를 대변하며 정조 연간 정국 구도에서 중요한 기둥을 이루었던 남인 세력을 제거하였고, 왕권 중심의 군사 기구의 핵심인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였다.

3 세도정치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다.

순조가 15살이 되던 1804년(순조 4)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가 직접 정사를 돌보면서 정국은 변화하였다. 이때 김조순(金祖淳)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씨는 벽파 세력과 힘을 겨루면서 순조 생모인 수빈 박씨의 친정 박준원(朴準源) 가문의 협력을 얻어냈다. 풍양 조씨인 조득영(趙得永) 역시 벽파 김달순(金達淳) 공격에 앞장섬으로써 안동 김씨와 협력관계를 형성했다. 김조순은 최고 권력 기관인 비변사에서 실권을 행사했고, 규장각 제학으로 있으면서 규장각을 장악했다. 그 밖에 장용영의 남은 군사력을 이용하여 훈련도감의 재정을 늘리는 등 세력을 계속 확장하였다.

순조는 성년기에 접어든 1808년(순조 8)부터는 세도가문을 견제하면서 국정에 적극적으로 임하기 시작했다. 이때에 이르러 국정 주도를 위한 정보 수집에 힘을 기울였고, 재정․군제․토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서영보(徐英輔), 심상규(沈象奎)로 하여금 『만기요람(萬機要覽)』을 편찬하게 하였다. 또 전국 각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폐를 보고하게 하였으며, 1809년(순조 9)에는 전국의 수령, 감사, 유수들에게 민폐의 내용과 그것을 바로잡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보고하라는 윤음을 내렸다.

순조는 또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군사력 마련에 부심하였다. 그는 오위(五衛)제도가 유명무실해지고 군문이 설치된 다음에 군정의 폐단이 심해졌다고 하여 군문(軍門)의 설치를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이는 김조순 또는 그 계열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군문의 상황을 비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인식 위에서 1810년(순조 10) 3월에는 궁궐의 호위를 담당하는 무예청의 군병을 늘리려 하다 김조순 가문의 대사헌 김이도(金履度)의 반대 상소에 부딪혀 취소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특히 이때의 계획은 공식적인 논의를 거치지 못하고 순조가 개인적으로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1811년(순조 11) 3월 피폐하여 명목만 남아있던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를 강화할 것을 명령하였고, 궁궐 경비 군인들이 위엄을 갖출 수 있도록 의장을 정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각종 강(講), 응제(應製), 제술(製述) 등의 잦은 시행도 순조의 주도적인 국정운영의 한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학문신강(漢學文臣講), 전경문무신강(專經文武臣講), 이문제술(吏文製述), 입직문음관친시(入直門蔭官親試) 등이 1811년(순조 11) 경에 급격히 늘었다. 이와 같이 하급관료의 강제(講製)를 늘림으로써 하급관료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킨 이유는 국정에 몰두하던 순조가 그러한 자신의 노력을 뒷받침할 관인을 육성할 필요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문신․무신들과 각종 활쏘기 모임 등도 1808년(순조 8) 경 많이 행하여지기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경연을 부지런히 열었고 밤을 세워가며 야대에 참석하거나 경연에 태만한 홍문관 관원을 체차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순조는 신료들을 접견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4 개혁의 좌절

그러나 순조의 노력은 순조롭게 추진될 수가 없었다. 1811년(순조 11) 10월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긴요하지도 않고 명분도 뚜렷하지 않은 강제(講製)를 너무 많이 실시한다고 비판하는 등 신하들은 국왕의 노력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할 때가 많았다. 또한 김조순은 훈련도감을 장악하고 있었고 병조판서 김이익(金履翼)은 금위영(禁衛營)의 강화를 요구하는 한편, 앞서 보았듯이 군문에 비판을 가하고 국왕을 호위할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순조의 노력은 저지되는 상황이었다.

1808년(순조 8)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지방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노력은 관료체제 전반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규모의 어사 파견으로 인한 폐단을 더하는 역효과를 자아냈다. 거기에 1809년(순조 9) 3월 민폐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그 해 여름에는 비변사에 지시하여 그것들을 바로잡도록 하였으나 1811년 3월까지 한 가지도 개혁에 대한 보고가 없었고 국왕의 채근을 받고서야 부랴부랴 비변사에서 그 시행상황을 정리하여 보고하였다. 또한 구휼과 죄수 심리 등 국정의 구체적인 면을 주재하려는 순조의 노력은, 밑의 담당자가 하면 될 일이니 나서지 말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초래하였다.

거기에 순조가 국정을 주도하고자 했던 1809년(순조 7)부터 7년 동안은 한재와 수재가 겹치고 전염병이 만연한 시기였다. 또한 1811년(순조 11) 12월 말 시작된 ‘홍경래의 난’은 이듬해 4월까지 계속되었다. 난을 진압한 이후에도 ‘홍경래 불사설’이 널리 퍼질 정도로 ‘홍경래의 난’은 순조를 난처하게 하였다. 그런 가운데 1812년(순조 12) 11월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풍양 조씨인 조득영이 박준원의 아들 박종경(朴宗慶)을 권간으로 탄핵하다가 유배당하고 박종경도 이를 계기로 훈련대장에서 사임하면서, 안동 김씨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일시에 사라졌던 것이다. 여기에 1813년(순조 13) 말부터 순조의 건강마저 악화되었다. 자연재해, 홍경래의 난, 안동 김씨의 발호, 건강 악화 등을 겪은 순조는 1814년(순조14) 이후 국정에서 한 발 물러섰다. 신료들이 순조에게 적극적으로 국정에 임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순조는 이후 10년이 넘도록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1819년(순조 19) 임선(任㸁)은 상소에서 임금이 너무 침묵을 지켜 이해와 공사(公私)의 분별이 권력자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결재가 밑에서 처리된다고 비판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순조는 별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았고 임선은 조정 신하들을 없애려 한다는 반격을 받아 유배당했다.

5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갑작스러운 효명세자의 죽음과 순조의 절망

순조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찍부터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1823년(순조 23) 5월 이후에는 남공철(南公轍)의 건의에 따라 궁중 공식행사가 행해질 때 국왕과 신하들을 만나는 자리에 세자를 참여시켰다. 이 밖에 국가 제례를 세자에게 대신 맡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기초 작업이 되었다. 순조는 세자가 자신을 대신하여 왕권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고 세자가 성인이 되는 1827년(순조 27)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다.

역대 대리청정에 비해 효명세자에게 부여되었던 권한이 훨씬 크다는 점을 통해 순조의 정치적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을 통해 순조는 세도정치를 극복하기 위한 계기로 삼고자 했다. 효명세자는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이 장악한 인사권을 최대한 활용하였고, 정조를 본받아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높이는 왕실행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왕권강화를 시도했던 효명세자의 노력은 1830년 효명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별다른 결실을 맺지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났다.

정치의 주도권은 다시 외척세력에게 넘어갔다. 순조 역시 아들을 잃은 비탄 속에서 불과 4년 뒤 세상을 떠났다.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憲宗)이 즉위했지만 그의 나이는 너무 어렸고, 왕권은 다시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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